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뜻밖에 유행의 괴질(怪疾)이 천리의 바다 밖에까지 넘어가 마을에서 마을로 전염되어 마치 불이 들판을 태우듯이 한 바람에 3읍(三邑)의 사망자가 거의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아! 이게 무슨 재앙이란 말인가? 예로부터 너희들의 고장은 남극성이 비쳐 사람들이 질병이 적다고 하는데, 이번 재앙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내가 덕이 없어 상서로운 기운을 이끌어 먼 곳까지 널리 감싸주지 못한 소치이므로, 두렵고 놀라워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이는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1822년) 10월 19일 기록으로 멀리 제주도에 돌림병이 돌아 세 읍에서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라는 소식을 듣고 임금이 탄식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연결되어 뭍의 돌림병이 순식간에 제주도에도 퍼지지만 그때는 쉽게 오가지 못하는 먼 섬이라 뭍의 돌림병에도 걱정이 없었는데도 한번 돌림병이 번지니 불이 들판을 태우듯 했다니 참으로 걷잡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돌림병이 번지면 벼슬아치들을 보내 여러 산천(山川)에 양재제(禳災祭, 재앙을 물리치려고 귀신에게 비는 제사)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883년 오늘(월 17일) 한국 첫 근대식 인쇄소 ‘박문국(博文局)’이 설립되었습니다. 특히 박문국은 신문ㆍ잡지의 편찬과 인쇄를 맡아보던 출판기관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산하기관인 동문학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려고 설치한 것입니다. 초대총재는 이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낸 민영목으로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1883년 10월 우리나라 첫 근대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했습니다. 《고종실록》에 "박문국을 설치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빚을 갚으려고 시골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폐단을 끼칠 뿐만 아니라 실효도 없으니 해당부서를 교섭아문(交涉衙門)에 넘겨 교섭아문으로 하여금 적당히 일을 처리하게 하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후 박문국은 문을 닫았는데 적자에 허덕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문국이 1888년 문을 닫긴 했으나 한국 인쇄역사에서 큰 분기점을 마련한 것은 사실입니다. 박문국에서 사용한 활자는 조선 시대에 걸쳐 두루 쓰이던 나무로 만든 목활자(木活字)가 아닌, 당시로서는 신식이었던 납으로 만든 연활자(鉛活字)를 썼습니다. 인쇄기는 발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주검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벗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박 의사의 아버지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일부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는데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었지요.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나라 밖에서 무기를 사서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독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문화재 가운데는 제121호 ‘번와장(翻瓦匠)’도 있습니다.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시공하는 장인을 뜻합니다. 지난 2008년 불타고 이후 5년이 지난 2013년 복원된 숭례문, 그 숭례문의 복원에는 여러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함께 고생했지만, 이 가운데 번와장 이근복 선생도 큰 몫을 했습니다. 우리 전통 건축에선 기와가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번와장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장인입니다. 한국 전통문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곡선의 아름다움인데, 특히 한국 건축의 중요한 요소인 기와지붕은 그 곡선미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지붕의 조형적 특징은 기와를 잇는 전통 번와기법과 그 기술을 가진 번와와공, 곧 번와장이 좌우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이며, 기와 덮는 일이 ‘번와(翻瓦)’라고 하므로 기와 덮는 장인을 ‘번와장’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덕에 각 시ㆍ도에 한옥마을과 같은 한옥촌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짓는 한옥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번와장이 찬여하지 않은 탓으로 지붕이 직선 모양으로 곧추서 일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의 나들이나 군대의 행진 때 연주하는 ‘대취타’에는 <나각(螺角)>이라는 악기도 있습니다. 이 나각은 길이가 40cm정도 되는 큰 소라의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취구(吹口, 나팔ㆍ피리 등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를 만들어 끼웁니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에 붉은 칠을 하여 치레하기도 하지요. <나각>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나(螺)’ 또는 ‘소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 의종 때 각종 의장을 갖는 행렬의 수레 뒤에 따르던 취라군(吹螺軍)이 이 악기를 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궁중 잔치와 군악에 사용되었고,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가운데 〈정대업(定大業)〉의 춤 일무(佾舞)에도 쓰였지요. 지금은 대취타(大吹打)에 쓰이고 있는데, 특히 또 다른 악기 ‘나발’과는 엇갈리며 번갈아 연주합니다. 이 악기는 뱃고동 소리를 닮은 낮은 외마디 소리를 낼 뿐이지만 웅장하고 우렁찬 지속음을 냅니다. 연주법은 나발과 같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김을 불어넣어 입술의 진동으로 ‘뿌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7월 23일 전라북도 남원에서는 남원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반대를 위한 시민역사 특강이 열렸습니다. 사실 우리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크게 환영할 일인데도 그걸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깜짝 놀랄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원이 고대 기문국이었다고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기문국이 한국 가야사의 지명이 아닌 일본 명치시기의 정한론자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인물들이 만든 “가야사=일본서기 임나사”라는 논리에 의한 것이라는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날 초청 강사로 나선 이덕일 순천향대 교수는 엄연히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통해 가야사를 정립하면 되는데 한국 사학계가 조선총독부 학자들의 정립해 놓은 대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내세워 가야 건국사를 부정하고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임나사로 주장하고 있는 현실을 크게 질타했습니다. 일본 우익의 정사 교과서 역할을 하며 항상 정한론의 동기로 작용한 《일본서기》 내용을 한국 학자들이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얘기지요. 특히 이날 한 남원 시민은 남원이 일본서기 임나의 기문국으로 해설된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이 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그 무서운 괴질이 경성에서도 발생되야 일면 경찰당국은 교통차단을 하고 위생당국에서는 괴질예방주의서를 인쇄하야 돌리고, 일반 인심이 흉흉한데 이에 대하야 의사 김용채 씨는 말하되 “요사히 괴질을 예방하기 위하야 약을 먹어 예방하는 데는 (가운데 줄임) 염산이라는 물약을 양약국에 가서 사서 백배 되는 물에 타서 식후에 하루 삼시로 먹으면 관계치 않을 것이요...” 위는 동아일보 1920년 8월 7일 기사의 일부입니다. 당시도 돌림병이 돌아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그 가운데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염산에 물 백배를 타서 마시라는 의사가 있었으니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도 예방주사를 맞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지라 3면 머리기사에는 “맹렬한 괴질군! 수(遂)히 경성에 쇄도 속히 주사하라! 속히 주사하라!”는 제목으로 예방주사 맞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만연으로 큰 혼란 속에 일본에서 열린 올림픽도 겨우겨우 끝을 냈고, “'코로나19 종식' 선언했던 중국서 확진자 급증.. 항공ㆍ철도망 차단”, “일본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100만 명 넘었다”, “美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복날의 마지막 말복(末伏)입니다. 올해는 초복과 중복이 열흘 만에 온 것과 달리 중복과 말복은 스무날(20일) 차이인데 이를 우리는 월복(越伏)이라고 합니다. 1614년 이수광이 펴낸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책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면 복날을 '양기에 눌려 음기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날'이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여름철은 '화(火)'의 기운, 가을철은 '금(金)'의 기운인데 가을의 '금‘ 기운이 땅으로 나오려다가 아직 '화'의 기운이 강렬하므로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초복, 중복, 말복'이라고 하지요. 또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복날을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기제복에서 ‘복(伏)’은 꺾는다는 뜻으로, 복날은 더위를 꺾는 날 곧, 더위를 피하는 피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장마가 끝나고 입추와 말복 무렵이 되면 날씨가 좋아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많아서 벼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평안도 연변(沿邊) 각 고을 구자(口子, 소규모 초소)의 적변을 정탐하는 사람은, 한 군데마다 열 명을 정원으로 하여, 평상시에는 2교대로 나누어 근무하고, 변고가 생기면 번을 합해서 운영합니다. (가운데, 줄임) 그 근무자 가운데 정탐꾼이 4백 9명인데...“ 이는 《세종실록》 28년(1446년) 1월 4일의 기록으로 여기서 말하는 정탐꾼 곧 체탐인(體探人)은 요즘 말로 하면 첩보원으로 조선 초 세종대왕 때 주로 활약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건국 초기 북방 영토를 확정 짓는 과정에서 고려 이래 현지의 토착세력이었던 여진족이 수시로 변경을 넘어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고, 이에 조선은 곳곳에 성과 목책을 쌓고 방어에 치중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체탐인(體探人)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거주지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다음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하곤 했지요. 또한 체탐인은 북방지역뿐만 아니라 왜인들이 드나들던 남해안에서도 활약했고, 대마도에 보내 체탐 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들 목숨을 걸고 활약했던 체탐꾼은 하루를 정탐하면 15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3년마다 50명 중 1명을 뽑아 6품 이하의 산관직 곧 정식 문관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왕 때 의방(醫方,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펴내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펴내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길이 잘 든 말)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 치료술을 엮은 책)를 내의원이 국(局)을 설치해 속히 찍어내게 한 다음 조정과 민가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위는 광해군일기[정초본] 32권, 광해 2년(1610년) 기록으로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동의보감》은 2009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고, 2015년에는 보물 제1085-1호에서 국보 제319-1호로 승격되었으며, 올해(2021년)에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주관하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과학기술사-3-2(2020)’로도 등록되었습니다. 책 제목의 ‘동의(東醫)’란 중국 남쪽과 북쪽의 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