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도올 김용옥 선생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읽었습니다. 책 표지의 부제는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입니다. 그렇기에 저도 도올이 보는 4.3과 여순사건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샀습니다. 그런데 역시 도올답게 글이 천방지축으로 튑니다. 너무 아는 것이 많으니까 글이 나아가다가도 곁길로 빠져 한참 설을 풀게 되지요. 도올도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 이러한 얘기를 자세히 하고 앉아있을 계제가 아니지만, 한 예를 더 들어보자! 나의 죄업이란 진실로 너무 많이 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알아도 너무 정밀하고 정확하게 안다는 데 있다. 알면 괴롭다. 알기 때문에 남이 보지 못하는 측면이 너무 많이 보이고 또 그것을 종합해보면 우리 상식의 터무니없는 오류에 대해 분노가 치밀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눈감고 살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것들이다. 세밀하게 안다는 것만으로 세계가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세밀하게 아는 것과 동시에 반드시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이크로와 매크로는 반드시 동시적일 수밖에 없다.” 예! 도올은 알아도 너무 많이 압니다. 그래서 이 책도 400쪽 가까운 분량인데, 책이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남의 요지에는 두 임금이 이웃하여 영면(永眠)하고 있다. 바로 성종(선릉)과 그의 아들 중종(정릉)이다. 워낙 비싼 땅이라 그런지 능역(陵域)을 싹둑싹둑 잘라 최대한도로 개발하느라고, 왕릉 바로 옆까지 길이 나있다. 정릉 옆길은 이면도로라 그나마 차들이 적게 다니는데, 선릉 옆길에는 성종이 누워있건 말건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종은 살아서는 조선의 문물을 완비하였다고 하여 묘호(廟號)도 이룰 ‘성(成)’자를 써서 성종이라 했지만, 죽어서는 영 잠자리가 편안치 않다.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성종의 시신을 능욕하더니만, 오늘날 후손들은 왕릉에 바짝 붙여 넓은 도로를 내었으니 성종이 무덤 안에서 영원의 잠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종은 그나마 옆에 아내(정현왕후 윤씨)라도 같이 있지만, 중종은 홀로 누워있다. 임금이 영면하는 곳이면 당연히 그 옆에 왕비도 같이 있어야 하거늘, 중종은 왜 홀로 누워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사연을 알아보러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종은 원래 고양시 서삼릉 내 둘째부인 장경왕후(희릉) 옆에 같이 묻혔었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죽었으니, 중종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가 야단이지요? 코로나바이러스 예방과 치료도 문제지만 이 때문에 초래된 사회 경제적 피해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일요일 저녁에 이태원에 나갔는데,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평소 주말이면 아무리 춥더라도 사람으로 붐비던 이태원 거리인데, 이렇게 거리가 설렁한 것은 처음 봅니다. 저녁을 먹고 가끔 들르던 맥주집에 들어갔는데, 한참 동안 손님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종업원들이 우리가 주문한 것 가져다주고는 자기들끼리 카운터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더군요. 자기들도 평소 같으면 바빠야 할 시간에 자기들끼리 노닥거리고 있으니, 노닥거리면서도 어색했을 것입니다. 이 집에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도 처음 봅니다. 아마 평소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나오던 명동도 틀림없이 썰렁할 것 같습니다. 이거~ 빨리 진정이 되어야지 이러다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많이 끼칠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그런데 여러 나라가 중국 우한으로 전세기를 파견하여 자국민들을 데려오는 등 온 세계가 이 때문에 떠들썩하지만, 사실 이 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중국에 304명뿐입니다. 아! 참! 필리핀에서 오늘 한 명 사망자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초대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리진의 연인이었다는 것만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있지 않습니까? 서양의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먼저 인쇄되었다고 우리가 자랑하는 불교서적 말입니다. 이 《직지심체요절》을 콜랭이 프랑스로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서양놈이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약탈해갔구나”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콜랭이 골동품상에게 값을 치루고 산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 온 콜랭은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 기회가 되는대로 우리의 책과 미술품 등을 사들였다는군요. 콜랭이 그렇게 수집한 책 중에 이런 귀한 책이 있었던 것인데, 당시에는 이 책을 산 콜랭이나 이를 판 상인이나 그저 고서(古書)로만 생각하고 사고판 것이지, 이 책이 그렇게 귀한 책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한국인입니다. 이 책을 프랑스로 가져간 콜랭은 1911년 이 책을 고서 경매장에 내놓아, 이를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가 샀습니다. 그리고 앙리는 죽을 때 이 책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습니다. 그 뒤 196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신경숙 작가의 소설 <리진>에는 홍종우(1850~1913)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홍종우는 한국인 첫 프랑스 유학생입니다. 마침 리진이 파리에 머무는 시기와 홍종우의 파리 유학 기간(1890~1893)이 겹치기에 작가는 또한 리진과 홍종우를 연결합니다. 둘은 프랑스의 유일한 조선인 남녀이었으므로 실제로도 파리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역사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홍종우는 1988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아사히 신문사 촉탁 식자공으로 일하며 돈을 모은 뒤, 프랑스 유학길에 오릅니다. 프랑스 정치사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고 프랑스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한 것이지요. 왕권 절대주의 애국자 홍종우는 파리에서도 갓을 쓰고 도포를 휘날리며 다녔으며, 고종과 대원군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서양옷을 입고 다니던 리진보다는 홍종우가 더 파리 시민들의 눈에 잘 띄었겠습니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홍종우가 리진에게 이성적인 눈길을 주자, 리진이 이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리진이 조선에 돌아왔을 때 홍종우는 계속 상소를 올려 콜랭이 리진을 데리고 갈 수 없게 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달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있는 자양스테이션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다. 조그마한 공연장에 들어가니 사방의 벽에는 그림이 걸려있고 그 앞으로 돌아가면서 이동식 의자들이 놓여 있다. 공연은 그 가운데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무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플라멩코 공연을 바로 눈앞에서 그것도 플라멩코를 추는 무용가의 숨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고, 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바로 앞에서 본 것이다. ‘플라멩코’ 하면 정열의 춤 아닌가?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춤이고, 또 집시의 춤에서 유래한 것이니 정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열을 더하는 것이 탭댄스처럼 신고 있는 구두를 바닥에 다닥다닥 부딪치며 소리를 내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소리를 좀 더 잘 내기 위해서 바닥에 판까지 깔았다. 무용가가 한창 절정에 오르며 발을 구를 때에는 발 구르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발을 현란하게 놀리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플라멩코까지 보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해야 하겠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주최한 블루로터스 최혜원 대표가 한 번 보러 오라고 초대하였는데 최 대표는 원래 미술을 전공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잠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동생이 출국하면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며 나에게 영문소설을 하나 주고 갔다. 리사 시(Lisa See)라는 미국 여류작가가 올 3월에 펴낸 《The Island of Sea Women》라는 소설이다. 동생 덕분에 정말 오래간만에 영어 원어로 된 소설을 읽어본다. 처음에는 의무감에 읽기 시작하였으나, 곧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소설은 영숙과 그녀의 친자매 같았던 친구 미자라는 해녀를 중심으로 1938년부터 2008년까지 제주 구좌읍 하도리 해녀들의 삶을 그린 것인데, 소설을 통하여 제주 해녀들의 삶과 애환, 슬픔 등이 피부에 와 닿도록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제주의 풍토, 민속 신앙, 역사 등 제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여 나는 작가가 당연히 한국계 미국인일거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게 뭐야? 백인 여자다! 비록 증조부의 중국인 피가 조금 섞여있긴 하지만, 외모는 완전 백인 여자다. 어떻게 백인 여자가 제주를 우리보다 더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리사는 어느 잡지에 실린 제주 해녀의 사진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아, 언젠가 제주 해녀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온라인 중고서점(www.bookoa.com)에서 《신라인과 대화》라는 책을 주문하여 읽었습니다. 나는 ‘신라인과의 대화’라고 하기에, 신라의 역사나 문화 예술에 관한 책이겠거니 하면서 책을 주문했던 것인데, 배달되어온 책을 받아드니 지은이는 히라노 교코(平野杏子)라는 일본 여자 화가입니다. 이를 정희정씨가 번역하여 2000년에 출판하였네요. 책 표지에는 ‘화폭에 담은 경주 남산 마애불’이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고, 경주 남산의 마애불도 그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일본 여자 화가가 경주 남산의 마애불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교코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현모양처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정대로 진학합니다. 1930년생인 교코가 대학 들어갈 때인 1950년대에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여자는 대학을 보내더라도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정대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코는 미술에의 꿈을 버릴 수 없어 대학 입학 후 미술 동아리에 가입했고, 졸업 후에도 회화연구소 조수로 일하며 끝내는 일본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여 화가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아이들이 서너 살쯤 되었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만약 당신의 14살 딸이 혼자서 몇 달 동안 전국을 유람하며 다닌다고 한다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뭐라고요? 학교 빠지고 유람하는 것을 누가 허락하겠냐고요? 아! 그렇지요. 학생이 몇 달 동안 학교 땡땡이치고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할 부모는 없겠군요. 그럼 방학 기간이라면 허락하겠습니까? 이 역시 허락하겠다고 선뜻 손을 들 부모는 많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런데 여러 여건상 남자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조선 시대에 이렇게 혼자서 전국을 유람하며 다닌 14살 소녀가 있었습니다. 물론 남녀유별이 엄격하던 시대라 남장을 하고 다녔지만요. 그 소녀는 바로 원주 출신의 금원 김씨(1817 ~ ?)입니다. 금원은 진사 시험에만 통과했을 뿐 계속 과거에서 미역국을 먹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집에 들어앉힌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금원은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면서 넓은 세상에 눈을 뜹니다. 그런 금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조선 여인의 운명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금원은 14살이 되어 이제 자신도 곧 부모님이 정해준 혼처를 따라가야 하는 시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그 운명에 묶이기 전에 집을 박차고 떠납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에 《반일 종족주의》를 읽으면서 그저 감정적으로만 이 책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처럼 자료에 입각하여 엄밀한 학문적 논증을 거쳐 이를 비판하는 책은 없을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충남대 허수열 교수가 쓴 《개발 없는 개발》이 보이더군요. 당장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허 교수는 오랫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사는 침략, 수탈, 저항 등의 키워드로 뒤덮여왔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한 맞바람은 외국에서 왔습니다. 피티(Mark R. Peattie)가 ‘개발과 수탈’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개발’이라는 측면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개발의 측면을 부각시키지만 여전히 ‘수탈’에 방점이 찍혀 있었는데, 점점 더 ‘개발’에 비중을 드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바로 이런 학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허 교수는 일제 강점기 각종 경제통계를 훑어보면, 개발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 지배가 일본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조선 사람의 의사에 반하는 부당한 것이었다는 점도 명백하다고 합니다. 한편 개발론자들은 식민지 조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