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도 알곡을 맺고 고개를 숙이는 가을하늘도 쾌청합니다. ▲ 들깨밭도 열매맺기 시작하고 ▲ 활짝핀 들깨 송이들 ▲ 요즈음 당뇨병에 특효라고 인기있는 여주 ▲ 더덕 넝쿨도 초록빛을 벗어나고 ▲ 소담스러운 더덕꽃 ▲ 억새도 꽃을 피우고 ▲ 도꼬마리도 열매를 맺고 있네요 ▲ 김장을 위하여 이제 막 심은 끝없는배추밭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을! 하늘은 청자빛으로 물들고 들판의 곡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갑니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시계 앞에 들판의 초목과 곡식들은 어김없이 자신들의 앞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봄에 심은 곡식들은 추수를 기다리고, 가을 김장 무, 배추는 이제 자라기 시작 하네요.. 다만 사람들만이 철모르고 한낮의 더위에 여름인듯 착각하다가 한가위가 다가오니 문득 정신차리며 세월가는 것만 아쉬워만 하는 듯 하네요.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 세종대왕동상 뒤에 가득한 경찰들. 메아리가 사라진 광화문광장!! 메아리가 되지 않고 외침만이 지속되고 있다. ▲ 광화문 광장의 주변에 집회 참석자보다 더 많은 경찰들이 장막을 치고 있다. ▲ 세종대왕동상 앞에서 더 이상 전진이 용납되지 않고 있다. ▲ 이순신장군 동상 뒤에 모인 참가자들 이순신장군처럼 공평하고 정대한 지도자가 나오길 고대한다. ▲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자리에는 약자들의 대표격인 지체장애인들이 앉아있다. ▲ 기존에 있는 법으로 안되고 왜 꼭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인가? 귀 기울여 들어보면 이해가 된다.. ▲ 진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는 광화문의 만인공동회 연사로 나선 사람.. ▲ 진실을 알아야 잘못한 사람들을 처벌도 할 수 있고 잘못에 대하여 시인을 해야 용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들. ▲ 국민적 열풍이 된 단식...그 진원지는 광화문이었다. ▲ 국민서명에 참여한 젊은이들. 근래 보기 드물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특히 여성들이 2/3는 되어보인다 ▲ 함께 해주는 것이 힘이된다며 종이배를 접고 있는 동참자들. ▲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서라도...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동북공심돈 원경과 궁사들의 과녁 ▲ 동북공심돈 원경 ▲ 동북공심돈을 찾은 중국관광객들, 꽤 많은 어린이들도 부모들과 성곽을 둘러보고 있다. ▲ 동북공심돈의 원경 ▲ 동북공심돈을 가까이서 본 모습 지붕이 잘 보이지 않는다 ▲ 동북공심돈의 망대창 ▲ 공심돈 외벽에 난 총안 ▲ 동북공심돈 출입문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의 북쪽, 동북노대(東北弩臺)의 서북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군사시설로 비교적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맨 위에 올라서면 화성 전체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이전에는 없던 형태와 재료로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도면에 따라서 다시 중건된 것이다. 외부는 구워만든 벽돌로 둘러싸고, 내부는 돌음계단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맨 위에 한옥으로 된 망대에 오를 수 있으며, 외벽의 벽 위에서는 군데군데 망을 볼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또한 총도 쏠 수 있는 구멍들이 뚫려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기획에 의하여 정약용이 총감독으로 세워진 근세 조선의 특이한 형태의 성곽이다. 화성은 이전에
▲ 연무대 전경 넓은 마당에서 무술을 겨루고 연마했다. ▲ 연무대 정면 ▲ 연무대 측사면 ▲ 연무대 현판 ▲ 출입문에서 본 연무대 ▲ 연무대 출입문 ▲ 연무대 창고, 병사들의 무술연마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연무대 내부 건축구조 ▲ 연무대 기단부 ▲ 연무대 상징기가 펄럭인다. ▲ 연무대 옆문에서 본 동북공심돈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뒤,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하여 세운 화성은 실권을 잃은 조선 후기 임금이 임금다운 임금이 되기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당시 임금은 세습에 의하여 대물림이 되었으나, 임금의 아들이라고 무조건 저절로 임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왕자지만 당시 기득권 세력들의 힘에 기대야 살수 있었고, 임금의 종친보다는 외척들의 비호하에 외척과 권신들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지 않으면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임금은 임금이로되 집권세력들의 살벌한 기운이 언제나 대궐의 주변에 뻗어있었고, 집권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다른 파벌에게 빼았기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만 더욱 더 파당을 짓고 잇권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하여 집권세력들은명
▲ 복원한 허균, 허난설헌 생가. 신분과 계급이 먼저인 사회에서는 아무리 큰 뜻이 있어도 용납되지 않았다. ▲ 허균 ,허난설헌의 옛집 안채 ▲ 안채의 다른 모습 ▲ 안채의 뒷모습 ▲ 안채 모습. 건물이 지붕을 서로 맞대고 있는 'ㅁ'자 모습이다. ▲ 옛 대문 ▲ 허균과 허난설헌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시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기념관은 강릉시 초당동 477-8 번지 경포대 근처에자리하고 있다.이들은 500년 전허씨 5문장가의 인물로 5문장가란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허균의 형제 허봉, 허초희, 허성을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잘 알려진 인물이교산(허균)과 난설헌(허초희)이다. 허균은시대를 앞서간 탓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허초희 또한 남녀차별의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나 자신보다 못한 남편을 섬기며뛰어난기량을 맘껏펴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생을 마감했다. 허균은 1569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상관찰사를 역임한 허엽의 정부인에게서세째아들로 태어나 당시 사회에서는신분상 하등의 지장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가르쳐준 스승(이달)은 서자출신이었고, 그와 함께
▲ 낙산사 원통전이 보이는 응향각 문아래에서 ▲ 낙산사7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전란과 세월의 풍파에 많은 손실을 입었다. ▲ 원통전 앞 문에 들어서는 사람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낙산사는 그 창건연대는 통일신라 초기로 올라간다. 낙산사의 창건주는 중국에서 화엄종이태동한때로 당나라의 지엄에게 유학하여 그의 인가를 받고 이를 들여와한국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대사이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에도 많은 어려움을관세음보살의 도움으로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자신라땅에서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찾아 헤매다가 이곳 낙산사의 동쪽 바닷가홍련암 바위틈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홍련암을 짓고이후 이곳이관세음보살의 상주처로 여겨지게되었고 관세음보살의 성지가 되었다. 이후 1300년이 넘게 관세음보살기도 속에 수많은영험담이 전해져오고 있고, 지금도 동해안의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또 아름다운 일출의 명소로 거듭나, 이제는 한국을 넘어서 중국 일본에서 온관세음보살의 영험을 믿고 기도하는 참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이런 사찰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전란과 화재로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였고, 최근에도 산불에 사찰의 대부분의 건축물이 소실되고 조선조에 주조되었던
▲ 중국(청나라)과 일본조차지의 경계 계단에는 두 나라의 상징이 석등으로 표현되었다. 현재 공사 중.(왼쪽이 청나라, 오른쪽이 일본) ▲ 개항지의 중심이던 관청건물 현재는 인천 중구청으로 활용되고 있다. ▲ 근대건축물 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축물 ▲ 일본풍의 건축물로 남아있는 건물들로 주로 사무소나 커피점들이다. ▲ 일본풍 건물들의 거리. 당시에는 최신식 건축물들이었다. ▲ 일본풍의 건축물사이로 교회가 서있다. ▲ 중국을 상징하는 성인 공자상(像).청도시에서 제작하여 기증하였다. ▲ 중국을 상징하는 솟을대문이 서있다. ▲ 중국거리 중심지에는 계단에도 상징문이 그려져있다. ▲ 중국거리의 중심부에 있는 중국풍의 건축물 ▲ 중국 만두가계 앞에 익살스런 인형 ▲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장식된 거리의 가로등과 깃발 ▲ 온통 붉은 색으로 장식한 중국거리 ▲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중국인 거리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1876년 조선말 남의 땅을 측량한다고 들어온 일본의 배를 격침하자, 이를 기화로 일본은 함대를 파견하여 강제로 인천항이 개항된 이래 외국문물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지
▲ 운현궁의 대문과 행랑채 ▲ 운현궁 솟을대문 ▲ 운현궁 본채로 들어가기 전에 해설을 듣는 탐방객들 ▲ 사랑채 대문에서 본 사랑채 ▲ 대문에서 본 사랑채(노락당)의 왼쪽면 ▲ 기둥상부 익공과 처마도리 아래에는 둥근 처마도리를 받치는 장여와 장여를 받치는 소로가 있어 집의 격조가 높음을 말해준다. ▲ 추사가 쓴 사랑채 현판 노락당 ▲ 사랑채에서 본 사랑채대문과 대문행랑채 ▲ 안채 집안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행랑칸툇마루에 걸터 앉아 ▲ 사랑채 누각 마루방 ▲ 사랑채에서 본 안채가는 길 ▲ 전벽돌 굴둑이 있는 안채의 모습. 다락방 밑에 아궁이가 있다. ▲ 안채에서 내부 통로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 마당과 뜰을 오가는 통로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 ▲ 운현궁의 마당은 본래 사병들이 훈련도 하고 말과 마차 등이 대기하는 공간으로 잡인들의 접근은 얼씬도 못하는 곳이다. ▲ 운현궁마당에서 본 안채 전경과 외부담장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운현궁은 본래 날씨를 살피던 서운관 앞에 있는 고개를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 스님의 집전으로 백중날 조상님들의 고혼을 불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재를 지낸다. ▲ 자신들의 조상영혼에게 절을 올린다. ▲ 불경과 설법을 듣고 조상들의 이름이 적힌 영가를 모시고 부처님 앞을 돌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 ▲ 재를 마친 뒤 영가의 이름이 적힌 영가집을 불태워 조상들의 고혼들이 본래 자리로 잘 돌아가길 빈다. ▲ 조상들의 영가집을 하나 하나 불에 태우는 스님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8월 10일은 음력으로는 7춸 15일이고, 우리는 이날을 백중날이라 불렀다. 백중(百中)은 백종, 머슴생일날, 호미씻는 날, 축수하는 날, 중원, 상농 명절 등으로 불리웠는데, 이때 쯤이면 바쁜 벼농사 밭농사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때인데 그렇기 때문에 머슴도 하루는 충분히 쉬면서 놀고 즐길 수 있는 날이라 하여 생긴 말이 '머슴의 생일'로도 불린 것이다. 백중은 모내기부터 지금까지 농번기 중 힘들었던 농부들이 그동안의 힘들었던 수고에 대한 위로와 보답으로 잠시 쉴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가지면서, 또한 인간으로써 자신들의 조상들을 생각하며 그 영가들께도 예를 드리는 날이다. 백중을 불가에서는 '우란분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 극락교 건너기 전 석장승, 본래는 2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1930년대 홍수로 떠내려 갔다고 한다. 석장승 뒤로 흐르는 냇가 어딘가에 묻혀있지 않나 궁금하다. 이 석장승 이름은 '용호금사 축귀장군' ▲ 실상사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본 만수천 ▲ 극락교 건너편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그 이름은 대장군으로 새겨있다. ▲ 극락교를 건너면 왼쪽에 있는 석장승. 가장 크고 듬직하다. 그 이름은 상원주장군으로 새겨졌다. ▲ 극락교를 건너기 전 석장승 확대 모습 ▲ 극락교 건너서 오른쪽에 있는 석장승 확대 모습 ▲ 극락교 건너 왼쪽에 있는 석장승 확대 모습 ▲ 최근에 세운 목장승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실상사는 통일신라 9산선문의 하나로 실상선문을 연 홍척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지리산을 주변으로한 대찰로 알려져있다. 홍척국사는 당시 보림사를 개창한 도의국사와 함께 당에 유학하여 선종의 법을 전수하고 돌아왔는데 도의는 장흥에보림사를 홍척은 남원에 실상사를 지었다. 이후 그의 수제자인 수철화상이 실상사를 크게 중창하여 선문의 일가를 이루었고, 그뒤 선종의 대찰로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고려를 거치고 조선조에 이르러 세조때 큰 화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