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고승인 서울 화계사 숭산스님으로부터 부처님 법을 전수받은 헝가리 청안스님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스승의 나라인 한국전통건축양식으로 절을 짓겠다는 말을 기자는2년 전에 들었다. 그때 전통한국식 절을 짓고 싶은데 설계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진척이 잘 안된다며 건축설계를도와줄 사람을 찾는다는소식을 불교건축과 장엄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불교예술원의 한성용 대표로 부터 들었다. 그 때까지 숭산스님의 전법제로 청안스님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스님의 큰 뜻을 전해듣고 기자는 한국전통건축을 설계하는 사람으로그가 원하는 한옥을 설계해주기로 마음 먹었다.마침그 무렵,한국에 잠시 들어와있던 청안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청안스님은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했던 건물의 구상도를 가방에서꺼내놓으며 미적으로 아름다운 황금비율로 절을 짓겠다며가로 세로가 그려진 평면을보여주었고, 그 평면의 형태에 가장 적합한 한옥구조로 설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기자는 오랫동안 전통한옥과 문화재건축물을 신축, 증축, 개축, 보수 등을 해왔기 때문에, 청안스님이 보여준 평면을 가지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의 통일왕조였던 고려는 918년, 혼란의 후삼국시대를 통일하여 1392년 조선왕조가 성립될 때 까지 474년을 이어온 왕조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얼마 뒤 926년 만주지역을 차지하던발해가 멸망하여 그 가운데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귀속해 왔다. 그 뒤고려는 한민족의 통일왕조가 되어 그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 발해가 멸망한 뒤 그 영토를 되찾지 못하고 한민족의 영토수복의 기회를 잃어버려영토가 축소된 아쉬움이 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엇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나라였으나, 고구려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474년을 이어온 고려는 불교를 온 백성들이 받아들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루었고, 그 유물은 당시 세계제국이었던 중국의 송나라 원나라보다도 오히려 빛이 났다. 당시에 선조들이 이룩했던 문화유산을 한데 모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하고 있다. 전국의 사찰과 박물관에 보관된 것들과 멀리 일본과 미국 등 외국에서 온 유물들까지 있어, 고려시대 조상들이 이룩했던 문화유산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로, 이후 세워진 조선시대의 문화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남 고성 운흥사는 남해바다와 인접한 고찰이다. 운흥사는 쌍계사의 말사로 그 창건은 676년 신라 통일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창건당시의 유물은 전하지 않고, 세월이 흘러 조선조에 이르렀고,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장 사명대사가 승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적과 크게 싸웠다. 이 때 이순신장군은 육해군 합동작전을 위하여 세번이나 방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군이 남쪽지방을 장악한 뒤 운흥사의 모든 전각은 방화로모두 불타고말았다. 현재의 건물은 모두가 임진왜란 이후 하나 하나 중건된 건물로, 대웅전은 경남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삼존불과 수월관음도 그리고 감로탱화가 걸려있어, 많은 사람들이 기도드리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또 대웅전 내부에는 영산회상 괘불탱화가 있는데, 이는 대웅전을 지을 당시인1730년 조성된 것으로 그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커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탱화는 일제강점기일본인들이 욕심내 3번이나 가지고 가려고 했었는데 그때마다 심한 풍랑이 일어나 가지고 가지 못했다고 한다. 운흥사가 깃든 곳은 와룡산이다. 와룡산이란 용이 누워있는 산이라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올해도 저물어가는 11월 중순이 되었다. 가을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11월, 멀리 남해 다도해가 가까운 고성의 고찰을 찾았다. 경남 고성은 태고적 공룡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많아, 공룡의 터전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공룡이 살던 때는 너무도 먼 옛날이다. 세월은 쉬임없이 흘러서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진화를 거듭하여인간이 생겨나고, 이 땅에 인류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그 중에도 옥천사에불교의 싹이 돋아난 것은 1,400여년 전 의상대사때 부터이다. 의상대사가 살았던 시대는 한국땅이 5국의 각축시대가 마무리되어 가던 때였다. 그 때의 5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알려진 3국과 북쪽에 부여, 그리고 남쪽에는 가야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3국시대라고 하지만, 부여와 가야를 뺀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모독이고역사의 무지이다. 그런 5국각축의 시대를 마무리한 것은 신라이고, 그것은행 불행을 떠나서, 역사의 사실이다. 크게 5국시대가 마무리되어 한민족은 단군을 민족의 조상으로 모시고 이후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전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한나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일이 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는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국보 제77호의 오층모전석탑이 있다. 탑이 있다는 것은 본래 절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이만한 크기의 탑이 있다는 것은 그에 걸맞게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있었는지, 이곳에 있었던 절은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는데, 탑이 있어서 그것이 마을 이름이 된 탑리에 5층으로 높이 솟아있다. 절이 폐사되자 그곳에는 마을이 들어섰고, 근세에는 탑리여중교가 들어섰으며, 또 그 바로 옆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탑리에 들어선 교회라 하여 탑제일교회.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서있던 석탑의 형태를 살펴보면, 탑의 기단은 화강석 판석으로 잘 다듬어 1단으로 한 뒤, 그 위 5개층은 탑신석은돌기둥과 판돌로 각각 층을 이루었으며, 1층의 지붕돌 부터는마치 벽돌처럼 넙적한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그렇게 쌓은 돌이 5개층을 이루었고, 그 위에는 상륜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상륜부는 사라지고, 상륜부를 받치기 위한 기초인 노반만이 납작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 탑이 주변지역보다 꽤 높이 솟아있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법천사는 원주에 있었던 오래된 절이었다.법천사는 임진왜란 당시 방화로 폐사되면서 수백년 동안 이어온 절에 대한 기록도 모두 사라져 그 정확한창건연대도 알 수가 없지만, 옛 역사기록에 따르면 신라말에 이미 있었던 절임에는 틀림없다. 법천사는 고려초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67)가 생존시 대대적인 중창을 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그 때 한국 불교는 지상에 화엄불국토를 꿈꾸었다.따라서고려시대는화엄종이 대세를 이루어 법천사는 유식학을 중심으로 한화엄사상의 한 맥을 이루는 법상종의 절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있었지만, 이곳에는 법천사에서 출가한 뒤고려의 국가적스승으로 살아서 국사로 올렀던지광국사가 가르침을크게 폈던 곳으로 이곳에는 지광국사의 사리를 모신승탑(지광국사현묘탑)과 그의 행적을 기록한 지광국사현묘탑비가 남아있었다. 지광국사는 그 깨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지광국사현묘탑과 탑비는 신라말 이후 선종의 큰스님들에게 임금들이 내린많은 승탑 가운데 비교할 만한 비슷한 양식이 없다. 이련 양식은이전에도전혀 볼 수 없었고, 이 후로도 볼수 없는 매우 화려하면서도이례적인 모습을 하고 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에는 많은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요즈음에도 미얀마나 스리랑카에서 전수받은 사리를 모신 절들이 여럿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절들을 손꼽아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르는데, 이 5대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중국의 청량산에서 문수보살로 부터 받아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뜻 한다. 5대 적멸보궁이란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그리고 이곳 사자산 법흥사이다. 법흥사는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도 유명하지만, 신라말 전국의 명산에 선종을 열었던구산선문의 사자산문의 중심도량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사자산문의 중심이었던 법흥사는 신라말 진성여왕 5(891) 병화로 소실되었고, 고려 초에 중건하였으나, 또 다시 불이나 사자산문의 명맥은 있지만, 겨우 명맥만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 법흥사는 일제강점기인 1902년 비구니 대원각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건되었다. 조선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민족은 고단한 일제강점기를 시작할 때였지만, 대원각스님은 부처님의 법을 지키고 전하기 위하여 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북한산성 행궁은 조선 숙종 때 전란을 대비하여 지은 임금의 임시거처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라 하여 행궁으로 불린다. 북한산성 행궁은 한양의 북쪽에 높이 솟은 북한산에 있으며, 한양에서 보면 북한산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전시에 임시 피난처로 최소한의 시설로 숙종 37년(1711) 김우항이 북한산성내 행궁을 지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고, 그 상소가 받아들여져 착공한지1년 만에 완공하였다. 그런데 북한산성 행궁은 북한산의 북쪽에 있는 북한산성내 험한 산길을 올라야 이를 수 있는 천연 요새로 전체 규묘는 124칸의 작은 궁궐건축이었다. 행궁의 구성은 가장 안쪽에는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 있고, 임금이 정사를 보던 외전이 지어져 있으며, 외전의 밖으로는 궁궐의 보조공간으로외대문지역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전은 정면 5칸, 전체28칸의 정전으로 가운데는 3칸은 대청마루가 있는 넓은 공간이 있고, 좌우에는 구들을 놓은 방이 있다. 외전은 내전의 앞에 있으며, 임금이 정사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정전은 28칸과, 외행각방, 누, 청, 곳간, 대문 등 부속건물이 있다. 외전의 모습도 내전과 같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금강산 자락에는 불교가 신라에 공식적으로 승인되기 이전 법흥왕 15년(528년)고구려의 스님이었던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세웠다건봉사가 있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사람이나, 그는 당시 국제혼혈아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위나라의 사신이었던 아굴마이며, 그의 어머니는 고구려여인 도령이다. 아굴마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을 때 도령을 만나게 되었고, 아도는 태어났다. 아도라는 이름은 아버지 아굴마와 어머니 도령에서 한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도는 태어나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많은 놀림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런데 성장한 뒤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출생비밀을 듣고, 아버지를 찾아 위나라로 찾아가 위나라 대신이었던 아버지를 만나불교를 알게 되고 부처님의 진리에 감동하여 위나라에서출가하여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 불교를 모르는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그 아도화상이 세운절이 건봉사라는 것이다. 역사상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의 절로 가장 유명한 절은 경북 구미에 있는 도리사이다. 아도는 도리사 근처 모례의 집에 숨어살면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고성에 있는 화암사(禾巖寺)는 신라 혜공왕때인 769년 창건한 절이다.신라후기 고승이었던 진표율사는 김제 금산사를 중창한 스님으로 변산 부사의 방에 들어 깊은 수련을 하였고, 이때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법을 전해받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진표는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고, 용왕의 권속들이 도와 당시 큰 연못이었던 곳을 메워금산사를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머물며 해마다 개단법회(점찰법회)를 통하여 중생교화를 하였으며, 이후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 법주사를 중창하고, 다시 강원도로 가 금깅신 발연사와화암사를 개창하였다.진표율사는금강산으로 와서도금산사에서 시행했던 점찰법회를 열어, 흉년에 굶주리던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진표율사는 금강산 발연사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좌탈입망하였으며, 제자들은 스승의 선정에 든 모습을 그대로 두고 매일같이 공양을 올렸다. 이후 살이 다 썩어지고난 뒤그의 해골은 바위에서무너져 떨어지게 된 뒤에서야제자들이 뼈를 모아흙을 덮어 진표유율사의무덤이 되었다. 이렇게 신라말진표율사가 창건한 화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