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斗束奇峯枕海雲 말 통 묶은 듯 기이한 봉오리, 바다 구름 베고 누었는데 夕霏斜照半山曛 석양 비끼는 저녁 비에 산 반쪽에 어둑어둑하네 聽傳道服頻來往 도복 입은 신선이 자주 왕래한다고 전해 들었는데 應候眞仙李使君 응단 진짜 신선인 나 이(李) 목사에게 안부 묻겠지 위는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 1653~1733) 목사가 쓴 <산방산을 바라보며(望山房)>란 한시(漢詩)입니다. 이형상은 제주에 목사로 부임하여 곳곳을 돌아보고 남긴 중요한 순간들을 1703년 화공(畫工) 김남길(金南吉)에게 그리게 하여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화첩을 남겼습니다(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이 <탐라순력도>에는 귤림풍악(橘林風樂), 우도점마(牛島點馬), 정방탐승(正方探勝), 제주조점(濟州操點), 건포배은(巾浦拜恩) 등 곳곳을 돌아보는 그림 28쪽 포함 모두 43쪽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산방배작(山房盃酌)”이 눈에 띄는데 이 그림은 목사 일행이 산방굴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산방굴 뿐만이 아니라 송악산(松岳山)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즘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사람들 사이에 품격 논쟁이 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대통령후보에게만 한정될 얘기가 아니고 누구나 특히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일 것입니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어떤 연예인이 “만나서 너무 좋아요”라고 했는데 방송 편집자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자막은 “만나서 정말 좋아요”로 바꿔놓았습니다. 연예인들이 ‘너무’를 마구 써대니 심지어는 아나운서들까지도 오염이 됐고, 인터넷에서 “너무”를 검색해보면 “뮤직뱅크 첫 1위 너무 감사드려요", "화초가 너무 이뻐요", ”“너무 좋았던 영광의 하루” 같은 예문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너무"의 풀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 문장들은 “뮤직뱅크 첫 1위 지나치게 감사드려요", "화초가 지나치게 이뻐요", ”지나치게 좋았던 영광의 하루”가 되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너무’는 "너무 어렵다" "너무 비싸다."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할 때 쓰는 것이고, "좋다, 예쁘다." 같은 말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말을 할 때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의 남대문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바꾼 이름이다. 숭례문의 ‘례’의 뜻은 ‘예의’라는 뜻이다. 일본은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를 당연히 낮춰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숭례문은 일본인들이 남대문으로 강제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성문의 이름을 바꿔버린 것이다.” 한 블로그에 있는 글입니다. 사실일까요? 하지만 “남대문”이란 말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이는 《태조실록》 5년(1396) 9월 24일 치 기록입니다. 이로써 일제가 숭례문을 낮추기 위해 남대문이란 이름으로 고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 태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역대 임금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서 지내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뽑혔고, 2008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올랐습니다. 그 종묘제례에는 제향할 때 여러 사람이 줄을 지어서 추는 춤으로 ‘일무(佾舞)’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무’라는 것은 열을 지어서 춤을 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일무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로 나뉘는데 먼저 ‘문무’는 붉은 홍주의(紅周衣)를 입으며, 왼손에 단소와 같이 구멍을 만들어 소리를 내는 악기 약(籥)을 들고 오른손에는 구멍이 세개 있는, 세로로 부는 악기 적(翟)을 들고 추는데 이 물건은 말과 글을 상징하는 것으로, 문덕(文德, 학문의 덕)을 기리는 춤입니다. 이와 달리 ‘무무’는 역시 홍주의를 입고, 왼손에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은도끼나 칼을 드는데 이는 적을 격퇴하고 방어한다는 것을 상징하며 무덕(武德, 무인이 갖춘 덕망)을 기린 것이지요. 또 일무는 4가지로 나뉘는데 1줄에 8명씩 8줄로 64명이 추는 팔일무(八佾舞), 1줄에 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범은 흉탄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하늘의 벼슬)으로 멀리 갔네/ 가련한 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늙은 앉은뱅이)/ 여섯 해 동안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이 시는 심산 김창숙 (1879~1962) 선생이 병상에서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며 쓴 시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5)이 단행되자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으로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시작으로 1960년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운동사 중심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 명의 뜻을 모아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해방이 되기까지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뛰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독립, 통일, 민주화 운동을 통틀어 심산 김창숙 선생을 따를 만한 이가 없다는 평을 받을 만큼 불굴의 정신으로 일관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두 아들을 바치고 선생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앉은뱅이가 되어 누울 집 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95년 전 오늘(8월 25일)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문학가로 꼽히며, 단편소설 <벙어리 삼룡이>를 쓴 나도향(羅稻香, 1902~1926)이 세상을 뜬 날입니다. 그의 대표작 <벙어리 삼룡이>는 1925년 '여명(黎明)' 창간호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은 1인칭 서술자 ‘나’가 등장, 15년 전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액자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신분주의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벙어리라는 결정적 아픔을 지닌 삼룡이가 상전 아씨에게 연모의 정을 품으면서 어쩔 수 없이 반항으로 전환되는 갈등 이야기입니다. 초기의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여 인간의 진실한 애정과 그것이 주는 인간 구원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나운규 감독이 1929년에 영화화했고 1964년에는 신상옥 감독이 원작을 바탕으로 영화화했지요. 나도향은 이상화, 현진건, 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 활동을 했으며, 《백조》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환희>,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 등을 발표합니다. 또 19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7월 8일 문화재청은 경복궁 동궁의 남쪽 지역에서 현대 정화조와 비슷한 시설을 갖춘 대형 화장실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복궁 화장실은 왕세자가 거처했던 동궁과 관련된 하급 벼슬아치와 궁녀, 궁궐을 지키는 군인들이 주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문헌자료에 따르면 화장실의 규모는 4∼5칸인데, 한 번에 많게는 10명이 썼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에 발굴된 화장실의 구조는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좁고 긴 네모꼴 석조로 된 구덩이 형태로 정화시설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入水口)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出水口) 2개가 있습니다. 유입된 물은 화장실에 있는 분변과 섞이면서 분변의 발효를 빠르게 하고 부피를 줄여 바닥에 가라앉히는 기능을 하였고 분변에 섞여 있는 오수는 변에서 분리되어 정화수와 함께 출수구를 통해 궁궐 밖으로 배출되었지요. 이렇게 발효된 분뇨는 악취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독소가 빠져서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 구조는 현대식 정화조 구조와 비슷하다고 하지요. 한국생활악취연구소 이장훈 소장에 따르면 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구국(琉球國, 류쿠국)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가깝다. 어떤 사람은 맑은 날이면 한라산에 올라 유구의 산빛을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렇게까지 가깝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 정남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달리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없는 땅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래하는 일이 없다가 고려말 창왕(昌王) 원년(1389년)에 이르러 경상도 원수 박위에게 대마도를 공격하게 하자 유구의 중산왕 찰도가 소식을 듣고 신하 옥지를 보내 표문을 올리고 신하를 자칭하였다.” 위는 조선의 실학자 정동유가 조선의 역사문화와 자연환경, 풍속과 언어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고증하고 분석하여 백과사전처럼 엮은 책 《주영편(晝永編)》에 나오는 유구국 곧 지금의 오키나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때 유구국 신하는 왜구의 노략질로 붙잡혀갔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유황, 소목(蘇木, 한약재), 후추, 갑옷 등을 바쳤습니다. 유구국 곧 류큐왕국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류큐 제도 일대에 있던 나라입니다. 13~14세기에 류큐 제도 일대에 형성되었던 지역 세력들이 15세기 초 통일 류큐왕조를 세우면서 독립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명나라, 조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14번째인 처서(處暑)입니다.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부르는데 낱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처서 때는 여름 동안 습기에 눅눅해진 옷이나 책을 아직 남아있는 따가운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쬘 폭ㆍ포, :쬘 쇄)’를 합니다. 또 극성을 부리던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는 속담처럼 해충들의 성화도 줄어듭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낭군의 애(창자)를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단장(斷腸), 곧 애를 끊는 톱 소리로 듣는다는 참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2003년 MBC-TV에서는 300여 년 전 조선의 한성부 좌포도청에서 ‘다모’로 일했던 여자, 채옥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다모(茶母)>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에서 배우 하지원은 주인공 채옥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쳐 호평을 받았지요. 여기서 ‘다모’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조선시대 궁중의 다방소속이 아닌 일반 관사(官司)에서 차와 술대접 등 잡일을 맡아 하던 관비(官婢)”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10월 20일 기사에 보면 “다모(茶母)는 원래 혜민국(惠民局)에 소속되어 있는 관비(官婢)다. 다달이 치르는 성적이 나쁜 여의(女醫)에게 혜민국 다모를 하도록 했는데, 뒤에 포도청 등에 소속되어 여성 범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라고 설명해놓았습니다. 사실 관리들이 모두 남자였던 포도청에서 여성 범죄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때 다모는 이에 적절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전하는 포도청 다모 채용 조건을 보면 키가 5척(척은 1m의 1/3)을 넘고 쌀 다섯 말을 번쩍 드는 힘과 막걸리 세 말을 단숨에 마시는 담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