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산사7층석탑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 초기작품이다. 유교 성리학의 국가이념에 밀려 불교가 탄압받기 시작한 조선시대이지만 그래도 왕의 성향에 따라서는 가끔씩 불사가 이루어졌다. 낙산사7층석탑은 조선전기 세조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달한 뒤 몸에 피부병이 걸려시달리다가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왔다가 관세음보살의 영험으로 유명한 이곳 낙산사에 들러 시주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에 있는 모성정(慕聖亭) 1625년 학자이며 효자였던 이장원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우모정을 후손들이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고쳤다고한다. 이장원의 학덕과 효심을 높이사 그를 성인으로 높이고자 함이 이름에 묻어난다. 주변바위에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고, 정자내 현판에는 정자중수에 십시일반한 사람들의 덕도 함께 새겨져 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문화사진기자, 포토클럽 회원으로 활동 중
▲ 방초정에서 본 마을 정원 ▲ 방초정의 원경 ▲ 방초정의 건축가구구성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김천시 구성면에 있는 방초정 마을 앞에 건립된 누각형의 정자로 정자에서 마을 앞을 훤히 내다볼 수 있어 외지인의 출입을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으며 마을 앞의 논밭도쉽게 관리할 수 있다. 정자의 2층에는 온돌방도 하나 있어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게 특이하다. 정자의 방문을 사방으로 열어제끼면 3칸 정자는 온전히 하나가 된다. 또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는 풍광은 마치 사진액자를 거쳐서 보는 듯한 멋도 느낀다. 정자에 올라 주변경계를 노래한 시인묵객들의 시들이 가득하여 그 연륜을 느끼게 한다. 정자 앞에는 연못과 정자나무가 있어 이 또한 운치가 좋다 1625년 인조때 건립되어 여러차례 중수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 장안성 동문 ▲ 성곽위의 도로와 누각들 ▲ 성밖의 해자와 풍경 ▲ 성문지붕의 잡상 ▲ 성문의 축벽 ▲ 성곽 밖의 풍경 ▲ 성문 출입구에서 본 성밖풍경 [그림경제=최우성 기자]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성곽일주. 장안성 성곽은 직사각형의 평면으로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았다. 성의동서남북에는 같은 규모의 성문이 정문으로 있다. 사방 성문 위에는 3층의 누각건축물이 서있는데 그 크기는 북경의 천안문보다 더 크고 육중한 건물이다. 목조건축물의 규모는 보통전면 기둥이 몇개가 서있는가에 따라 칸의 수로 말하는데북경의 천안문은 전면이 9칸인데견주어 장안성의 전면은 11칸이나 되었다.목조건축의 한칸은 2개의 기둥이 이루는 공간을 말하며 기둥이 12개가 병렬로 서있을 때에는 11칸이 된다. 참고로 서울의 숭례문은 5칸이니 그 크기로 보면 장안성의 성문은 서울성곽의 숭례문과는견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였다. 성벽의 높이는 약 10m이고 성의 둘레는 14.7m정도이며 성위에는 폭15m정도의 도로가 닦여있어서 말을 타고 달리거나 마차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걸어서 한 바뀌 돌려면 하루 온종일 걸어야 할 듯하였다. 성밖으로는 해자를 파고 물을 끌어들
▲ 진시황릉의 병마용들 ▲ 보병부대 병마용 ▲ 열을 지어 서 있는 병마용 ▲ 병마용 말들 ▲ 부서진 병마용을 발굴하여 다시 맞춤한 병마용들 ▲ 재현환 병마용 ▲ 말과 마차를 재현한 모습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2200년 전 진시황이 죽은 뒤 진시황릉의 주변에 조성된 황토갱도에 묻힌 경마용들을 발굴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완성조립한 방마용 박물관의 모습.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 중국의 역사에서는 그저 보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느껴본다. 진시황릉의 위치는 미궁 속에 묻혀있었는데 현재 진시황릉으로 확정되기까지는 많은 곡절이 있었다. 1974년 한 농부가 밭을 갈던 중 병마용의 머리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당국에 신고하고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다. 현재까지 발굴되지 못한 갱도가 너무도 넓고 커서 진시황릉의 경계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상상으로 그려보는 진시황릉은 과연 얼마쯤일까? 진시황릉을 한바퀴 돌아주는 관람차를 타고 돌아보았는데족히 1시간은 걸린 듯하다. 당시 백성들의 고혈인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이 무덤이훗날 전 세계인의 관광자원이 될 줄이야 진시황 자신도 미처 생각 못했을 것이다.뿐
▲ 당나라 현종의 비 양귀비상 ▲ 춤과 노래와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양귀비 ▲ 양귀비와 당현종이 노닐던 정원 화청궁 ▲ 화청궁의 연못 화청지 ▲ 양귀비가 몸단장하던 목욕탕 ▲ 양귀비가 목욕한 후에 머리를 말리던 정자 ▲ 양귀비가 즐겨먹었던 석류 !!양귀비가 많이 먹어 미인이 되었다고 하여 석류가 특산물이 됨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하여 경국지인으로 유명한 당나라 양귀비!! 당현종은 그녀를 위하여 화청궁을 짓고 화청지에서 늘 그녀와 함께 했다고한다. 그녀 때문에 정치는 양귀비의 오빠에게 모두 맡기고 등한시 하였고, 그녀의 오빠는 뇌물을 받아먹어 정치가 문란해지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백성들의 원성이 커져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결국 당나라가 기울게 되었다하여 양귀비를 경국지인(國之人)이라 부르는 것이다. 당나라의 서울이었던 장안(지금은 서안)에는 당나라의 왕궁 외에 양귀비가 주로 살았던 화청궁이 있는데 그 화청궁은 양귀비를 위한 궁전이었다. 당시에도 온천이 있어 양귀비는 늘 그 온천물에 목욕하고 정자에 올라 몸을 말리고 현종을 기다렸다고 하며 죽은 후까지 영원히 함께하자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였다고한다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실크로드의 기착점 서안(시안=장안)의 기념조형물 한나라 무제시절 한무제의 명을 받은장건은 실크로드 저편에 있는 초원지역 대월지국과 교류하기 위하여 사막을 횡단하던 중 흉노족에 붙잡혀 흉노족 여인을 아내로 맞아 살게 되었다. 그리되자 안심한 흉노족 왕은 그의 감시가 소홀하게 되었고 이를 기화로 장건은 처자식을 버리고 흉노족의 땅을탈출하였다. 탈출한 장건은 그동안 작성한 지도를 가지고대월지국까지 가서 동맹을 맺은 후 돌아와 모든 정보를 한무제에게 바쳤으며 그 정보를 이용하여 한무제가 실크로드를 개척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런 역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안의 중앙공원에는 그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저리도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
▲ 북을 매달아 놓은 고루 ▲ 종을 매달아 놓은 종루 ▲ 성안의 현대식 건물 ▲ 성안의 상가들 서안은 중국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서울이었다. 진나라의 진시황제는 통일후 아방궁을 짓고 천년왕국을 꿈꾸었지만 그가 죽자마자 그리도 아끼던 아방궁은 불에 타서순식간에사라졌다. 이후 들어선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최초의 한족이 세운 통일왕조였으나 이 또한 나라가 망한 후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이후에 들어선 당나라는 망한 후에도 성곽은 그 자취를 남겼으나 궁궐의 건축물은 예전의 왕조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중국의 태평성대하면 성당시대를 이르는 말이고, 그 당나라 시대가 가장 중국다운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 안시성 원정시 양만춘 장군의 화살에 한쪽눈이 멀었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죽었던 당태종 이세민의 시대를 정관의 치라고 하여 가장 본받을 중국 최고의 정치시대라고 한다. 그 당태종 이세민이 이루었던 당나라의 성안에 있는 종루 고루와 주변의 건축물을 간략하게 돌아보았다. 건물이 하도 커서 종과 북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종과 북도 꽤 컸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
▲ 16국사 비 ▲ 송광사 일주문 ▲ 전각과 돌담 ▲ 소나무 사이로 본 송광사 [그린경제=최우성 기자] 고려시대 보조국사와 지눌선사가 중창한 이래 16명의 국사를 배출했다하여 승보사찰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3대 사찰이라하면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인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부처님의 가사가 있다고하여 불보사찰이라 하고,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모아 조성한 팔만대장경을 간직한 곳이라 하여 법보사찰이라 하며, 이곳 송광사는 부처님을 따르는 훌륭한 제자스님들이 많았다 하여 승보사찰이라 한다. 앞으로도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나와 중생계를 밝혀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본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사진활동은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해리티지채널
▲ 여명에 잠든 낙안읍성 ▲ 새벽빛을 받은 낙안마을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 남해 바다가 가까와서 왜구들이 자주 습격해오자 마을 주변에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들어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했다고 한다. 평야지역의 서민마을로 급격한 근대화에 전국의 초가마을이 다 사라지고 이제 육지에서는 유일한 초가마을로 민속마을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마을 안에는 관아건물이 기와집으로 들어서있고, 민가는 모두가 초가마을이다. 옛날에는 초가지붕이 값이 싼 재료이고, 농한기에 주민들이 품앗이로 지붕을 이엇지만, 이제는 초가지붕을 이을 볏짚도 구하기 어렵고, 이엉을 이을줄 아는 사람도 줄어들어 초가지붕을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같은 낙안읍성 초가마을이 오래도록 유지되어 후세들이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교육의 장이 되길 기대한다. **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사.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사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