1680. 황금을 물에 던진 통신부사 김세렴 조선 중기 문신 김세렴(1593~1646)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다녀온 뒤 쓴 ≪사상록(槎上錄)≫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투금(投金)”이란 한시가 있습니다. “나에게 보내온 주머니 속엔 백 냥의 황금이 들어 있다오. 가지려 해도 청렴을 상할까 싶고, 돌려주면 실망할 것 뻔한 일이라 배가 강 중간쯤 오자 물에 버렸지. 아랫사람들이 모두 보고 무척 놀라워했네.” 이를 두고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 허목은 “마음은 그대로 받되 뇌물은 없었던 것으로 한 것이다”라고 하며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엔 ‘뇌물 받기’에 눈이 먼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청렴을 크게 중시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김세렴의 문장은 아름다웠는데 《근사록(近思錄)》, 《소학》,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동명집》 등을 펴냈고, 대사헌과 도승지, 호조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요즘 공직자들이 황금을 받는다면 물에 던질 수 있을까요? 참고 : 《조선통신사》, 이원식, 민음사, 1991
1679. 우리 겨레의 정성과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는 조각보 보자기는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싸두거나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사람에게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싸 보낼 때 쓰던 생활필수품이었습니다. 보자기 중에서도 조각보는 여성들이 쓰다 남은 조각천을 이어서 꼼꼼히 바느질하여 만든 것으로 우리 겨레의 정성과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옷이 해어지면 조각조각 덧대어 꿰매 입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천을 조각조각 덧붙이는 것은 꼭 가난해서가 아니라 검소한 마음과 생활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조각보는 여성들이 한 땀 한 땀 바느질에 공을 들여 만들면서 복(福)을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각보는 서양의 몬드리안이나 클레 등의 회화작품과도 간혹 비교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색 구성과 조화를 계산해서 만든 것이라면 우리나라 조각보는 우리 겨레의 실용성과 더불어 특별히 계산하지 않고도 조각조각 조화를 이뤄낼 줄 아는 탁월한 미적 감각에서 나온 자연스런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 ≪우리규방문화≫, 현암사 / ≪한국의 미≫, 국립중앙박물관
1678. 누룩으로 빚는 우리 전통 술, 중국과 일본 사서에 기록되다 위서동이전 고구려조에 ‘선장양(善藏釀)’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에서 술을 비롯한 장 등 발효식품을 많이 만들어 먹는다는 뜻입니다. 또 고려술과 신라술이 널리 알려졌음은 물론 중국 송나라 문인들의 작품에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일본의 《고사기》에는 오진왕(270~312) 때 백제에서 인번(仁番) 수수보리(須須保利)라는 사람이 와서 누룩을 써서 술을 빚은 법을 가르치고 일본 술의 신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술은 누룩으로 빚었는데 누룩은 밀이나 찐 콩 따위를 굵게 갈아 반죽하여 덩이를 만들어 띄워서 누룩곰팡이를 번식시켜 만듭니다. 삼국시대의 술은 누룩과 엿기름으로 빚어지는 술과 엿기름으로만 빚어지는 례(醴) 곧 감주의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금주에 누룩 흥정”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술을 먹지 않는 사람에게 누룩을 팔려고 흥정한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수고를 한다는 말이지요. 명절 같은 때는 잘 빚은 우리술 한잔을 조상님께 올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1677. 사대주의에 빠져 성묘를 거부한 사대부 한가위 명절에 성묘를 하셨나요? 주자의 《가례》에 보면, 성묘는 묘제 곧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의 하나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성묘에 제사 절차가 합쳐져 묘제로 발전한 것으로 봅니다. 성묘는 주로 한식이나 한가위에 합니다. 그런데 한식에는 겨울 동안 찾아뵙지 못한 조상에게 인사드리는 것이며, 한가위에는 햇과일과 곡식을 조상에게 바치는 성묘를 합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쓴 '안정진의 질문에 답하는 글'을 보면 3월 상순의 벌초는 당나라 '개원례(開元禮)'에서 비롯되었지만 한식에 성묘하고 한가위에 벌초하는 것은 '중국의 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於禮無見)‘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는 없다.”라는 것 때문에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가위 성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정복은 한가위 성묘는 가야 수로왕 때부터 시작된 우리 풍속으로 봅니다. 조상에게 성묘하는 것도 중국의 기준에 따라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1676. 조선시대 보쌈을 당했던 선비 이야기 조선 광해조 때 문인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는 과거를 보러 서울에 왔다 괴기한 일을 겪은 선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적이 끊긴 종가(현재의 종로)에서 장정 네 명에게 보쌈을 당한 일입니다. 어딘지도 모르게 끌려가 예쁜 여인과 동침할 수밖에 없었던 선비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과거를 보러 한양에 왔다가 밤마다 그 종가를 서성였으나 그 장정들을 또 만날 수는 없었다지요. 조선시대 때는 과부가 된 여인은 죽을 때까지 개가를 못한다는 법이 있어 이런 일도 벌어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산군 4년(1498년) 송헌동이라는 사람이 이 법을 폐하고 개가를 허락해달라고 임금께 청하였지만 대다수 대신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보쌈”에는 여자집에서 외간남자를 보(褓)에 싸서 잡아다가 강제로 동침시키는 경우와, 남자가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오는 “과부업어가기”가 있었습니다. 참고 : ≪조선여속고≫, 이능화, 동문선, 1990
1675. “추석, 한가위” 중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부르시나요? 우리 겨레의 가장 큰 명절, 한가위는 추석, 가배절, 중추절, 가위, 가윗날로도 불립니다. 그럼 이 가운데 어떤 말을 쓰는 것이 좋을까요?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8월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또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그 기록이 있습니다. 한가위의 다른 이름인 중추절(仲秋節)은 가을을 초추(初秋), 중추(仲秋), 종추(終秋) 3달로 나누어 음력 8월 가운데에 들었으므로 붙은 이름입니다. 추석이라는 말은 ‘예기(禮記:옛 중국 유가(儒家)의 경전)’의 '조춘일(朝春日) 추석월(秋夕月)'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중추(中秋), 추중, 칠석, 월석 등의 말을 쓰는데 중추의 추(秋)와 월석의 석(夕)을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 것이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추석’은 말밑(어원)이 명확하지 않고 어려운 말이므로 쉽고 뜻이 분명한 토박이말 ‘한가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1673. 삼국유사는 일연이 75살에 쓴 귀중한 역사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인정받습니다. 국보 제306호로 지정된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1206∼1289)이 75살이던 충렬왕 7년(1281)에 편찬한 역사서이지요. 그 나이면 보통 모든 일을 접고 쉴 나이지만 일연은 이 ≪삼국유사≫를 써서 우리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나라의 시조로 받드는 배달겨레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습니다. 이 ≪삼국유사≫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역사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과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크게 평가를 받습니다. 만약 이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 역사를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 의존해야 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활불교 이야기≫를 쓴 시인 임효림 스님은 "일연 스님은 민족의식을 살리고자 ≪삼국사기≫에 반기를 들고 나왔으며,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알리려고 ≪삼국유사≫라는 새로운 역사서를 펴냈다."라고 말합니다.
1672. 중요무형문화재 갓일, 망건장, 탕건장 보유자 인정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강순자(1946년생, 제주 제주시) 선생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강전향(1943년생, 제주 제주시) 선생을 제66호 망건장, 김혜정(1946년생, 제주 제주시) 선생을 제67호 탕건장 보유자로 인정했습니다. 역시 말의 고장답게 말의 털로 만드는 것과 관련한 중요무형문화재 세분이 모두 제주에서 나왔군요.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뉘는데,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대우 부분을 말 꼬리털 또는 목덜미 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망건은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로, 망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망건장’이라고 하지요. 또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하나로,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주로 말총으로 만드는데,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합니다.
1671. 두꺼운 널빤지로 만든 반닫이 이야기 우리 겨레는 “반닫이”라 하여 책·두루마리·옷·옷감·제기(祭器) 따위를 넣어 두는 길고 번듯한 큰 궤짝을 써왔습니다. 이 반닫이는 앞판의 위쪽 반만을 문짝으로 하여 아래로 젖혀 여닫아서 반닫이라 합니다. 참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두꺼운 널빤지로 만들어 묵직하게 무쇠 장식을 하였는데, 반닫이 위에는 도자기로 장식하거나 이불을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특히 느티나무로 만든 것은 “귀목반닫이”라고 하고, 지방에 따라 특성을 살린 많은 종류가 있지요. 지방에 따라 나누는 반닫이 종류에는 주로 백통과 놋쇠로 조촐하게 장식한 서울반닫이, 대체로 크고 큼직큼직한 쇠 장식을 앞면에 가득 대는 평양반닫이, 제비초리 경첩을 달며, 안쪽 윗부분에 세 개의 서랍이 있는 전주반닫이, 크기가 작으며 쇠장식을 적게 대고 나무의 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상도반닫이 등이 있는데 그중 강화반닫이가 유명했습니다. 요즈음엔 시골도 커다란 장롱 시대라 이런 작은 반닫이는 다 늙은 시어머니 방에 끝물로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