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애삼존불 전경 ▲ 미소가 아름다운 서산마애삼존불 석가모니불 ▲제화갈라보살(석가모니에게 수기를 했던 연등불의 전신) ▲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석가모니가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한 미륵보살 [우리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보원사의 한 감실과도 같았던 서산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은 큰 사찰이었던 보원사의 폐사와 함께 잊혀진 채 수백년을 그렇게 남아있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번영은 불교에게는 이렇게 치명적인 상처로 남게 되었고, 폐사된 보원사터는 목조건축물은 다 없어지고, 그 위에 흙이 덮여 농지가 되었으나, 돌로 만들어진 법인국사 스님의 탑과 탑비 그리고 5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절반은흙속에 묻힌채 지금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이제 유교의 시대가 가고 불교 유적들이 살아남아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게 됨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찬란한 불교 유적이 사라진 것은 너무도 가슴이 아픈일이다. 역사와 민중들의 마음 속에서 멀어져 갔던 저 마애삼존불! 왼쪽에는 제화갈라보살이 가운데는 석가모니불이 그리고 오른쪽에는 미륵보살이 반가부좌를 하고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삼존불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 간월도로 가는 길. 물이 빠져 전혀 섬같은 느낌이 안드는 간월도 간월암. 드러난 간월도 주변 바닷가를 산책하는 연인 ▲ 고인 바닷물에 비치는 간월암. 암자 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간월암의 용왕단,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을 보살펴준다. ▲ 탐방로가 잠기기 직전 간월도를 빠져 나오는 탐방객들 ▲ 섬이 된 간월도를 신발을 벗어들고 부지런히 나오는 탐방객 [우리문화신문= 최 우 성 기자] 충남 태안반도에 가면 간월암이 있다. 간월암이란 간월도라는 작은 섬에 있는 암자인데, 태안반도와 육지사이에 바닷가에 위치하여 늘 파도소리 출렁이는 곳이다. 그런데 태안반도에서 50m 정도 떨어져 있는 간월도는 전에는 작은 줄배로 오갔으나, 그 사이를 자갈로 채워서 평시에도 배가 필요없게 되었다. 대신 자갈돌로 이루어진 오솔길이 썰물이면 드러났다가 밀물이면 잠기는 정도여서 하루에 2번씩 육지와 섬을 갈라놓는다. 간월도의 유래는조선태조 이성계의 스승이면서 친구였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다가 문득달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는 전설같은 이야가기 전한다. 무학대사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간월암에는 바닷가 작은 전각에 용왕을 모시고, 바닷가에 삶을 살아가
소원을 빌어보는 참배객들 지극한 정성으로 추위도 잊은채 야간에도 사리탑은 빛나고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설악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봉정암에는 2560년 전에 열반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탑이 있다.그런데 봉정암은 신라 자장스님이 깊고 깊은 이곳을 찾아서 처음으로 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처음 봉정암이 세워질때에는 사리 탑이 없었는데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자장율사가 개창한 이곳에 저 부처님 사리탑이 세워졌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의 탑은 신라양식이 아니고 고려시대 이후 양식이다. 자장율사는 당에가서 불교를 공부한 뒤 부처님의 진신사리, 가사와 장삼을 받아와 양산의 통도사에 적멸보궁을 세우고 그 중심에 당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모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부처님의 진신을 모신 통도사는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져 스님으로 출가하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계율을 받는 곳으로 그 명성을 이어왔다. 그런데, 그 성스러운 곳이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일본인들에 의하여 훼손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파헤쳐 부처님 진신사리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조선이 완전히 쑥대받으로 변하고, 이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대청봉에서 15km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수많은 여울을 만나게 된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여울에 잠시 머물면 그곳이 못이된다. 때로는 바위가 깎여서 못이되고, 때로는 바위가 막혀서 못이되기도 한다. 그 많은 못들 주변은 겨울철이라 얼음으로 변하였지만, 흐르는 물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는지라 맑은 백담계곡물이 투명한 푸른 빛을 띠고 흐른다. 폭포를 만나면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기도 하고, 떨어져 모이면 못이되었다가 또다시 시내가 된다. 그러다 어떤 곳에서는 절벽을 만나 자신도 모르게 높은 폭포가 되기도 하는데, 그 곳이 북쪽면이면 얼어붙어 얼음벽을 이루기도 한다. 여울진 못이 백개는 된다하여 백담계곡이니 그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난 못들을 보노라니 봉정암으로 오르는 멀고 험한길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 설악산과 백담계곡과 몽돌탑 ▲ 얼어붙은 계곡과 몽돌탑 ▲ 몽돌 탑들이 즐비한 가운데 계곡물이 흐른다. ▲ 공들인 몽돌탑 ▲ 몽돌탑 앞에서 추억을 담고 ▲ 몽돌탑 뒤로 백담사 전각이 보인다. ▲ 계곡 넘어 백담사 전경이보인다. ▲ 백담사 계곡 전경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깊고 깊은 내설악 멀리 대청봉에서 시작한 작은 개울들이 모여서 계곡이되어 흐르는 백담계곡에는 이름처럼 수많은 여울과 소가 많이도 있다. 백개의 못(潭)을 이루면서그렇게 흘러내린 계곡물은 설악산 암벽에서흘러내린 돌맹이를 갈고 갈아 크고 작은 몽돌로 만들어 백담계곡에 가득히 펼쳐놓았다. 이렇게 흘러내린 백담계곡의 몽돌들이백담사 앞에 이르면 폭이 넓은 시내를 이루는데, 그 시냇가에 펼쳐진 즐비한 몽돌들을 주어모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몽돌탑을 정성들여 쌓았다. 그렇게 쌓아서 이곳 백담계곡을 아름다운 몽돌탑 공원이 된 것이다. 다녀간 사람들의 사연들이야 다들 깊고 나름 뜻이 있겠지만, 흩어져 딩구는 몽돌들이 탑이 되고보니 백담계곡은 아름다운 몽돌탑들로 장관을 이룬다. 다듬지도 않고 그냥 주어모아서 쌓은 것들이지만다녀간 사람들의 정성으로 하나의 예술세계를 이루었
▲ 서울 은평구에 있는 역촌시장 ▲ 시장건물에 교회와 함께 있는 선원 ▲ 천도재, 크리스마스 축하에 모인 열린선원 신도들 ▲ 바라춤을 추는 스님 ▲ 바라춤을 추는 스님 ▲ 부처님께 드리는 인사 ▲ 크리스마스 케익을 앞에 둔 스님들과 목사님 ▲신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님 ▲ 윤회금지 액자가 눈을 사로잡는다 ▲조상님께 술을 올리는 의식 ▲ 조상신위를 반야용선에 태워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 ▲ 천도재를 마치고 조상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모습 ▲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상의 영혼을 모셨던 종이를 태워서 다시 보내드린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은평구 역촌동에는 시장 건물 2층에 열린선원이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다. 보통 절은 고요한 산사를 생각하지만, 열린선원은 가장 북적이는 시장 가운데 그것도 시장건물의 2층에 있으니 늘 시끄럽고 북적인다. 더구나 건물 안에는 교회도 같이 있으니 절과 교회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에 열린선원을 개창하여 중생제도를 하는 스님은 한국불교 태고종 법현스님이다. 이 절에서 다가오는 12월 25일 이웃종교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미리 축하하는 행사와 함께 열린선원에 모인 신도들의 조상을 천도하는 법회가 동시에 열렸다. 크
유릉(순종: 대한제국의 2째 황제)에 도열한 석상들과 황제의 침전. 침전 너머에 유릉이 있다. 황제릉의 침전 앞에 도열한 석상들,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2필) 황제릉을 지키는 동물들과 문무인석이 서열대로 서있다. 아래로부터 말(2필), 낙타, 해태, 사자, 키키리, 기린 그리고 무인석 문인석 사람이 타고다니는 말은 맨 아래에 있다. 사막의 배로 불리우는 낙타는 동물 중 5위 서열에 서있다 뿔달린 한국인의 상서로운 해태가 동물 중 서열4위에 있다. 황제릉의 호위하는 수호동물의 3위 서열은 '사자'이다. 현존하는 가장 큰 육상동물인 코끼리. 동물 중에서는 2번째 서열 상서로운 동물 중 가장 높은 서열에는기린이 있다.기린의 머리에는 뿔이 하나있고, 피부는 비늘이 덮고있다. 황제의 침전을 호위하는 문관과 무관 갑옷과 투구를 쓴 무관 금관조복을 입은 비서실장 문관 [우리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조선왕조는 26대까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여, 중국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27대 고종이 등극하고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 속에 세계 다른 열강들이 모두 자가나라가 황제국이라고 칭하게 되자
▲ 계곡 너머에서 본 장항리사터 석탑,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일제 강점기땅속에 묻혀있던 석탑을 발굴하여 맞추어 놓았으나, 상륜부는 찾지 못하여 저렇게 남아있다. ▲ 장항리사터로 오르는 계단 ▲ 동탑과 서탑, 서탑은 공사중 ▲ 기단과 탑신 상륜부는 사라지고, 탑의 지붕돌과 탑신하나만이 남았다. ▲ 탑신석에 조각된 인왕상 가운데는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 부처님을 모셨던 법당 안에 있던 연화대좌 ▲ 연화대좌 아래에는 8각면이 있고 그 면에는 신장과 신수가 있다. ▲ 연화대좌 위 연꽃 잎이 엎드리고 위로 활짝 핀 모습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양북면 바닷가에는 대왕암이 있고,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왕암의 문무왕의 혼이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드나든다고 믿었던 감은사가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양북면에 기림사와 장항리사터가 있다. 장항리사터는 본래 이곳에 장항사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장항리가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석탑만이 남아있던 이곳이 행정구역상장항리에 속해있기 때문에 이곳의 절터 이름이장항리사터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산비탈과 계곡사이에 상당히 급한 산등성이에 자리한 장항리사터에는 그나마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감은사는 국보112호인 감은사탑이 있는 곳으로 경주 양북면 에 있었던 절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높아보이지 않지만 높이가 13.4m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다. 일반 건축물로 치면 5층 높이에 이르니 결코 작은 탑이 아니다. 감은사터 석탑은 본래 목탑을 세우던 양식에서 화재에 약한 목탑보다는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석재로 목탑을 재현한 것이기에 이리도 큰 것이다. 목탑이 전신이었던감은사탑 이전 것으로는 익산 미륵사터 석탑이 무너진채부분적으로 남아있다.황룡사 9층탑이나 익산 미륵사 9층탑은 원래목탑이었다.그 밖에도 삼국시대의 큰 절에는 5층목탑을 많이 건립한 거승로 전해진다. 감은사터 3층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탑으로, 이 감은사터 석탑을 거쳐서 경주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이 한국석탑의 완성을 이루었고, 이후로는 불국사 석가탑은 본으로 하여 많은 석탑들이 들어섰다. 겨울의 문턱에 들었으나, 감은사터 주변에는 아직도 푸른 잔디가 한창이었다. 언덕 위에 자리한 감은사터에는 금당 앞뜰에 본 석탑이 동쪽과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금당이 있던 자리는 주춧돌만 남아있고, 석탑은 보수공
▲ 시청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 이 힘든 일을 왜 해야만 하는지... ▲ 시청앞 광장을 메운 시민들. 시민들이 하는 말을 막으려고 하지말라고 외치고 있다. ▲ 국민들의 눈에 비친 정부!. 텅빈 백지와 파란딱지가 가득한 청지 ▲ 가면을 쓴 농민들. 쌀포대로 옷을 대신하고 있다. ▲ 하회탈로 가면을 대신하는 참가자들. 농사짓는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외친다. ▲ 보고대회의 한장면, 잠시 흥겹고 뜻을 담은 노래도 함께하며. ▲ 국민은 말하고 싶다. 가면인가 복면인가 아니면 변신인가?? ▲ 시청앞에서 출발한 시민들이 서울대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어린 딸을 목마태운 젊은 아빠도 함께하고. 젊은이 어르신 남자 여자 온국민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다. ▲ 시위는 당연히 폭력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전혀 흩어짐없고 누가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질서정연 하였다. ▲ 국민은 하고싶은 말 해야하고, 정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외치며. ▲ 질서정연한 행진 어쩌면 축제같은 분위기. 군데 군데 북과 징과 장고가 흥을 돋우었다. ▲ 가면을 썼으나 전혀 폭력과는 거리가 먼 행진.. 가면무도회로 가는 듯한 평화로운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