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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강 따라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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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야기가 얽혀있는 ”임진노성전적비"의 실체는?

평창강 따라 걷기 6-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생태마을 옆 산 쪽으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매화마을 녹색길과 만나는데, 생태마을에서는 순례길이라고 부른다. 천주교 신자들이 생태마을에 2박3일로 피정(필자 주: 기독교의 수련회와 비슷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 수련회)을 오면 순례길을 걷는 일정이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이 겨우 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매화마을 녹색길과 만난다. 매화마을 녹색길은 쉽게 말해서 응암리 매화마을에서 만든 둘레길이다. 포장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 내려가다가 왼쪽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오솔길을 따라 계속 가니 평창강 둑방길이 나타난다. 낮은 보와 작은 양수장 건물이 보인다. 둑방길을 따라 강 따라 계속 걸었다. 한적하고 물소리가 들리고 녹색 산이 보이는 좋은 산책길이 이어진다. 걷다 보니 오른쪽에 표시판이 나타난다. 밭 가운데 돌무더기가 쌓여있다고 하여 ‘뒤다미’라고 하는데, 쌓여있는 돌무더기는 한강변 중심 최남단에 있는 철기시대 무덤(무기단식 적석총)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설은 임진왜란 때 죽은 왜군의 무덤이라고 하여 이담(왜담)터라고도 한다. 조금 더 내려가니 강 건너에 높은 절벽이 나타난다. 약

생태마을에서 평창강을 내려다 보는 쾌감을 맛보며

평창강 따라 걷기 6-3

[우리문화신문=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 강 따라 조금 내려가면 강 건너편에 넓은 둔치가 보인다. 커다란 풍차도 보이고. 거기가 백일홍 축제장이다. 평창읍에서는 100만 그루의 백일홍을 심어놓고서 9월에 백일홍 축제를 연다. 나는 몇 년 전에 손자 둘을 데리고 가서 백일홍 축제를 재미있게 구경한 경험이 있다. 아쉽게도 2020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축제가 취소되었다. 평창군의 각 읍면에서는 경쟁하듯이 축제를 개발하였다. 봉평면은 메밀꽃 축제가 유명하고, 진부면은 겨울에 송어축제를 한다. 평창읍은 가을에 백일홍 축제, 대화면에서는 여름에 더위사냥 축제를 개최한다. 이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람이 많이 몰리는 축제는 단연코 봉평면의 메밀꽃 축제이다. 메밀꽃 축제는 1999년부터 시작하였다. 메밀 재배 면적으로 보면 전북 고창 학원농장의 메밀밭이 훨씬 더 넓다. 고창 외에도 장흥, 하동, 강촌, 제주도에도 메밀밭이 있고 메밀꽃 축제가 열린다. 그렇지만 봉평에는 이효석이 있기 때문에 메밀꽃 축제의 대명사는 봉평이다. 평창강 따라 조금 내려가자 2개의 매우 짧은 터널이 연달아 나온다. 터널을 지나자 유동리 표시석이 나온다. 버드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버들골이라고도 하고

평창강 길을 걷다 만난 '이효석 기념비'

평창강 따라 걷기 6-2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면서 가양이 길가에 피어있는 고들빼기와 씀바귀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을 했다. 가양은 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한국교육개발원 과학교육연구실에서 근무하였다. 가양은 초.중.고 과학교과서를 여러 권 만들었기 때문에 식물의 종류와 특성에 대해서 많이 알았다. 고들빼기와 씀바귀는 대표적인 봄나물이다. 두 식물의 같은 점은 꽃잎이 작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노란색이라는 점이다. 차이점은 고들빼기는 꽃 중앙의 꽃술이 노란색인데, 씀바귀는 꽃술이 검은 색이다. 잎으로도 구별할 수 있다. 고들빼기는 잎이 줄기를 빙 둘러 감싸는데, 씀바귀는 잎이 줄기를 감싸지 않는다. 출발점으로 돌아온 후에 (구)평창교를 건너갔다. 이제 우리는 강의 오른쪽 둑방길을 걸었다. 기온은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덥지는 않고, 걷기에 상쾌한 봄날씨다. 걷기 시작한지 1시간 이상이 지나서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나는 전에 가본 냉면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12시 30분에 냉면집에 도착하였다. 냉면을 주문하면 숯불에 구운 불고기가 서비스로 나온다. 가성비가 매우 높은 점심을 먹고 모두들 좋아했다. 식사 후에 커피를 마시러 중앙

기암괴석이 펼쳐진 평창바위공원

평창강 따라 걷기 제5구간 – 계속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중간에 31번 도로를 건너지 않고 계속 남진하였다. 이 부근 평창강은 강폭이 매우 넓고 하중도(河中島, 강 한 가운데 있는 섬)가 보였다. 식생으로는 갈대와 버들이 많이 보였다. 조금 가다 보니 길이 좁아져서 차는 다닐 수가 없다. 조금 더 가니 이제는 사람도 가기 어려울 정도로 길이 좁아진다. 나는 며칠 전 사전답사 차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다. 지도상에는 길 표시가 없지만 갈 수는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계속 이어진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여만교 다리에 도달한다. 여만리는 이 구간 평창강의 동쪽 들을 말한다. 고려 때부터 양곡이 많이 나던 곡창지대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만 명이 먹고도 남는다고 하여 ‘여만리(餘萬里)’라고 했다. 평창강가에 있어서 들이 넓고 길어서 ‘여마니’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여만교를 지나 둑방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강의 왼쪽 둑을 따라 걸어갔다. 강 건너편이 노산(魯山)이다. 노산의 높이는 해발 419m이지만 여만리 자체가 높은 지대라서 노산은 높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노산은 평창의 진산(鎭山, 관아의 뒷산)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되

주진교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평창강

평창강 따라 걷기 제5구간 - 계속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용항교를 건너면 주진리이다. 《조선지지》에 주진리(舟津里)라고 표시되어 있는 마을이다. 주나루라고도 부르는데, 나루 둘이 있으므로 두나루라 하던 것이 변하여 주나루가 되었다. 옛날에는 뱃터거리에서 나룻배로 사람과 우마차가 강을 건넜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1934) 주진교가 놓였고, 80년대 초에 새 주진교가 건설되었다. 그렇다면 소년 이효석은 봉평에서 평창읍으로 갈 때 분명히 주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을 것이다. 배를 타고 평창강을 건너는 소년 이효석을 상상해 보았다. 그의 작품 중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주진리에서 평창강 따라 동쪽으로 계속 걷다가 작은 하천을 만나 왼쪽 둑길로 돌아가니 주나루라고 쓰인 큰 비석이 나타난다. 공원 입구에 주진게이트볼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비석의 아래에 주나루의 유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나루란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니던 뱃터거리를 말하는 이곳의 옛 지명입니다. 주변에는 선사시대부터 선조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물인 토기, 돌 연모, 고인돌 등이 산재해 있고 앞산 용산(龍山)은 용산정(龍山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이효석과 왕수복의 사랑 이야기

평창강 따라 걷기 제5구간 – 계속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용항리 경로당이 오른쪽에 나타나자 용항교가 왼쪽으로 평창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 입구에는 효석문학100리길 제5구간 표시판과 안내도가 있다. 여기서 남쪽에 보이는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후평리를 지나 노산을 거쳐서 평창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소년 이효석은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지금 내가 걷는 걸을 걸었고, 내가 보는 산을 보았고, 내가 듣는 강물소리를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감회가 인다. 나는 서울에서 친구들이 봉평으로 찾아오면 꼭 이효석 문학관으로 안내한다. 문학관에는 2명의 문화해설사가 근무하는데 단체 관광객에게는 해설해준다. 이효석(1907~1942)은 문학관 근처인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진부면장을 했다. 그는 1914년에 평창읍에 있는 평창공립보통학교(지금의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봉평에서 평창읍은 거의 100리 길이므로 이효석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평창읍에서 하숙을 했다. 이효석은 1920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하였다. 그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를 1925년에 졸업하고 이어서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