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저잣거리 붉은 먼지 한 자나 깊어 하고 많은 벼슬아치 뜨락에 넘실대 누가알랴 한 조각 구름 덮힌 이 골짜기 가난한 중에게 하늘이 준 만금의 가치를! -소요대사 산중회(山中懷)- 소요대사 (1562~1649)가 거닐던 이곳 구례 연곡사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어제 찾은 연곡사의 가을 하늘은 티끌하나 없이 맑고 푸르렀다. 절 경내는 스님의 독경소리만 그득할 뿐 고즈넉했다. 소요대사가 입적한 연곡사는 변함없이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만이 가득했다. 연곡사는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의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로 이 자리에 큰 연못이 있어 제비들이 와서 노는 모습을 보고 연곡사(鷰谷寺)라 지었다고 한다. 벌여놓은 모든 물상 다 허깨비 긴 허공 지나는 사이 자취 안남겨 허공이 몸 갈무리할 자리 못되니 바람결에 비 젖은 소나무 보게 백 천의 경전 손가락 같아서 손가락 따라 하늘의 달을 보네 달 지고 손가락 있어 한일도 없으니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 서산대사의 제자 소요대사의 시를 읽다보면 청렴결백한 선비를 연상케한다. 소요대사의 세속 성씨는 오 씨이고 담양사람이다. 열세 살에 백양산에서 출가하였으며 스무 살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가위를 앞두고 이제 슬슬 벌초 벌초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어제 청명한 가을하늘 날씨에 전주 효자동 공원묘지에서도 벌초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말을 맞아 일찌감치 성묘에 나서는 사람들로 어제 고속도로도 정체가 심했다. 하지만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를 맞아 조상의 무덤을 찾는 모습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 9월 7일(금) 저녁 6시 30분 서울 종로2가 ‘문화공간 온’에서는 우리문화신문 운영위원회의가 열렸다. 김영조 발행인, 서한범 고문(한국전통음악학회 회장)은 물론 신문 이름바꾸기 특별자문위원인 한글디자이너 한재준 서울여대 교수와 멀리 진주에서 올라온 이창수 토박이말바라기 두루빛까지 14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분위기를 이어갔다. 먼저 의제에 오른 ‘신문 이름바꾸기’는 김영조 발행인이 그 의의와 경과에 대한 보고로 시작되었다. 김영조 발행인 “우리 문화를 중심으로 우리말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시작한 우리 신문은 그동안 ‘우리문화신문이란 이름이 모두 한자 이름인 것은 물론 정치 느낌도 약간 풍긴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남북한ㆍ중국 국어정보학자들의 중심 역할을 해온 연변의 현용운 중국 조선어신식학회장(국어정보)이 이름을 우리말로 바꾸면 중국은 물론 북한까지 아우르는 지원체제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도 있었지요. 이에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마침 이름 짓기와 한글디자인 전문가인 서울여대 한재준 교수님이 함께 머리를 맞대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이름바꾸기‘가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토박이말바라기 이창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최용덕 (崔用德, 1898. 9. 19.~1969. 8. 15.) 선생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고 밝혔다.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을 익혔고, 1916년 원세개가 설립한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단기서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했다. 이러한 경험은 선생의 항일무장투쟁에 큰 자산이 된다. 1919년 중국에서 3ㆍ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선생은 다수의 한인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거주하던 중국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 모집을 위해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1921년 4월 이후 의열단에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선생은 단장 김원봉과 함께 1922년 의열단의 국내거사를 준비하여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했다. 이후 북경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여 1926월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이바지했다. 독립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선생은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복무했으며,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왜 고대사람들은 길 없는 사막을 헤쳐 인도로부터 《법화경》을 구해왔을까요? 머나먼 법화경의 여정을 따라 오아시스 도시 중국 둔황으로 떠나보실까요?” 막 상영되고 있는 동영상 화면에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뽀얀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법화경》 그림이 그려져 있는 중국 둔황의 막고굴 내부가 비쳐졌다. 지난 토요일(9월1일) 낮 2시 무렵, 나는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한 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법화경》, 평화와 공생 메시지(이하 ‘법화경’) 전시장에 있었다. 아침부터 빗줄기를 뿌리던 날씨가 좀 개길 기다려 점심을 먹고 광안리 해수욕장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니 해수욕장 바로 지척에 법화경 전시가 열리고 있는 한국SGI수영욱일문화회관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SGI’라는 것은 국제창가학회(國際創價學會, Soka Gakkai International)를 가리키는 말로 ‘창가학회’란 《법화경》 신앙을 중시하는 일본의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재가신도단체에서 유래한 종교단체를 말한다. 법화경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흰 블라우스에 까만 치마를 입은 안내원들이 동영상실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토요일 오후라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1949년 6월 26일.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아침에 라디오를 트는 순간, 아 ~아 ~ 하늘도 땅도 우는 소리 바다조차 우는 소리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양 믿었더니 두 겨레 갈라진 땅 이대로 두시고서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십니까? 한 남자가 울부짖으며 시를 읊었다. 짧은 시지만 길게 기일게 흐느끼며 시를 읊어서 그 울림이 광활한 벌판에서 폭풍우를 몰고 오는 우레 소리처럼 강하고 장엄하게 들려 왔다. 딱 한번 들은 그 시는 내 머리 속에 각인되었고, 내 가슴속에 들어와 촛불처럼 나를 밝힌다. 그 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군인 안 두희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던 날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을 때에 라디오를 통해 들은 시다. 퇴근해 돌아오신 아버지께서도 침통한 표정을 지으시고, "어렵게 독립되어 서로 합심해 나라를 지켜야 할 이때에 이런 변고가 생기다니?" 하시며 몹시 괴로워 하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최용덕 [1898~1969] 지사는 서울 출신으로 일찍이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입대하였다. 1922년 이후 1940년까지 중국 공군에서 교관, 수상비행대장(水上飛行隊長)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에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하여, 천진에서 조선무산자동맹회장(朝鮮無産者同盟會長) 김 한과 의열활동을 위한 폭탄 확보와 투척 계획 등을 협의하여 김상옥(金相玉) 의사를 지원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북경과 안동 사이를 오가며 폭탄운반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32년 4월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자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조직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45년에는 광복군 참장(參將)으로서 총사령부 참모처장으로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적개요>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우리 신문 ‘연변조선족문학창’에 좋은 글을 연재하고 있는 석화 시인(중국 연길 문학아카데미 대표)이 오는 10월 16일(화) 저녁 7시부터 일본 도쿄 진보쵸에 있는 ‘<책거리(CHEKCCORI)> 까페(대표 김승복)에서 <윤동주 시 세계와 동주를 통해 보는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대한 특별강연을 한다. 현재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인구는 약 200만에 이른다. 이처럼 조선인이 중국에 거주하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한 농민 집단이 만주(중국 동부)로 이주 정착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 같은 조선인 대거 이주는 그 뒤 일제강점기 때 늘어나서 1910년 초기에 20만 명이던 재만 조선인 수는 광복 직전까지는 170만 명에 달했다. 그 뒤 광복 후 집단이주의 막은 내렸지만 이 때 귀국하지 않고 만주지방에 잔류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 현재의 중국조선족을 형성하고 있다. 조선인의 만주이민사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에 걸쳐 약 1세기 동안 추진되었으며 시인 윤동주 가족 역시 만주이민 가족의 일원이었다. 석화 시인은 이번 도쿄 강연에서 일본인들에게 더 없이 사랑받고 있는 윤동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진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그 문화를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 직접 참여한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도 실시간으로 슬기전화(휴대폰)나 인터넷 등으로 이곳 상황을 물어올 정도로 이번 행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도 머지않아 인천이라는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는 한국을 제2고향으로 자신 있게 말하는 오사카예술대학 요시카와 나오야(吉川直哉) 교수의 말이다. 요시카와 교수는 “2018 인천아시아해양미디어 페스티벌(총감독 류은규 작가)” 에 출품한 세계 12개국, 58개 대학의 학생 작품을 모으는 등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지난 8월17일부터 9월 2일까지 17일 동안 인천아트플랫폼과 개항장 일대의 전시장에서는 “2018 인천아시아해양미디어 페스티벌”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8 인천아시아해양미디어 페스티벌”은 사진ㆍ영상 미디어를 매개체로 넓은 세계를 연결함과 동시에 인천이 사진 영상 문화의 허브 기지가 되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은 국내외 사진작가들이 기획한 순수 민간 행사로 모두 80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느 날 한 마리의 타조가 살해되었다 누가 살해했나 타조를? 나는 아니다 참새가 말했다 살해자의 짓이다 살해된 것을 살해한 것은 그러면 누가 보았나 타조가 살해된 것을? 나는 아니다 파리가 말했다 살해자의 짓이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살해하는 것을 - 오사다 히로시 ‘누가 타조를 살해했나’ 가운데 - 타조를 살해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시는 이어진다. 참새, 파리, 물고기, 투구풍뎅이, 부엉이, 촉새, 종달새, 공작, 비둘기, 소리개, 굴뚝새, 개똥지빠귀, 소에 이르도록 타조를 살해한 범인을 본 자를 찾는 구절이 시어로 얽혀있다. 이 시는 오사다 히로시의 ‘첫 번째 질문’이란 시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시다. 최근에 강을 바라본 것은 언제인가? 모래 위에 앉아 본 것은, 풀밭에 앉아 본 것은? ‘아름답다’고 당신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꽃 일곱 가지를 말할 수 있는가? 당신에게 있어서 우리란 누구인가? - 오사다 히로시 ‘첫 번째 질문’ 가운데 - 후쿠시마 출신인 오사다 히로시(長田弘, 1939-2015)는 시인이자,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마이니치 출판문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