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가츠 에츠코(永津悦子, 70살) 씨는 자신이 쓴 《식민지하의 생활의 기억, 농가에 태어나 자란 최명란 씨의 반생 (植民地下の暮らしの記憶 ‘農家に生まれ育った崔命蘭さんの半生’)》(三一書房. 2019.8)이란 책을 얼마전 기자에게 보내왔다. 이 책은 나가츠 에츠코 씨가 재일동포인 최명란(92살) 씨와의 대담을 통해 일제침략기 조선여성의 농촌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한 책이다. 나가츠 씨가 이 책의 막바지 교정을 볼 무렵인 지난 5월 20일, 기자는 일본 가마쿠라(鎌倉)에서 나가츠 씨를 만났다. 나가츠 씨는 일본 고려박물관(1990년 9월,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뜻에서 양심있는 시민들이 만든 단체) 조선여성사연구회 회원으로 2014년부터 재일동포인 최명란 씨를 만나 5년 동안 대담에 성공, 이번에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 가마쿠라의 한 찻집에서 나가츠 씨는 교정본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쓴 계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14년 고려박물관 주최로 ‘식민지 시절 조선의 농촌 여성’ 전시회가 있었는데 그때 만난 최명란 씨를 수년 동안 대담하는 과정에서 얻은 자료가 있어 책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느 때는 아침 10시에 만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빨강, 노랑, 연두빛, 초롱이 내걸린 구 남원역 플랫폼에서 어제(25일) 낮 1시부터 저녁 8시 30분까지 뜻깊은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제16회 만인의사 추모 및 만인문화제(아래 '추모문화제')’였다. 구 남원역 플랫폼에서 추모문화제를 연 까닭은 이곳이 422년 전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혈전이 오고간 남원성 전투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1597년 (음력)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왜군들에 맞서 성민(城民), 의병, 남원부사 임현, 전라병사 이복남 등 1만여 명이 왜군대장 우키다 히데이 등 왜군 56,740여명과 혈전분투하다 1만여 명이 순절하신 곳입니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남원시민들은 해마다 제향(祭享)을 지내며(올해 제향일은 26일) 하루 전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하진상(남원사회봉사단체협의회 부회장) 씨의 말이다. 기자는 이날 추모제에 앞서 남원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하진상 씨를 만나 정유재란 당시 구 남원역의 쓰라린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가 남원성 북문터입니다. 지금 발굴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422년 전 수많은 병사와 의병,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야스쿠니 경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유슈칸(遊就館)은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침략시기에 사용했던 전리품, 전몰자의 유품, 대포 등의 무기를 전시하고 있는 전쟁박물관이다. 1945년 종전(終戰)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1986년 재개관한 뒤 2002년에 새로 단장한 유슈칸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황국사관을 심어주는 중요한 시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슈칸은 1880년 이전에는 ‘게액및무기진열장(揭額幷武器陳列欌)’으로 불렸다. ‘게액(揭額)’이란 액자를 건다는 뜻으로 전사자들과 관련된 사진 등의 액자를 봉납 받아 전시함으로써 신령을 위로하고 살아생전의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뜻이며 이와 더불어 무기진열을 위해 만든 것이 유슈칸이다. 명치정부는 막부정권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무기를 비롯하여 각 번(藩)이 소장했던 무기를 확보하여 유슈칸에 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청나라 군함 조강호 부속품과 청나라 국기, 청룡도, 삼우창, 러시아군함 바이야크의 군함기 등 전리품을 전시하여 일본의 위력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1910년 4월 1일, 유슈칸은 칙령으로 무기역사박물관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공포된 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3·1운동 만세시위 중 일본 헌병이 휘두른 군도에 왼팔이 잘리는 극한상황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윤형숙(1900~1950) 열사의 투쟁과 삶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여수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를 집중 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가 주제인 이번 행사는 9월 27일 오후 2시 여수시청 여수문화홀에서 여수시 주최,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주관으로 개최된다. 학술세미나에 이어 오후 5시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윤형숙 열사 묘소에서 추모제가 이어진다. 윤 열사 순국 69주기에열리는 이날 행사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후원한다. 학술세미나는 2개 주제발표로 구성돼 있다. 제1 주제발표에서는 한규무 광주대 교수가 '항일애국열사 윤형숙 관련자료 검토 및 생애와 활동 재조명'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하고 김인덕 청암대 교수, 김병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이 토론에 나선다. 이어 제2 주제발표에서는 김호욱 광신대 교수가 '일제강점기 호남 기독교 선교와 윤형숙의 항일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윤치홍 여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 건립 이후 수많은 전사자를 합사(合祀)하는 예대제(例大祭, 레이다이사이: 신사의 신에게 고하는 의식)가 이뤄졌는데 이는 군대가 합사자를 결정하고 일왕의 재가를 받아서 혼을 불러내어 야스쿠니의 제신(諸神)으로 합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곧 군의 조사와 합사기준에 따라 판정→영새부(寧塞簿, 영혼이름을 적은 명부)작성→일왕보고→재가→초혼→합사의 수순을 밟는 것이다. 전사자는 유골이나 위패가 아닌 영새부(寧塞簿)에 기록되며 이를 신관들이 오하구루마(영새부를 태우는 영혼 가마)에 태워 야스쿠니 본전(本殿)에 자리하는 초혼제를 진행한다. 이후 합사제(合祀祭)를 거행하고 제주(祭主)인 일왕이 그 길을 걸으며 참배한다. 영새부는 사전에 안치되어 신체에 준하는 취급을 받으며 이로써 야스쿠니의 제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때 만주, 대만, 조선, 오키나와와 일본 내에 살고 있는 유족들을 국비로 야스쿠니에 초대하여 전사자가 신(神)이 되는 과정 곧 예대제가 진행되는 참도(參道) 양쪽 끝에서 참배하게 한다. 이후 야스쿠니 예대제를 마친 유족들은 신주쿠교엔, 황궁, 우에노동물원 등 도쿄의 명소를 구경하고 귀향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해외 전몰자 240만 명 가운데 현재 116만 명의 주검이 미송환 된 상태로 전사자유골의 약 48%가 여전히 해외에 방치된 상태이다. 이 가운데 바다에서 전사한 경우와 상대국 국민감정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주검을 제외한 60만 명은 지금도 수습이 가능하지만 일본 정부는 주검수습에 소극적이다. 이렇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주검수습을 미루는 것은 일본 특유의 ‘초혼(招魂)’ 사상과 관련이 깊다. 특히 야스쿠니의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것은 최고의 예우이기에 주검 수습에 그다지 힘을 들이고 있지 않는 측면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2010년 일본 NHK에서 방송된 ‘의혹의 주검을 좇아, 전몰자주검수집의 어둠’이라는 기획물이다. 일본정부는 1952년부터 1975년까지 3차에 걸친 전사자 주검수습 작업을 해왔으나 필리핀의 경우 거액을 들여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수습된 주검이 일본인 전사자 주검이 아니라 필리핀인 주검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주검수습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각 전쟁터에서 전사한 전사자 주검 수습은 거의 방치된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장례식은 반드시 주검이나 죽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 만세 시위 도중 일경에 의해 왼팔이 잘려 낭자하게 흐르는 피를 부여잡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결코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던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1900.0.3~1950.9.28, 다른 이름 윤혈녀) 열사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전남 여수시 여수문화홀에서 오는 9월 27일(금) 낮 2시부터 여수시와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회장 오룡) 주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라는 주제로 3.1운동100돌 기념 학술세미나와 추모제를 겸하며 윤형숙 열사 관련 학술세미나는 이번 행사가 처음이다. 이날 학술 세미나는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의 ‘항일애국열사 윤형숙 관련자료 검토 및 생애와 활동 재조명’과 김호욱 광신대학교 교수의 ‘일제강점기 호남 기독교 선교와 윤형숙의 항일운동’ 발제에 이어 토론은 김인덕 청암대학교 교수, 김병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이 맡아 그동안 학술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던 윤형숙 열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이어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있는 윤형숙 열사 무덤을 찾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영감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릴뿐이다. (I don’t believe in inspiration. I just keep working)” 이 말은 프랑스의 마지막 구상회화 작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가 한 말이다. 어제(7일), 서울 한전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박연도(86세) 화백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나는 문득 베르나르 뷔페의 이 말이 떠올랐다. 영감(靈感)으로 떡칠한 그림들이 판치는 세상을 일찌감치 베르나르 뷔페는 거부하고 ‘자신의 색깔’로 사물과 세상을 표현했다. 박연도 화백의 그림을 한 점 한 점 감상해 나가는 동안 나는 '구상화 작품'이 무엇인지 조금씩이해할 수 있었다. 꽃단장한 ‘시집가는 날’, 스무 살 처녀의 ‘성년을 맞이한 여자’, ‘꿈많은 어린이’ 등의 인물화 앞에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내 유년 시절 바로 이웃집에서 보았던 너무도 정겨운 모습들이 그림 속에서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시골집을 그린 ‘평화스런 마을’, 갈매기 나는 ‘동해의 여름’, 물오리가 노니는 ‘방화 수류정’ 작품에서는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받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벚꽃의 명소로 도쿄 한 복판에 자리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이하 ‘야스쿠니’)는 일본 군국주의 상징의 현충시설이다. 이곳에서는 A급 전범(戰犯)뿐 아니라 우익의 원조이자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요시다쇼인과 이토히로부미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1910년 9월 15일 한국인에게 치욕스런 한국병합 봉고제(奉告祭)를 올린 곳이다. 야스쿠니에는 일제침략기 징용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가 숨진 한국인 21,000여명과 대만인 등이 합사(合祀)되어 있어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영령 추도시설이기도 하다. 야스쿠니는 총면적 93,356㎡(28,289평)로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사(神社)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1869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시작하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79년이다. 이곳에서는 에도막부 말기(1853)부터 명치유신(1868)을 거쳐,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저지른 국내외 전쟁에서 숨진 군인, 군속 등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한다. 야스쿠니에는 태평양전쟁 사망자 213만 3,915명, 중일전쟁 19만 1,250명, 러일전쟁 8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지청천 장군을 ‘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폐교되어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와 병사 양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ㆍ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