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식민지 지배하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왔던 재일동포들은 해방 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차별이나 격차에 시달리면서도 모국과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재일동포들이 요구하는 영주자의 지방참정권과 조선학교 무상화 등의 현안이 실현되는 것이 공생사회의 구축에 필수적이다.” 이는 어제(10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19층)에서 열린 <3.1만세운동 정신 확산 학술포럼 – 3.1만세운동 정신과 동아시아 평화->에서 오다가와 고(小田川 興) (전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장) 씨가 한 말이다. 오다가와 고 씨는 어제 학술포럼에서 제2세션 주제인 ’3.1만세운동의 법적 의의‘(발표 김창록 경북대 교수) 토론자로 나서서 ‘3.1만세정신과 공명이야말로 동아시아 비핵화 평화의 기초 –한일시민연대의 횃불을 평화헌법과 함께-를 발표했다. 이날 오다가와 고 씨는 1) ’3.1만세운동을 탄압한 일본의 강권통치‘ 2) ’제국회귀와 전후 보상문제 잘라내기‘ 3) ’핵 없는 세상을 미래세대에게‘라는 주제로 토론을 펼쳤다. 특히 “3.1만세운동 100돌을 맞는 우리들은 제국의 부활을 막기 위해, 다음 100년 후에 지금을 생각하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 3.1운동 정신 확산 학술포럼을 통해 석학들이 지혜를 모으고 공동의 인식을 가져 먼저 동아시아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는 부당한 고통을 가했던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갑질에 대한 진실을 용기있게 밝히고 반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만일 일본이 그런 자세를 보여준다면 우리 국민 역시 이를 기쁘게 수용하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할 것이다.” 이는 한완상 위원장(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개회사 가운데 일부분이다. 오늘(10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19층)에서는 아침 9시 30분부터 저녁 6시까지 <3.1운동 정신 확산 학술포럼- 3,1운동 정신과 동아시아 평화-> 이 열린다. 오늘 학술포럼은 모두 3개의 세션으로 이뤄지며 1세션에는 ‘평화운동으로서 3.1운동’ 2세션은 ‘3.1운동과 동아시아 연대’ 3세션은 ‘3.1운동 정신과 동아시아평화’ 라는 주제로 이어지며 이어 종합토론이 마련되어 있다. 오늘 학술포럼은 장석홍 국민대 교수,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 위안부 연구센터장,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고 싶어. 내가 잘 난 사람도 아니고 뭐 큰일 했다고... 남이 알아주면 그것이 좋은 일이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준 나라에 감사한 거지. 다른 나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복지보다는 덜하다는 게 아쉽지만.” 이는 오희옥 애국지사의 이야기가 담긴 《마지막 증언》 집에 나오는 오희옥 지사의 말이다. 《마지막 증언》(2019.7. 북앤스토리) 은 여성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의 증언을 토대로 박숙현 씨가 쓴 책이다. 오희옥 지사(94)는 생존 애국지사로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광복군 시절을 증언하는 등 활약하다가 지난해 3월 쓰러져 1년 9개월 째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입원 치료중이다. 어제(7일) 네 달 만에 오희옥 지사의 병실을 찾았다. 자주 찾아뵙던 병실을 네 달 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것은 기자의 친정어머니가 노환으로 지난 9월 말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주말이면 병실을 지키는 아드님과 오희옥 지사를 휠체어에 태워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 복도로 나왔다. 지난여름 찾아뵌 이래 가을도 훌쩍 지나버리고 어느새 겨울로 들어선 병원 밖은 잎새를 모두 떨군 황량한 은행나무 가지만 쓸쓸히 서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윤봉길(1908.6.21~ 1932.12.19) 의사를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고 밝혔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써서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드높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1930년 3월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곧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찾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하였다. 의거 3일 전 1932년 4월 26일에,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 치치부시(埼玉県 秩父市)에서는 12월 들어 마츠리를 여는데 그 이름은 ‘치치부요마츠리(秩父夜祭)’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치치부밤축제’라고나 할까? 역시 마츠리는 밤이 낮보다 화려하다. 이 지역에서 마츠리때 쓰는 가마, 창, 수레 등은 2016년 12월 1일,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바 있다. 치치부시의 12월의 명물인 ‘치치부요마츠리(秩父夜祭)’는 치치부신사(秩父神社)가 주관하는 축제로 교토의 기온마츠리(京都祇園祭), 히다의 타카야마마츠리(飛騨高山祭)와 함께 일본의 3대 마츠리 가운데 하나다. ‘치치부요마츠리(秩父夜祭)’는 에도시대 관문연간(寛文年間, 1661~1672)에도 있었던 것으로 3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츠리다. 에도시대에는 마츠리와 함께 치치부에서 유명한 비단 시장이 서 치치부의 경제를 크게 윤택하게 했다. 당시에 비단 시장이 섰기에 이 마츠리를 ‘누에 축제’라고도 한다. 지금은 비단 시장은 서지 않지만 치치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축제는 1년을 총결산하는 자리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축제가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회원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점차 지역민들과 밀착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눈을 뜨니 어젯밤 품고 잠들었던 카이로(懷爐, 품에 넣어 가슴ㆍ배 등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가 배 위에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유리창 넘어 하늘은 잿빛이고 창 넘어 내린 눈은 그대로였다. 목욕탕은 얼음이 꽁꽁 언 채 반질거렸다. 수도는 얼어붙어서 꼭지가 움직여지질 않는다. 방안이 너무 추워 발끝이 아플 지경이다. 글 좀 쓰려고 책상에 앉아 있으니 두 살배기 아들 녀석은 추위에 계속 칭얼대고 있다.” 이는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화로(火鉢, 히바치) 라는 작품 일부다. 원고지 6장짜리의 짧은 소설인 ‘화로’는 주인공이 나츠메 소세키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유신 1년 전인 1867년에 태어나 다이쇼(大正,1912~1926)기를 살다간 나츠메 소세키 때만 해도 방에 앉아서 발끝이 얼어버려 통증을 느낄 정도로 추웠다. 그런 서재에서 그는 글을 썼다. ‘화로’는 나츠메 소세키 당시 일본 가정의 겨울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집안의 지독한 추위가 ‘화로’를 탄생시킨 셈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도련님》 등으로 널리 알려진 나츠메 소세키는 메이지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일본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외국인 가운데 한국을 사랑하거나 한국인 또는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 셋을 몽땅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한국ㆍ한국인ㆍ한글을 사랑한 서예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1957-2018) 씨가 바로 그다. 1957년생이면 지난해(2018년) 만 60살이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서예가 다나카 씨는 ‘비가 그치듯 조용히’ 이승을 하직했다. “사회인이 되고 나서 16년의 세월이 흘러 올해로 서른여덟 살이 되었다. 이십 대에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이 두 사람(미야자와 겐지와 시몬 베유)의 뒤를 쫓아 살았다.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지금의 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동서(東西)에 출현한 두 사람의 극한상이 서로 포개어지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인생의 시간 앞에 멈칫하게 된다.(가운데 줄임) 어찌할 바 몰라 혼돈스러웠던 내가 방황하면서 괴로워할 때, 나 자신을 내부로부터 지탱해 준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함께하는 고통(共苦)의 지평(地平)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상적인 죽음의 방식은 야기주키치(八木重吉)가 속삭였던 다음의 한 행으로 요약된다. ‘비가 그치듯이 조용히 죽어 가자. ” 이는 1985년에 쓴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장남의 시치고상(七五三)은 집 근처 신사에서 치렀으나 동생은 조금 색다른 곳에서 치루고 싶었습니다. 장남 때는 정보가 부족하여 동네 신사에 갔으나 동생 때는 유치원 어머니들로부터 여러 정보를 들어 조금 규모가 큰 신사로 정했습니다. 유명한 그 신사는 무엇이든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했으며 기도 시간에도 단체 기도만 있을 뿐 개인 기도는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네 신사에서는 시치고상(七五三)의 주인공에게 여러 가지 문구들도 선물해 주던데 큰 신사에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막내의 시치고상이 돌아올 때는 유명한 신사보다는 장남이 치렀던 동네 신사에 갈 생각입니다.” 이는 지난 11월 15일, 시치고상(七五三) 행사를 치른 어머니의 이야기다. 일곱 살, 다섯 살,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있는 집안에서는 해마다 11월에 들어서면 어린이를 위한 ‘시치고상(七五三)’ 잔치를 위해 바쁘다. 이날 어린아이에게 입힐 기모노를 파는 가게, 머리 손질을 해주는 미용실,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 등도 덩달아 바빠지는 때다. 예전에는 11월 15일이 거의 정해진 날이었으나 핵가족에,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즈음은 ‘10월부터 11월 사이에 형편이 좋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슬프다. 시대의 선각자요, 여성의 등불인 그는 삼일운동 때 피 흘려 청춘을 불살랐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품은 이상 이루지 못한 채 애달픈 생애 딛고 여기 길이 자노니 지나는 손이여. 비 앞에 발 멈춰 전사의 고혼(孤魂)에 명복을 빌지어다. 여기 뜻있는 이 모여 정성들여 하나의 비를 세우노니 구천에 사무친 외로운 영이여 고이 굽어 살피소서.” 이는 제주시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에 세워져 있는 강평국(姜平國, 1900 – 1933) 지사의 추도비에 새겨져있는 글이다. 지난 11월 8일(금) 낮 1시, 강평국 지사의 추도비를 찾아간 제주의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추도비가 있는 곳은 공원묘지 입구에서 정면으로 나있는 조붓한 길을 걸어가면 나오는데 중간에 성모상이 서 있고 그 뒤를 조금 더 걸어가면 ‘황사평 순교자 묘역’이라는 커다란 봉분이 나온다. 바로 그 봉분 왼쪽 편에 강평국 지사의 추도비가 작고 아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추도비에는 ‘아가다 강평국 선생 추도비’라는 글귀가 빗돌에 새겨져 있다. 아가다는 강평국 선생의 세례명이다. 강평국 지사는 1900년도 제주읍 일도리에서 아버지 강도훈과 어머니 홍소사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오늘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김희식(金熙植)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한 분(지익표, 95세)이며, 여성이 28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45명, 건국포장 1,317명, 대통령표창 3,463명 등 총 15,825명(여성 472명)에 이른다. 여성가운데 이번에 서훈을 받는 최영보(崔永保)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11월 평남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송계월(宋桂月) 선생은 1912년 함남 북청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