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한 번째인 소서(小暑)입니다. 소서라는 말은 작은 더위를 뜻하지만 실은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인데다 장마철과 겹쳐서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때지요. 그런데 소서가 되어도 모내기를 하지 못했다면 많이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서 모는 지나가는 사람도 달려든다.", "7월 늦모는 원님도 말에서 내려 심어주고 간다.", "소서가 넘으면 새 각시도 모심는다."라는 속담 따위가 있을 정도지요. 하지만, 정상적으로 심었다면 이때쯤 피사리와 김매기를 해 주어야 하는데 이때는 더위가 한창이어서 논에서 김매기를 하는 농부들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하고, 긴긴 하루해 동안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지요.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 아래 논바닥에서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늘이지만 여간 고마운 게 아닙니다. 거기에 실바람 한 오라기만 지나가도 볼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지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소서에는 이웃을 위한 솔개그늘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소서 무렵에는 호박과 각종 푸성귀가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 이 돌은 좀 이상한데?” 주한 미군 그렉 보웬(Greg L. Bowen)은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군대에 입대하여 한국으로 왔습니다. 보웬은 어느 날 연인과 함께 경기도 연천 전곡리 한탄강 강가를 걷다가 예사롭지 않은 돌 몇 개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보웬은 이 돌들을 사진으로 찍어 구석기 시대의 세계적 권위자 프랑스의 보르드 교수에게 보냈고, 보르드 교수의 연락을 받은 서울대 박물관 연구자들이 현장에 나가 이 돌들이 구석기 시대 뗀석기 가운데 주먹도끼였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계 고고학계는 주먹도끼가 유럽과 아프리카에만 있고, 동아시아에는 없다는 고고학자 모비우스의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을 때였지요. 하지만 보웬의 발견으로 모비우스의 학설은 폐기되고, 세계 고고학 교과서는 새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세계 구석기 지도에 한국의 연천 전곡리가 표시되었고, 보웬은 역사적인 발견을 하게 된 사람이 되었지요. 주먹도끼를 쓰던 사람들은 곧선사람(호모 에렉투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돌을 깨뜨려 찍개를 만들어 쓰던 수준을 넘어 머릿속으로 미리 어떤 모양을 구상한 다음 만들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구름 사이로 학이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 스무 마리, 백 마리……. 구름을 뚫고 옥빛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꿈꾸던 하늘은 이렇게도 청초한 옥색이었단 말인가. 이 색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영원의 색이고 무아의 색이란 말인가. 세속 번뇌와 망상이 모두 사라진 서방정토(西方淨土)란 이렇게도 평화로운 곳인가.” 위는 《간송 전형필(이충열, 김영사)》에 나오는 글로 간송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말입니다. 뒤에 국보로 지정된 이 매병은 원래 전문도굴꾼 야마모토가 강화도 한 고분을 도굴하여 고려청자 흥정꾼 스즈끼에게 1천 원에 팔아넘긴 뒤 마에다 손에 왔을 때는 2만 원으로 뻥 튀겨져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은 흥정 한 번 없이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습니다. 당시 2만 원은 기와집 스무 채 값이었지요. 간송은 이 귀한 매병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걸 걱정했기에 한푼도 깎지 않고 거금을 주고 샀던 것입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배지름 24.5㎝, 밑지름 17㎝의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간송문화재단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매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3일 문화재청은 고려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했습니다. 국보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고려 후기의 유일한 금동약사불상이자 단아하고 정제된 당시 조각 경향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한국불교조각사 연구에 있어 중요하게 평가됐습니다. 이 불상은 고려 후기 불상조각 가운데 약사발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온화하고 자비로운 표정, 비례감이 알맞은 신체, 섬세한 옷 장식 표현 등 14세기 불상조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이때의 불상 가운데서도 뛰어난 예술적 조형성을 지닌 대표적인 작품으로 국보로 지정하기에 예술ㆍ역사ㆍ학술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발원문에는 1346년(고려 충목왕 2)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가 적혀 있어 고려 후기 불상의 기준 연대를 제시해주고 있지요. 가로 10미터가 조금 넘는 긴 발원문에는 1,117명에 달하는 시주자와 발원자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이는 고려 시대 단일 복장발원문으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 이름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발원문을 지은 백운(白雲) 스님은 세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째인 하지(夏至)입니다. 이때 해는 황도상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는데, 그 자리를 하지점(夏至點)이라 하지요. 한 해 가운데 해가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서 북반구의 땅 위는 해로부터 가장 많은 열을 받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쌓인 열기 때문에 하지 이후로는 기온이 올라가 몹시 더워집니다. 또 이때는 가뭄이 심하게 들기도 하고, 곧 장마가 닥쳐오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일손이 매우 바쁩니다. 누에치기, 메밀 씨앗 뿌리기, 감자 거두기, 고추밭 매기, 마늘 거두고 말리기, 보리 수확과 타작, 모내기, 늦콩 심기, 병충해 방재 따위는 물론 부쩍부쩍 크는 풀 뽑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남부지방에서는 단오를 전후하여 시작된 모심기가 하지 무렵이면 모두 끝나는데, 예전엔 이모작을 하는 남부 지역에서는 하지 ‘전 삼일, 후 삼일’이라 하여 모심기의 알맞을 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라는 속담도 있지요. 그런데 하지는 양기가 가장 성한 날이면서 이때부터 서서히 음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동지에 음기가 가장 높은 점이면서 서서히 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정조 개혁의 중심에 섰던 인물 번암 채제공의 초상을 보면 살짝곰보와 사팔뜨기 눈까지 숨기지 않고 그려 그가 못생긴 인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의 “죽기살기”라고 할 만큼 정확하게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 사실주의의 극치 덕분입니다. 번암은 그렇게 못생겼지만 28살에 사관인 예문관 한림(翰林)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뒤 죽기 한 해 전인 77살 때까지 은거한 7년을 빼고는 이조좌랑, 시헌부 지평, 한성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정말 큰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신임을 얻고 크게 탄핵을 받지 않은 까닭은 대부분 벼슬아치처럼 아부를 잘하거나 뇌물 공세 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청백리에 꼽힐 만큼 청렴했고, 사도세자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했을 만큼 올곧은 인물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임금이 세손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특히 정조가 야심 차게 추진한 화성(華城) 성역 공사에서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묘)의 공사를 총괄하는 총리사(摠理使)와 함께 수원 유수(留守)ㆍ장용외사(壯勇外使)ㆍ행궁 정리사(行宮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옥황상제가 금강산의 경치를 돌아보고 구룡연 기슭에 이르렀을 때, 구룡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고는 관(冠)을 벗어 놓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때 금강산을 지키는 산신령이 나타나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하는 것은 큰 죄다.’라고 말하고 옥황상제의 관을 가지고 사라졌다. 관을 빼앗긴 옥황상제는 세존봉 중턱에 맨머리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 이는 금강산에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얼마나 금강산이 절경이었으면 옥황상제마저 홀릴 정도였을까요? 그런데 그 금강산을 그림으로 가장 잘 그린 이는 겸재 정선이었습니다. 겸재의 그림 가운데는 금강산을 멀리서 한 폭에 다 넣고 그린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금강전도(金剛全圖)>가 있으며, 금강산으로 가는 고개 단발령에서 겨울 금강산을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도 있지요. 여기서 ‘단발(斷髮)’이라는 것은 머리를 깎는다는 뜻인데, 이 고개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금강산의 모습에 반해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서울옥션에서는 겸재가 그린 또 다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새집에 가서 잠이나 잘 잤느냐. 병풍을 보내니 몸조리 잘하고 밥에 나물을 넣어 먹어라. 섭섭 무료하기 가이없어 하노라.” 이는 현종임금이 사랑하는 고명딸 명안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입니다. 조선시대는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당시에는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궁궐 안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는 물론 임금까지 언문을 썼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많습니다. 특히 현종에게는 외아들 숙종과 명선ㆍ명혜ㆍ명안의 세 공주가 있었는데 명선ㆍ명혜 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비슷한 이름으로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와 다름)는 유달리 명안공주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예론 논쟁에 휩싸여 34살의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재위 15년 동안 정쟁으로 보내야 했던 현종은 시름 속의 나날 속에서도 명안공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고 이에 한글편지로 자신의 사랑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몹시 슬프고 애통스러워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예장(禮葬) 이외에 비단과 쌀ㆍ무명 등의 물건을 숙정공주의 예대로 시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학교에서 《해동가요(海東歌謠)》ㆍ《가곡원류(歌曲源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조집의 하나로 《청구영언(靑丘永言)》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 《청구영언》이 지난 4월 26일 보물로 지정되었지요.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까지 구비 전승된 모두 580수의 노랫말을 수록한 우리나라 첫 노래집(歌集, 시조집)으로, 청구(靑丘)는 우리나라, 영언(永言)은 노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청구영언》은 조선 후기 시인 김천택(金天澤)이 1728년 쓰고 펴낸 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의 친필인지는 비교자료가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청구영언》은 조선인들이 선호했던 곡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틀을 짜고, 작가가 분명한 작품은 작가별로, 작자미상의 작품은 주제별로 분류한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작가는 신분에 따라 구분해 시대순으로 수록하였지요. 이러한 《청구영언》의 체제는 이후 가곡집 편찬의 기준이 되어 약 200종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펴낼 정도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매우 지대합니다. 《청구영언》은 우리나라 첫 노래집이자, 2010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오른 ‘가곡(歌曲)’의 원천이 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1월 30일 한국방송(KBS) <TV쇼 진품명품> 프로그램에는 “청자 상감포도동자문 매병”이 출품되었습니다. 이 매병은 청자인데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화한 학자로서 높이 평가된 고유섭 선생은 “청자는 고려인의 푸른 꽃”이라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청자의 비색(翡色)은 가마를 막고 산소공급을 차단하면서 생긴 환원염 불꽃으로 구워야 나오는 비취색으로, 철분 함량이 높으면 어두운 녹색, 낮으면 맑은 비취색이 된다고 하지요. 이날 출품된 청자는 전성기 때인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에 빚은 것으로 추정되며, 어깨가 풍만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몸체가 좁아지는 모양새의 매병입니다. 그리고 이 매병은 몸체 전면에 덩굴진 포도잎과 열매를 백색 상감기법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특히 이 매병에는 포도 줄기를 잡고 동자가 노는 모양이 흑색상감으로 새겨져 있는데 포도와 동자 무늬가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은 대접이나 주전자에는 종종 보이는데 매병에는 아주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옛 미술품에서 나오는 동자는 자손이 끊이지 않고 번성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에 있는 같은 이름의 매병은 보물 제286호로 지정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