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KBS 임병걸 해설위원이 KBS 아침뉴스에서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라는 마당을 진행하였지요. 시인이기도 한 임 위원이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경제 이야기를 시와 접목하여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조곤조곤 들려주곤 했는데, 이제 그렇게 풀어낸 이야기가 같은 이름의 책으로 묶여서 우리에게 선을 보였습니다. 임시인이 친필로 사인하여 직접 저에게 손으로 건네 준 책을 펼쳐듭니다. ‘전월세 오디세이아, 지상의 방 한 칸을 찾아서’, ‘비정규직, 그들이 우주로 떠나기 전에’, ‘가난, 벗어던져야 하는 숙명의 굴레’... 글의 제목만 보아도 임 시인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서민들을 바라보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임시인은 ‘시 속의 경제, 경제 속의 시’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와 경제, 얼핏 생각하면 전혀 무관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대척점에 있는 분야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인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고 인간의 삶이 행복과 기쁨으로 점철된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몽상가로 취급되기 일쑵니다...... 반면 경제는 이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냉정하고 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치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바다사자의 하나입니다. 한 때 그런 강치가 독도에 넘실거려 조선시대에는 독도를 가지도 – 강치를 일명 가지라고도 하였지요– 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강치가 독도에 넘실거렸다? 독도에 강치가 넘실거렸다는 것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독도에 넘실거리던 그 강치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거야?”라며 고개를 갸우뚱 하시겠지요.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제로 자기네 영토로 편입한 후, 일본 어부들이 독도의 강치를 무수히 학살하였습니다. 강치의 가죽이 돈이 되었거든요. 당시 강치 한 마리 값은 황소 열 마리 값에 필적하였다는군요. 1905년 이후 약 8년 동안 일본어부들이 학살하고 잡아간 강치는 무려 14,000여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일본어부들은 강치가 줄어들자 강치를 확실히 잡기 위해 아기 강치를 먼저 잡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동작이 굼뜬 아기 강치를 먼저 잡으면 아기를 구하러 어미가 올 테고, 그럼 손쉽게 어미 강치까지 잡는 것이지요. 쪽바리 아니랄까봐 그런 비열한 방법까지 쓰다니... 일제 강점기 이렇게 독도의 강치를 잡아대니 결국 독도의 강치는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남양주 마재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로서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요즈음 남양주시가 다산을 남양주를 대표하는 역사인물로 집중적으로 띄우고 있지요. 그래서 마재마을에 실학박물관도 만들고 다산에 관련된 학회, 축제 등 다양한 행사도 펼치고 있구요. 그런가 하면 둘레길이 유행하면서 다산길도 만들었네요. 요즈음은 마재마을에 다산생태공원도 들어서 주말에는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헉! 한확 이야기 한다면서 뚱딴지 같이 왜 다산 이야기 하냐고 하시겠군요. 마재마을 입구에 세조 때 좌의정 한확(1400 ~ 1456)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습니다. 저는 마재마을 가면서 여기에 한확의 무덤과 신도비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았더니 한확에게는 누나 덕분에 출세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네요. 지금부터 그 얘기를 잠깐 풀어보겠습니다. 태종 때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에 공녀를 요구합니다. 고려 때 원나라의 요구로 많은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졌는데, 명나라 때까지도 이런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군요. 사실 영락제의 어머니는 원나라 때의 조선 공녀 출신입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도 여진족이라는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얼마 전 우실하 항공대 교수의 <요하문명의 발견과 동북아 상고사의 재편>이라는 강좌가 있었습니다. ‘요하문명의 발견’이라는 제목에 눈이 번적 띄어 참석하였습니다. 전에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대의 유물이 계속 출토되면서 중국학자들이 당황해하더니, 이를 중국문명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강의를 들으니 이미 중국에서는 이를 황하문명보다 앞선 요하문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다만 이는 한족과는 상관이 없는 오랑캐의 - 동이족이 되겠지요 - 문명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기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요하문명의 건설자는 중국 한족들이 자신의 조상으로 생각하는 황제족의 문명이며, 이곳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중원으로 들어와 하왕조를 정복하고 상왕조를 건설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동이족이나 몽고족을 포함한 동북아의 민족들이 모두 황제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이들 민족들의 역사도 다 중국사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역사도 중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고, 이게 바로 동북공정이지요. 얼마 전에 시진핑이 트럼프와 회견하면서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라고 얘기한 것이 이런 시각에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지난 7월 26일 문재인 정부 내각 1기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지요? 이번에도 새 각료 인선을 위한 청문회에서 많은 후보자들이 크고 작은 흠으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퇴하였네요. 아마 임명된 장관들 중에도 청문회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민낯에 마음이 편치 않을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청문회 때마다 자신의 개인 이력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부담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를 원치 않아 후보로 제청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안에 압축 성장을 해오면서 도덕보다는 물질 만능의 사회가 되고, 심지어는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어떠해도 좋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제 보다는 자기 개인의 욕심 채우기가 우선이 되었기에, 청문회 때마다 이런 사태를 보게 되는 가 봅니다. 더구나 교육에 있어서도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보다는 1등주의 교육을 위주로 한 것이 그런 의식을 더욱 조장한 것이구요. 과거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요? 유학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코엑스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국제도서전시회를 합니다. 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다른 전시회는 안 보더라도 이 전시회는 꼭 봅니다. 그리고 전시회를 한 번 돌고 전시회장을 빠져나올 무렵이면, 제 손에는 대여섯 권의 책이 든 쇼핑백이 들려있습니다. 이번에 사 본 책 중에 전송열, 허경진이 엮고 옮긴 《조선 선비의 산수기행(유몽인ㆍ최익현 외, 돌베개)》이 눈에 띕니다. 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등산장비도 제대로 없던 조선시대에 그래도 산수를 좋아하는 양반들이 산을 찾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제법 있네요. 이 책에는 그 중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 20군데의 기행문이 실려 있습니다. 산수기행이니 산의 품속에서만 노닐고 쓴 기행문이 많지만, 실제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기행문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면암 최익현(1833~1906)도 1875년 한라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남한의 최고봉답게 중간에 날이 저물어 노숙합니다. 요즘 등산용어로 하면 비박했다고 해야 하나요? 그런데 산행날짜가 3. 27.이라 그냥 비박했다가는 얼어 죽겠지요. 최익현은 나무에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하였는데,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니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기슭에는 족두리 산소라고 불리는 무덤이 있습니다. 효종 때 청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화냥년으로 손가락질 당하다 28살에 병으로 쓸쓸하게 죽은 의순공주의 무덤입니다. 얼마 전에 의정부 교도소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의순공주 무덤에 들러보았습니다. 지금부터 비운의 의순공주 삶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참! 그전에 혹시 ‘공녀’와 ‘화냥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말씀드려야겠네요.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참패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처녀들을 상납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끌려가는 여자들을 공녀(貢女)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이렇게 공녀로 끌려갔거나 전쟁 직후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 중에 용케 조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인이라고 하여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은 고리타분하게 여자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요구하던 유교국가 아닙니까? 그래서 환향녀를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양반댁에서는 아예 집안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지요. 이 환향녀가 음운변화를 일으키면서 화냥년이 된 것인데, 오늘날에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天女何年一乳亡 하늘 선녀가 어느 해 젖가슴 한쪽을 잃어버렸는데 今日偶然落文房 오늘에 우연히 문방구점에 떨어졌다네 少年書生爭手撫 나이 어린 서생들이 앞다퉈 손으로 어루만지니 不勝羞愧淚滂滂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눈물만 주르륵 흘리네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이 자신의 책 《아름다운 우리 문화 산책, 인물과 사상사》의 머리말을 시작하자마자 내놓은 시입니다. 이름 모를 선비가 쓴 시라는데, ‘백자 무릎 모양 연적’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우리 문화 산책>은 김영조 소장이 그 동안 쓴 한국문화편지 “얼레빗” 글을 모아 낸 책입니다. 참! 얼레빗은 다 아시다시피 빗살이 굵고 성긴 반원형의 빗을 말하는데, 김소장은 자신의 글을 이런 우리 문화의 상징인 얼레빗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소장은 그 동안에도 얼레빗 글을 모아 《하루하루가 잔치로세》와 《키질하던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라는 책을 내놓았는데, 이번이 얼레빗 글로는 세 번째 책이네요. 참! 얼레빗 글이 뭔지 모르시는 분이 있으시겠군요. 김소장은 2004년부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고 하여 우리 문화에 대한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 동창인 언론인 김창희가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책을 냈습니다. 2009년 가을 어느 날 창희는 집 안을 정리하다 어느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인 종이 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상자 속에는 창희가 9살 때 돌아가신 창희 아버지께서 평생 찍은 사진필름이 롤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필름 하나 하나에 대한 설명과 함께... 창희가 어머니께 이 얘기를 하자, 어머니께서는 평생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의 개인수첩 10여 권을 창희에게 보여줍니다. 이때의 심정을 창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갑자기 지나간 시대가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사진과 수첩 두 가지를 맞춰보면 뭔가 그림이 그려지겠는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날부터 집 안 여기저기를 뒤져보았다. 이렇게 찾아낸 자료들과 필름, 수첩까지 다 쌓아놓고 보니 꾹꾹 눌러 담아도 큰 여행용 트렁크 하나는 가득 찰 것 같았다. 잘 알지 못하던 과거로부터 빛바랜 영상들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자료들을 가지고 아버지를 기억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파편화된 자료와 자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그 틈새는 결국 누군가의 기억과 합리적
[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기자] “이런 말, 나도 500년 만에 처음이야. 내가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지 솔직히 겁도 나. 이미지라는 건 말이야, 남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남이 나를 또 다른 이미지로 덧칠하기 전에는 벗을 수도 없는 거거든. 나하고는 무관하게 만들어진 그 이미지 속에 막상 갇혀야 하는 건 나인 거지. 그러니 인선 씨, 이 편지는 절대 공개되어선 안 돼. 인선 씨하고 나 사이에서 끝나야 하는 비밀이 되어야 하는 거야. 왠지 알아? 나에 대한 환상이 벗겨졌을 때 고통 받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환상이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사임당의 비밀편지>에 나오는 사임당의 말입니다. 그러면 “어? 사임당이 쓴 비밀편지가 500년 만에 발견되었나?”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임당의 비밀편지>는 신아연 작가의 장편소설입니다. 수필가로만 활약하던 신 작가가 이번에 처음으로 소설에 도전하여 내놓은 작품이 바로 <사임당의 비밀편지>입니다. 위의 글은 그 소설에 나오는 한 글귀이지요. ‘신사임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현모양처’일 것입니다. 율곡이라는 대유학자를 길러낸 어머니, 그렇기에 5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