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이동로. 해상권을 발판으로 재기를 꿈꾸었던 이들의 해로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관공서가 있던 자리에 전시관이 있고,그 입구에 세워진 삼문 항몽 유적 건물지. 그 안에는 발굴된 유물이 전시된 유물관이 있다. 최근에 세워진 고려 삼별초군의항몽 순의비 관아로 쓰이던 건물지의 발굴된 모습(초석들) 패전 후 무너진 토성들을 발굴조사 자료에 따라 현재복원하는 모습 흙을 다짐하면서 토성을 쌓고 있다. 토성을 쌓는 모습 층지어 다짐하는 모습 건물지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그릇들과 나무로 만든 말먹이통(구시) 길이가 3~4m에 이른다 고려청자 파편들. 제주까지 가지고 와서 쓰던 그릇들. 몽골군인들이 제주도 백성을 괴롭히는 모습(벽화) 토성을 쌓기 위해 동원된 백성들의 노역모습 삼별초의항몽 의지를 그린그림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부터 700여년전 몽골은 초원에 흩어져 살던 몽골계 유목부족을 통합하여 나라를 건국하였다. 초원에서 시작하여 말과 양을 치며 살던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양을 모는데 필요한 도구였던 말을 전쟁의 첨단 전쟁 무기로 만들어 최고의 말타는 기술에기마병 전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강의 군대로 조직
▲ 김영갑갤러리 대문 ▲ 갤러리 입구에 들어서면 반겨주는 토우 아가씨 ▲ 갤러리로 들어서는 사람들 ▲ 외로운 김영갑을 연상하는 하루방 ▲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는 토우들 ▲ 열심히 사진을 찍는 생전모습 김영갑 ▲ 자신의 사진을 고르는 생전 김영갑 ▲ 뒷뜰 후원 산책길 ▲ 살아서 거닐던 뒷뜰 언덕길 ▲ 뒷 뜰 돌위에 자라는 식물 ▲ 주인 잃은 야외 쉼터 김영갑이 벽에 등을 기댄채 있는 듯한 모습 다정한 친구 토우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던 한 남자 김영갑! 제주는 화산섬으로 돌많고 바람많고 여자가 많다. 척박하고 물이 빠져버려, 비가 많이 오지만, 늘 물이 부족하여사람 살만한 땅이 못된다하여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버려진 땅이엇다. 제주는 비가 많이 와도 바위틈으로 다 새고보니 물이 고이질 않아 벼농사도 지을 수 없어 먹고 살 곡식도 늘 부족했다.... ▲ 무거운 사진도구를 짊어지고 오름을 오르는 김영갑 김영갑은 본래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그런 김영갑은 역마살이 많았던지 넓고 풍요로운 충청도 고향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 저리 카메라를 둘러메고 떠돌며 다니다가 돌많고 바
▲ 바람부는 억새밭 용눈이 언덕 ▲ 용눈이 언덕 아래의 밭과 무덤 밭에는 이제 푸른 새싹들이 움을 틔우고 있다. ▲ 용눈이 언덕에서 본 밭들. 오름에는 억새풀이 아직 자라지 않지만, 밭에는 푸른 풀이 벌써 돋아나고 있다 ▲ 용눈이언덕의 주변 밭과 무덤 ▲ 용눈이오름으로 오르는 오솔길 ▲ 용눈이 언덕의 묘지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화산의 폭발로 지하의 마그마가 분출되면서 굳어버린 화산석들이 가득쌓여서 이루어진 작은 동산 오름! 제주는 온통 지하의 불구덩이 속에서 타다남은 검은 돌들이 숭숭 구멍이 난채로 굳어서 산을 이룬 오름들이 수백개가 있다. 이 오름들은 수 천년 동안 펑퍼짐한 돌산으로 언뜻 보기는 푸른 풀밭으로 밭으로 개간할 수도 있어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작은 호미질 조차 하기 어려운 돌산일 뿐이다. 그런 척박한 땅에 바람에 날려온 끈질긴 억새들이 뿌리를 내리고 귀한 생명의 씨앗을 퍼트리기 시작하였고, 그 푸른 억새밭의 풀을 먹기 위하여 소와 말들의 방목지가 되어, 사철 소먹이 말먹이의 낙원으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화산이 분출하다 갑자기 멈추어 버리자 중심 분화구는 부풀었다가 폭싹 주져 앉아 움푹들어간 것이 마치 거대한 용이 지하에서 올라오다가
▲ 의상대에서 소나무를 배경으로 본 홍련암 ▲ 의상대에서 소나무 가지사이로 본 홍련암 각자 작은 기왓장을 보시하고 품었던 소원을 적어두었다. ▲ 홍련암 내부에서 기도하는 스님 ▲ 홍련암 관세음보살과 협시들이 3존으로 모셔진 모습 ▲ 홍련암 관세음보살 ▲ 바닷가에 언덕에 있는 홍련암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직접 만났다는 곳에지은 암자가 낙산사 동쪽 바닷가에 위치하는 홍련암이다. 그래서 홍련암 안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깔려있는 마루 가운데 오른쪽에 작은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바위틈으로 끊임없이 출렁이며 드나드는 파도를 볼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라이래 지금까지 많고 많은 스님들과 중생들이 의상대사가 만났던 그관세음보살을 만나고, 그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들을 이룩하고자 하루도 빠짐없이 밤과 낮도 구분없이 끊임없이 기도가 계속되는 것이다. 바닷가에 자리하여 위태롭게도 보이지만, 소망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더욱 마음이 모아지고, 소망이 더욱 간절해지고, 기도를 한 뒤에는 간절한 소망을 이룩하고
야간 조명을 통해솟을대문 쪽 에서 본 원통보전과 7층석탑 빈일루를 지나서 원통보전으로 오르는 응향각 계단앞에서 원통보전 앞에 있는 7층석탑. 자세히 보면 한국전쟁 시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 닥종이를 주 재료로 조성한 관세음보살로 그 위에 칠을 한 뒤 금박을 입힌 건칠관세음보살. ▲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측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낙산사의 많은 관세음보살 조상 중에도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좌측 협시불이 보통 사찰의 배치형식이나,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으로선하고 악한 모든이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참회를 받아주는 보살이기에 그 누구나 부담없이 와서 매달리는보살로 자리 매김되었다. 불교에서는깨달음을 성취한 이를 부처라 부르고 그 깨달음의 성취를 미루고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자처한 이를 보살이라고 부르지만그 중에서도 관세음보살은 가장 많은 중생들이 믿고 찾는 보살이기에 가장 친근한 보살이다. 그런데 그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불이 아닌 관세음보살만의 집(전각)에 모셔지게 되면 그 전각의 이름은 관음전 또는 원통전 더 높이면 원통보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과 그를 따
▲ 설악산 신흥사 통일대불의 전경 ▲ 대불 앞의 전경 ▲ 대불앞의 기도 ▲ 대불의 전면 상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사철 경치 좋기로 유명한 설악산에는 신흥사가 있다. 신흥사는 652년 신라가 통일하기 이전에 자장율사가 세운사찰로 처음에는 향성사라 했으나, 여러차례 전란으로 불타고, 조선조 1644년 인조 때 다시 세우고 신흥사라고 이름하였다. 설악산으로 가려면 주차장을거쳐신흥사 일주문을 지나고외설악 계곡의 입구에 청동으로 조성한 통일대불을 거쳐야 하므로 많은 등산객들이 드나드는 설악산의명소가 되었다. 통일대불이라 함은 한반도에 동서로 가로놓인 휴전선을 속히 걷어내고 민족의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일제강점기를 겪고나서 세계 양대 강국인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 점령함으로 인하여,한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는 분단되고 말았다. 일제 침략 정책으로한국을 무자비하게 다루고 민족말살을 꾀하던 일본은멀쩡하게 용서받고 통일된 모습이니, 참으로 야속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고착화된 한국의오늘임을 뼈저리게 인식하고,이를 타파하고 통일의 그날을위하여 부처님의 원력을 빌어보자는 뜻으로 세운 것이 바로 이 거
▲ 범종 ▲ 종소리를 듣고서 깨침을 이루라는 싯귀 ▲ 비천상 ▲ 연꽃무니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기 설악산 신흥사의 범종처럼 대부분의 사찰에 가면 청동으로 주조한 커다란 범종이 있고 그 종을 매달고 보호하는 범종각이 있다. 은은한 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고 그윽한 산사의 풍경을 더욱 더 멋지게 하지만, 종소리는 단순히 그런 의미로만 치는 것은 아니다. 바위 속에서 캐낸구리 주재료로 니켈 아연등으로 함금하여 용광로에서 함께녹인 쇳물을 밀랍으로 만든 거푸집에한 번에 부어 넣어서 만들어 지는 것으로, 불교의 범종은 서양의 기독교 종처럼 안에 매달린 추가 치는 것이 아니라, 범종의 밖에서 당목으로 힘껏 친다. 그 종소리를 듣고서 과거 현재 미래세의 모든 업장을 소멸하고 깨달음의 진리를 체득하길 바라면서...종의 면에는 종을 만들때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도 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도 있고,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연화장세계의 상징인 연곷도 있지만, 한 면에는 한시로 표현한 서원이 새겨져 있다. 원차종성편법계;이 종소리 온세계에 두루 퍼져 철위유암실개명:철위산 깊은 곳까지 다 밝아지고 삼도이고파도산: 삼
▲ 부지런한 어부들...해가 뜨기 전부터 항구를 오고 갑니다. ▲ 의상대 위로 떠오르는 해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해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주는 낙산사와 그 안에 있는 의상대! 맑은 날 아침 찬란한 해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관세음보살께 소원도 빌어봅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대빈묘의 좌측면 ▲ 대빈묘의 정면 ▲ 묘비 ▲ 문인석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서오릉에 한 많은 여인의 묘가 있다. 한때는 왕비였으니 능명을 갖을 수 있었으나, 그녀의 기구한 운명으로 궁녀에서 왕비가 되었다가 왕비에서 다시 폐서인이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던 왕이 내린 사약을 받고 큰 한을 품은채 죽어갔던 여인의 무덤인 것이다. 그 여인은 다름이 아닌 숙종의 비였던 장희빈(정옥정)이다. 장옥정은 궁녀에 뽑혀서 궁중에서 시녀생활을 하다가 젊은 숙종의 눈에 들었다. 그러나 왕이 왕비보다 궁녀에 불과한 장옥정을 가까이하는 것을 눈치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현종의 비)는 장희빈을 궁밖으로 내좇아버렸다. 그런데 궁밖으로 내쳐진지 3년 만에 그녀를 미워하던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숙종은 명성왕후의 탈상이 다음에끝나자옥정을곧바로 다시금 궁으로 불러들여 왕자 '윤'을 낳았다. 그 왕자가 후에 경종이 되었다. 왕자 '윤'은자신을 낳아준 장희빈에 의하여 성불구자가 되었다. 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경왕후의 뒤에 왕비가 된 인현왕후와 철저한 암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적인 인현왕후를 어떻게든 밀어내고 자신이 왕비가 되려고 권모술수를 썼고,
▲ 익릉의 전경 ▲ 익릉의 정자각 ▲ 능을 지키는 능지기가 거하는 수복방 ▲ 정자각에서 본 익릉 ▲ 능의 아라에서 본 익릉 ▲ 능의 앞에 도열한 석물들 ▲ 능의 우측에 도열한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들 ▲ 능의 좌측에 도열한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들 ▲ 능의 앞에서 왕비의 명령을 기다리는 문신 ▲ 능의 앞에서 능을 수호하는 무신(장군) ▲ 익릉의 석수들(석호 석양) 능의 주변을 보호 감시한다. ▲ 익릉 전경 ▲ 능의 뒤에서 본 익릉과 전경 ▲ 능 아래로 내려와서 본 익릉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익릉은 서오릉에 숙종보다 먼저와서 자리한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일찍이 11세에왕궁에 들어와 세자빈이 되었고, 13세에 왕비가 되었던 인경왕후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채 20세 에 삶을 피워보기도 전에 콜레라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그리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후기 역사는 또 어찌 펼쳐졌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숙종때 궁녀에서 왕비까지 되었던 장옥정(장희빈)도 없었을것이고, 그녀의 뒤를 이어 제1계비가 된 인현왕후도 없었을 것이며 인현왕후의 시녀로 궁녀가 되었던 최숙빈을 만나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