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보물 ‘국새 칙명지보(勅命之寶)’가 있습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를 만들었는데 이 유물의 제작과정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서 등극하는 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으며, 대한제국의 국새 전반의 현황을 기록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서도 그 형태와 재질 그리고 실제 사용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새 칙명지보’는 용 모양의 손잡이[龍鈕]와 몸체[寶身]로 구성되어 있지요. 손잡이의 모양은 용 형태로서 용머리에는 사슴뿔이 솟아있고 코에는 여의두문이 있으며, 입을 벌린 채 이빨 2개가 아래로 삐져나와 있고,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몸 전체는 비늘이 덥혀있고, 등을 위로 솟구친 반원형입니다. 서체는 대한제국의 옥새와 같이 소전(小篆, 전서체의 하나)이며, 문자가 균일하고 좌우대칭의 정제된 형태로 나타나 제왕의 냉엄한 권위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칙명지보는 통신조서에 사용한 것인데 품질이 가장 좋은 은 곧 천은(天銀)에다 금도금한 것으로 인수(印綬) 곧 끈은 없어졌습니다. ‘국새 칙명지보’는 대한제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선왕의 장례와 우리 태조의 장례에 저자의 잡색 여자들을 불러다 울며 따라가게 하고, 이를 통곡비(痛哭婢)라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 삼가 《두씨통전(杜氏通典)》ㆍ《당원릉장의(唐元陵葬儀)》에 보면, 공주와 내관 등이 둘러싸고 모두 울고 발을 구르고 하며 따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태행 상왕(太行上王)의 장례에는 공주는 후궁으로 대신하고, 사정이 있으면 관비(官婢)로 울며 따라가게 하소서.” 위는 《세종실록》 1년(1419) 12월 21일 기록입니다. 판소리 <흥보가>에 보면 흥보가 매품을 팔러 간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위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왕실 장례식에 우는 노비 곧 통곡비(痛哭婢, 또는 곡비)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없어진 풍습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상가에 울음소리가 있고 없음에 따라 상가의 수준을 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상주들은 장례식 때 곡하는 여인들은 고용하기도 했지요. 대신 울어주는 여성인 통곡비는 왕실의 장례식뿐만이 아니라 왕릉을 옮길 때와 사대부가의 장례식 때도 썼다고 합니다. 고구려 때에는 장례식 때 북을 치고 풍악을 울렸다고 하는데 성리학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18년부터 추진해 온 경복궁 계조당 복원사업을 마무리하고 9월 20일부터 복원한 계조당 권역을 국민에게 공개했습니다. 계조당은 왕세자의 공간인 경복궁 동쪽에 자리 잡은 동궁(東宮) 권역의 일부로서, 세종대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맡았던 세자(문종)가 썼던 건물입니다. 특히, 신하가 왕세자에게 하례를 드리고 잔치를 여는 등 동궁 정당(正堂)의 기능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권위와 후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계조(繼照)’는 ‘계승해(繼) 비춰준다(照)’라는 의미로 왕위계승을 뜻합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0년경 헐어버렸습니다. 이번에 복원한 계조당 권역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본당, 의례에 필요한 월대, 주변부 행각(行閣, 건물 앞이나 좌우에 지은 긴 줄행랑)과 담장 그리고 외곽 담장부 봉의문입니다. 문화재청은 복원과정에서 다양한 고증자료를 수집하고 관계전문가의 검토를 거쳤으며, 목재ㆍ석재ㆍ기와 등도 문화유산 수리장인이 손수 제작ㆍ가공하는 등 전통재료와 기법을 충실히 적용하였습니다. 복원이 끝난 계조당 권역은 경복궁 관람객이라면 누구나 별도의 사전 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이야 상자와 가방을 주로 쓰지만 예전 사람들은 보자기를 일상적으로 썼는데 그 가운데 ‘조각보’는 예술 작품의 하나로 승화될 만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방향이나 마름모형처럼 정형화된 무늬는 궁중이나 지체 높은 사대부집에서 사용한 조각보에서 주로 나타나고, 일반 집에서는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옷감을 이용하다 보니 삐뚤삐뚤한 무늬로 이루어진 것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옷감 값이 비쌌기에 옷감 조각 하나도 버리기 아까웠을 테고 여인들이 직접 옷감을 짜는 일이 많다 보니 남은 옷감을 허투루 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자투리 옷감을 그냥 버리지 않고 만들어 낸 것이 조각보였으니, 자투리를 모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옛 여인들의 정성과 예술감각이야말로 대단했습니다. 이렇듯 조각난 옷감을 잇는 행위에는 복을 잇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사 가운데 포목점을 가장 천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옷감 장사처럼 옷감 찢는 직업은 복을 찢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장 돈을 아무리 잘 번다고 해도 포목장사의 끝이 좋지 않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옷을 만드느라 자르고 찢은 옷감, 곧 복을 다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호패(戶牌ㆍ號牌)는 조선시대 16살 이상의 남성들이 차고 다니던 신분증입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호패 재질도 달랐습니다. 2품 이상의 관리는 상아로 만든 아패(牙牌)를, 3품관 이하 관리는 뿔로 만든 각패(角牌)를, 그 이하의 양민은 나무패를 착용했습니다. 재질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도 달랐습니다. 차는 사람의 이름, 출생 연도, 만든 때, 관(官)이 찍은 낙인(烙印)은 공통 요소지만, 상아ㆍ각패에는 나무 호패에 있는 신분과 거주지 정보가 없고 대신 과거 합격 시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호패를 보면 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정보는 관직으로는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오르고 품계로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받은 18세기 고위 관료여서 상아 호패가 있지만, 젊었을 때 차고 다니던 나무 호패도 있지요. 나무 호패에 새겨진 것을 보면 이정보가 계유년(1693)에 태어났고 20살인 임진년(1712)에는 동부학당(東部學堂)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한성 5부 가운데 동부의 숭교방 1계 6통 4가에 사는 사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6세기 조선에서 벌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왜가 침략하여 조선과 명이 참전한 동아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 따위를 통해서 그 전쟁ᄋᆖᆯ 더듬어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는 그 책들 말고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관련된 여러 책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된 오희문(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은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동안 쓴 개인 일기지만,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함, 피난민의 삶, 군대 징발과 군량 조달, 양반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상 따위가 담겨있지요. 오희문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그의 아들 오윤겸이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그밖에 국립진주박물관에는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임진ㆍ정유재란과 병자호란에 관련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 이로(李魯)가 김성일의 활동을 중심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얼씨구나 절씨구야 돈 봐라 돈 봐라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 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돈 봐라” 이는 판소리 흥부가 가운데 <돈타령> 대목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흥보가 우선 배고픔을 면하려고 박을 타다가 돈이 쏟아지자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라며 정신 없이 반기고 있습니다. 흥부만이 아닙니다. 요즘도 날마다 신문에는 ‘돈, 돈, 돈’ 하며 돈 얘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돈 없으면 못살 세상이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고 한다는 요지경 세상입니다. 그런데 돈은 있으면 있을수록 더 많은 돈에 욕심냅니다. 재벌 그룹이 탈세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예를 종종 봅니다. 여기 <돈타령>에도 그런 대목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고 좋아 죽겠네. 일년 삼백육십일을 그저 꾸역꾸역 나오너라.”라고 소리합니다. 그러나 뒷부분을 보면 흥보는 돈 욕심만 부리지 않습니다. 흥보는 “부자라고 자세를 말고 가난타고 한을 마소. 엊그저께까지 박흥보가 문전걸식을 일삼터니 오늘날 부자가 되었으니 이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고구려(高句麗)라 하였고, 부여씨(夫餘氏)가 서남 지역을 차지하여 백제(百濟)라 하고, 박(朴)⋅석(昔)⋅김(金) 씨가 동남 지역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하였으니, 이것이 삼국(三國)이다.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펴냈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가 그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하고 발해(渤海)라 했으니,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한다. 마땅히 남북국(南北國)의 역사책이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펴내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는 영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쓴 책 《발해고(渤海考)》 서문 일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삼국시대를 잇는 역사로 통일신라시대가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유득공은 김씨가 남쪽을 차지하여 ‘신라(新羅)’라 했고 그 북쪽은 고구려 사람 대씨(대조영)가 차지하여 ‘발해(渤海)’라 하였으니 당연히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후 대 씨가 망하자, 대 씨가 차지했던 북쪽 땅은 여진족이 들어가고, 또는 거란족이 들어갔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날 어느 마을에 문자 쓰기를 몹시 좋아하는 선비가 살았다. 어느 날 처가에 가서 자는데 밤중에 범이 와서 장인을 물어 갔다. 집안에 사람이라고는 장모와 내외뿐인 터라, 어쩔 수 없이 선비가 지붕에 올라가 소리쳐 마을 사람을 불러 모았다. ‘원산대호가 근산 래하야 오지장인을 칙거 남산 식하니 지총지자는 지총 래하고 지창지자는 지창 래하소! 속래 속래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먼 산 큰 범이 와서 우리 장인을 앞산으로 물고 갔으니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들고 나오고 창을 가진 사람은 창을 들고 나오십시오! 어서요. 어서!> 뜻인즉 이렇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누가 총이며 창을 들고 뛰어나올 것인가?“ 윗글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과 우리말대학원장을 지낸 고 김수업 선생의 《우리말 사랑 이야기 “말꽃타령”》에 나오는 글입니다. 글깨나 배웠다고 어려운 한자말로 소리쳤는데, 아무도 뛰어오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하지요.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577년이 되는 한글날입니다. 그때 세종대왕은 한문에 능통하여 다른 글자가 필요 없었지만, 한문이란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백성사랑으로 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7째 절기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의 한로(寒露)입니다. 한로 무렵은 기온이 더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전에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므로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이때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고 쉬는 새참에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 맛은 농부들에게 있어 행복이며 또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 하는 것은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가을 들판에는 콤바인이 굉음을 울리며 논을 누비면서 타작과 동시에 나락을 가마니에 담아내고 있어 옛 정취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에 한가롭게 길가는 나그네도 볼 수가 없어 예전처럼 막걸리 한잔을 나누거나 논둑에 앉아서 새참 먹는 모습도 보기 어려워졌지요.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에 사람들은 시절음식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겼습니다. 추어탕은 조선후기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추두부탕(鰍豆腐湯)”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또 1924년에 이용기가 쓴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별추탕”란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가을에 누렇게 살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