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신목이 된상만리비자나무 상만리 신목 비자나무. 마을사람들의 다정한 쉼터이기도 하다. 비자나무 몸통-1, 몸통에서도 새입이 나고 있다. 비자나무 몸통-2, 신령스러운 느낌이 나는 비자나무 몸통 비자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는 주민, 나뭇가지들이 제몸 무게를 지키기도 힘들다. 비자나무를 사진으로 담는 일행,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 테지만. [한국문화신문=최 우 성 기자] 상만리 구암사를 들러 내려오는 길에 거대한 정자나무가 있었다. 그 나이는 대략 600년으로 추정된다는 이비자나무는 한국의 남부지방에 자라는 난대성 상록침엽수로 주목계통의 나무였다. 이 비자나무는 오랜세월 상만리 주민들과 함께 살아와서 마을의 수호신 당목으로도 여겨졌다. 옛날에는 주위에 색동띠를 두르고 마을 당제때에는 신내림을 했을 법한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목이었다. 보통 비자나무는 4월에 꽃이 피어 10월이면 그 열매가 익는데, 그 열매가 약재로 긴요하게 쓰인다. 비자열매가 활용되는 병으로는 급체, 가래, 기침, 변비, 탈모, 관절염, 피부질환, 여성병 등에 특효하다는 아주 긴요한 약재라고 한다. 그 처방에 쓰이는 병이 다양하여 가정 상비약만병통치약 수준이
구암사 입구에서 구암사 입구의 미륵상 구암사 대웅전과 종각과 상만리5층석탑 아담한 구암사 대웅전과 석탑 백일홍이 가득한 구암사 경내 상만리 5층석탑의 모습, 치장이 안된 단순한 모습의 석탑이다. 돌틈에 피어난 상사화 [한국문화신문=최 우성 기자] 진도군 임회면은 진도의 동남측면에 해당한다. 진도에 들어와 이곳 저곳 점을 찍듯이 돌아보면서진도인의 삶이 축적된 곳들을 찾아다니다가 남쪽으로 향하면서상만리5층석탑이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상만리 5층탑은 본래 임회면 상만리에 '상만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상만사'는 이곳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탑의 형상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지어진 절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모양 또한 고려시대 유행하던 양식이기 때문에 그리 짐작하는 것이다. 탑의 높이는 3.8m에 이르는 작고 아담한 탑이고, 탑의 기단 아래 지대석의 한 변 길이는 2.5m에 이른다. 그런데 이탑의 명칭이 상만사지 5층탑도 아니고, 현재 절이름인 구암사 5층석탑도 아닌, 상만리5층석탑이라는게 무척 생소하였다. 처음에는 상만리5층탑이 어느산 산비탈 어디엔가 방치된탑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찾아와 보니 탑은 엄연한
돌아온 백구 기념관 백구와 박복단 할머니상 백구의 무덤 지석묘 백구의 고향마을풍경 백구의 고향사람들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진도읍내 진돗개 홍보관에서 만났던 충견 백구의 고향을 찾았다. 백구는 1988년 의신면 돈지리 박복단 할머니집에서 태어나 1993년 3월 대전으로 팔려갔다. 그러나 늘 따사롭던 할머니와 손녀딸의 사랑이 그리워 백구는 새주인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 백구가 1993년 10월 자신의 목에 묶여있던 목줄을 끊고 탈출하여 300km 가 넘는 이곳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백구는 할머니의 따뜻한 품에서 살다가 2000년 2월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의신면 돈지리 마을 주민들은 백구의 품성을 높이 기리고자 뜻을 모아 무덤과 비를 세웠다. 이상은 백구의 동상에 새겨진 비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노릇이다. 또 정든 고향이라 하더라도 그 의리를 끝까지 지키면서 살기는 더욱 힘들다. 비록 동물이지만 자신을 길러준 주인의정과 의리를 얼마나 깊이있게 느꼈으며 멀고 먼 타향땅으로 팔려가 살면서도 자신의 주인을 잊지 않고 전국을 헤맨 끝에 고향
호랑이와 함께 선 뽕할머니상 바다를 향해서 빌고 있는 뽕할머니상(새롭게 조성한 석상) 뽕할머니상, 바다를 향해서 예전에 만들어진 뽕할머니상 주변에 돌탑이 즐비하다. 음력 3월 조금이면 앞에 있는 바다가 갈라진다고 한다 정말 아름다운 푸른 바닷가 음력 3월이면 이렇게 갈라진다고 하는 신비의 바닷가.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름 진도로의 사진여행에서 만난 또 하나의 진도명소에 도착하였다.1년에 한차례 바닷길이 열린다는그곳은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 뽕할머니상이 있는 곳이다.이곳 뽕할머니상이 있는 곳에서 저멀리 보이는 섬인 의신면 모도를 잇는 바닷가 음력 3월이면 한번씩 육지처럼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찍고 도착한 곳에 이르니, 평범한 작은 항구에 방파제가 있고, 멀리 1킬로미터 남짓 군데군데 섬들이 떠있는 어촌마을일 뿐,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상상이 안되어 보였다. 그래서 방파제가 있는 포구에 작은 어선들이 줄로 묶여있는 곳 까지 나가도 보았지만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선창가를 서성이다가 결국포구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찾아가 물었다. 그랬더니 가게주인은 바다가 열리는 곳은 이곳 포구가 아니라
가야테마파크 안 가야왕국재현모습 1967년 전(기원후48년)아유타국 허왕옥 인도공주가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삼국유사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가야왕국의 정전 김해 가야테마파크의 정원모습. 남방계 아유타국 공주가 사랑을 찾아금관가야 김수로왕을찾아왔다 아유타국의 수호신인 물고기 2마리 물고기 2마리로 아치를 만들고 물고기 2마리로 조각을 새기고 신비하고 이상한 배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마중나가는 김수로왕 배에서 내린 허왕옥이 김수로왕에게 걸어가는 모습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이고 사랑의 춤을 추는 장면 왕궁으로들어오는 김수로왕과 허왕옥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 모든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인도에서 온 무용수들의 축하공연 김해시립 국악단의 가야금 연주 가수의 축하공연 가야랑 쌍둥이 국악가수들의 공연모습 하늘 높이 날으는 연이 축하분위기를 돋군다. 궁으로 들어오는 왕과 왕비 그리고 신하들 신비의 파사석탑: 파도를 잠재운다는 믿음으로 인도에서 배에 싣고 왔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다정한 모습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으로부터 1967년 전인 서기 48년 한국
진돗개 훈련장과 공연장의 진돗개들 진돗개 훈련장의 개 우리 진돗개 훈련장의 진돗개 진돗개 홍보관의 옥상에 설치한 진돗개들 진도의 진돗개로 황구와 백구가 있다 귀신을 알아본다는 삽살개 경주의 동경이 대전으로 팔려간 뒤 800리 멀고 먼 길을 찾아 돌아온 백구와 할머니 진돗개 사업소 진돗개 홍보관. 진돗개에 대한과학적 자료와 홍보자료가 많이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진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진도하면 생각나는 것이 몇가지는 있다. 그 가운데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진돗개와 진도아리랑이다. 진돗개는 말 그대로 진도라는 섬에서만 특별히 그 유전적 형질이 고착화된 개로, 영리하고 용맹하며 몸집도 적당하여 평생 친구로 사귈만한동물로 그 가치가 유별나다. 진돗개의 이러한 특징은 일제강점기부터 인정받아 1938년 조선보물 천연기념물 제 53호로 인정받을 만큼 일본인마저도 좋아했던 개인 것이다. 이후 해방되어 1962년 한국의 천연기념물 제 53호가 되어 지금도 그 품종을 유지하는 진돗개는 별도의 족보를 가지고 있으며, 진도개 보호육성법에 따라 관리되고 있다. 이 진돗개는 2005년에는세계애견연맹에도 공식
▲ 첨찰산 쌍계사 일주문 ▲ 일주문 그림자 아래 더위를 식히는 주민들 ▲ 일주문에서 천왕문 사이에 메타세콰이어 숲길 ▲ 천왕문 앞에서 ▲ 다정하게 손잡고 천왕문을 나서는 모자 ▲ 사천왕중 다문천왕: 탑을 손에 들고 있다. ▲ 천왕문 문밖을 나서는 사람 ▲ 쌍계사의 경내. 종각과 요사채 ▲ 정면3칸의 쌍계사 대웅전. 부처님은 개금불사 가서 주인이 없는 상태 ▲ 작고 아담한 3층석탑. 자연석 기단이 특이하다. ▲ 대웅전 앞에는 배롱나무가 활짝 피었다. ▲ 대웅전 주변 벽화-1. 심우도의 한장면으로 동자가 끌고갈 줄을 가지고 소를 찾고 있는 모습 ▲ 소를 찾아 잡아서 길들이는 모습: 길들이는 과정에 소의 색은 흰색으로 변한다. ▲ 완전히 길들은 소는 흰색으로 변하고, 동자는 소의 등에 타고 피리를 불면서 돌아온다. ▲ 집에 돌아와서 보니 소는 간곳이 없고, 소는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 득도한 뒤에는 나홀로 한가하다. ▲ 우주의 공한 모습. 주객이 텅 빈상태. 참된 지헤를 깨달음 ▲ 이제 깨달음을 베풀기 위하여 포대를 짊어지고 중생계로 나서는 모습. 어느 덧 동자는 노스님이 되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불교가 들어온지 어느 덧 2000년이 되어간다. 우리나
절 앞의 거대한 바위에서는 감로수가 흘러나온다. 천중선원으로 오르는 계단 주불전인 락가보전에는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셨다. 락가보전의 원경 바위 위에 우뚝선 영산전, 영산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모셔져 있는 전각, 전각을 마주보는 가람의 풍경이 푸른하늘과 대비를 이룬다. 주변 암봉들에 싸여있는 영산전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에서 가까운 의정부 망월사를 찾았다. 늘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으나, 망월사역에 내려서 한걸음 한걸음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역에서 망월사까지는 산길로2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이니 녹녹치 않은 등반코스이다. 역이름까지 붙을 정도이면 그 유래 또한 범상치 않는 망월사인데 올라본 경계 또한 범상치가 않았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망월사는 639년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한 절이라하니 그 세월이 1400년이 다가온다. 창건주는 해호화상으로 신라왕실의 융성을 빌고자 창건했다고 한다. 망월사라는 절이름은 대웅전 동쪽에는 토끼모양의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서 남쪽에 있는 달모양의 바위인 월봉을 바라본다하여 망월사라 했다고 한다. 도봉산의 8부틍선쯤에 거대한 바위틈에 떡 버티고 있는 전
작렬하는 햇볕을 받으며 운림산방으로 들어가는 길은 박석이 깔려 있었다. 사랑채 앞에는 연못이 있고 구름다리도 놓여있다. 맷돌을 쌓아서 물이 흐르게 한 모습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배롱나무꽃이 한창인 운림산방의 사랑채 앞 연못 ▲ 의제 허백련이 쓴 운림산방 현판 사랑채 대청마루는 자연스럽게 굽은 소나무가 대들보가 되었다. 운림산방 현판 앞에서 함께한 사진가들과 함께 대청마루 앞에서 연못을 감상하는 탐방객들. 대청 뒤에서 찍어본 정경 초가로 이루어진 안채 안채 옆 돌담사이에는 맥문동꽃이 한창이다. 운림산방 소치의 초상화가 모셔진 사당 ▲ 소치 허련의 초상화 소치의 영정이 있는사당 전경 안채로 들어가는 문 간촐한 가구와 등잔이 있는 방안모습. 기우뚱 서있는 등잔모습이 무척 정겹고 여유가 있었다. 부엌 벽면의 찬장, 찬장아래에는 여러 그릇, 솥, 기타 가재도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찬장에 놓여진 그릇들, 외부에는 판자로 벽이 있고, 찬장에는 술병과 제사용 목기들이 놓여있다. 소박하고 정감이 넘치는 부엌의 아궁이에는 검은 가마솥이 걸려있다. 멀리본 안채의 모습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한국의 명
용장산성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별초가 세웠던 임금. 왕온의 묘가 있다. 그래도 한번 있던역사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면에서 본 왕온의 묘 언뜻 보통 사람의 묘와 다를 바 없는 왕온의 묘. 한때 왕이었지만 역사에는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한 왕의 묘. 704년의 풍상을 이기고 왕온을 지키는 석인상 한송이 들꽃이 피어 쓸쓸함을 달래준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른 아침 울돌목에 뜨는 해를 보느라 쉴틈도 없었지만, 또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묵었던 숙소로 들어가 아침을 챙겨먹고, 힘을 얻어다시 길을 나섰다. 진도대교쪽에서 진도 읍내쪽으로 들어가면서 진도의 동쪽 근처에 있는 근세의 화가들이 대를 이어 배출된 운림산방으로 가는 도중에 왕온의 묘가 있었다. 왕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어제 용장산성 기념관에서 용장산성에 대한 내력을 20분 안내 동영상에서 알았다. 처음에 진도여행을 계획했을 때만해도 삼별초는 알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누군가 중심인물이 었었겠지만 그사람이 '왕온'인줄은 몰랐었다. 더구나그에 대한 최후의 역사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는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하자삼별초군은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