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좌탑은 네 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큰 자리를 얹어놓는다. 관사 안에 지나다니는 길 사이에 두고, 관리들이 쉴 때 썼다. 와탑은 3면으로 난간이 세워져 있으며, 비단 보료가 깔리고 큰 자리가 놓여 있다. 단지 임금과 높은 벼슬아치와 관련한 의식이 있거나, 중국 사진을 접대할 때만 사용한다.” 중국 송(宋)나라 관리로 고려 인종(仁宗) 원년(1123)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이렇게 좌탑(坐榻)과 와탑(臥榻) 곧 평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평상(平床)은 솔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고 바둑을 둘 때 또는 낮잠을 잘 때 쓰는 것으로 대청이나 누(樓)마루에 놓여 있었지요. 기다란 각목(角木)이 일정 간격으로 벌어져 있어 통풍이 잘되므로 여름철에 제격입니다. 두 짝이 쌍으로 된 평상은 올라서는 곳에 난간이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조선 전기 방랑의 천재 시인이면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산중에 열 가지 경치를 말했는데, 그 가운데는 평상 위에서 글 읽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윤두서(尹斗緖)가 그린〈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인데 이후 8월 15일에 말복이 들어 있어 아직 복지경(伏地境) 곧 불볕더위가 한창일 때지요. 그런데 우리 겨레는 왜 입추 뒤에 말복 그리고 처서가 오게 했을까요?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조금씩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하는 것입니다. “불볕더위가 이 같은데 성 쌓는 곳에서 감독하고 일하는 많은 사람이 끙끙대고 헐떡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밤낮으로 떠오르는 일념을 잠시도 놓을 수 없다. 이러한데 어떻게 밥맛이 달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생각한다고 해서 속이 타는 자의 가슴을 축여 주고 더위 먹은 자의 열을 식혀 주는 데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따로 한 처방을 연구해 내어 새로 약을 지어 내려보내니, 나누어 주어서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알 또는 반 알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도록 하라” 위는 《정조실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는 3․1만세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곧 폭탄을 던지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총으로 사살하는 일회적 효과가 크게 주요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이는 102년 전인 1920년 오늘(8월 3일)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과 평남경찰부 등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 애국지사가 한 말입니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한 안 지사는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7~8월 무렵 미국의원시찰단의 방한을 계기로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하였지요. 이에 따라 결사대 제2대에 파견된 안 지사는 폭탄을 숨겨 평양으로 잠입한 것입니다. 이 폭탄 투척의 거사를 이끈 안경신 지사는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평양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부는 안경신 지사에게 1962년 건국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부터 우리 겨레는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마실 때 소반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소반의 쓰임새에 따른 종류를 보면 임금 수라상을 비롯하여 궁궐에서 쓰던 상을 ‘궐반’이라 하고. 잔치할 때 쓰는 큰상으로 개화기 이후 만들었던 ‘교자상’도 있지요. 또 돌을 맞는 아이를 위해 차리는 상 곧 ‘돌상’이 있는데 이를 ‘백완반(百琓盤)’이라고도 합니다. 그 밖에 점쟁이가 점을 칠 때 필요한 기구인 방울, 살, 동전 등을 올려놓고 쓰는 ‘점상’이 있으며, 머리에 이었을 때 구멍이 나 있어 앞을 내다볼 수 있으며, 다리는 어깨 위에 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고상(풍혈반)’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혼인예식 때 쓰는 ‘합환주상’도 있지요. 전통혼례 때 신랑ㆍ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의식을 합근례라 합니다. 이때 쓰는 술잔은 작은 박을 쪼갠 ‘합환주잔’인데 이 잔에 술을 담았을 때 쏟아지지 않게 하려고 작은 소반 위에 잔을 걸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상이 바로 ‘합환주상’이지요. 구멍이 두 개인 ‘합환주상’과 달리 그저 구멍이 하나 뚫린 것은 ‘잔상’이라고 합니다. 겨레의 슬기로움이 돋보이는 ‘합환주상’ 참 재미난 상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24절기 열한 번째인 소서(小暑)는 7월 7일, 열두 번째인 대서(大暑)는 7월 23일이었습니다. 또 잡절인 초복은 7월 16일, 중복은 어제 7월 26일로 모두 7월에 들어 있어 한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입니다. 대서는 우리말로 하면 ‘큰더위’가 되는데 장마와 겹치는 이때는 습도가 무척 높아 푹푹 찌는 ‘가마솥더위’가 되며, 장마가 끝나면 불볕더위가 됩니다. 요즘 사람들이야 에어컨은 물론 얼음조끼 등 기능성 옷들도 있지만, 옛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여름나기를 했을까요? 물론 모시적삼을 기본으로 입었어도 땀이 줄줄 흐르면 적삼이 젖어 감당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입었던 것이 “등등거리”죠. 이 등등거리는 소매가 없어 “등배자(藤褙子)”라고도 부르는데 등나무 줄기를 가늘게 쪼개서 얼기설기 배자 모양으로 엮어 만든 것으로 여름철 모시적삼 밑에 받쳐입었습니다. 등등거리를 입으면 땀이 흘러도 옷이 살갗에 직접 닿지 않아 적삼에 배지 않고, 등등거리가 공간을 확보해주기에 공기가 통하여 시원합니다. 이 등등거리는 등나무 가지로 만든 팔에 차는 ‘등토시’와 함께 선비들의 여름나기에 꼭 있어야 할 옷이었지요. 등등거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불 아니 땔지라도 절로 익는 솥과 / 여무죽 아니 먹여도 크고 살져 한 걷는 말과 / 길쌈 잘하는 여기첩과 술 샘는 주전자와, 양부로 낫는 감은 암소 / 평생에 이 다섯 가지를 두량이면 부러울 것이 없어라." 이는 전통가곡의 하나인 남창가곡 '소용'의 노랫말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불을 안 때도 저절로 익는 솥, 여물을 먹이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이 찌고 잘 걷는 말과 길쌈 잘하는 여자 기생첩과 술이 샘처럼 솟아나는 주전자와 양볶이(소의 밥통을 볶아 만든 음식)를 먹을 수 있는 검은 암소, 평생, 이 다섯 가지를 가진다면 부러워할 것이 없겠구나!"란 뜻이지요. 지난 7월 7일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로 이동규(李東圭) 명창을 인정하였습니다. ‘가곡’은 현악기와 관악기로 편성된 실내악 규모의 반주에 맞추어 시조시(時調詩)를 노래로 부르는 성악곡으로, 남창가곡과 여창가곡으로 구분되어 전승됩니다. 이번에 남창가곡 기ㆍ예능 보유자로 인정된 이동규 명창은 1958년 무렵부터 가곡을 배워 60년 이상 해당 분야에 종사하였고, 1982년 조교에 뽑힌 이래 ‘가곡’ 전승교육사로서 종목의 전승 활성화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은 장마철이어서 비가 억수로 올 때가 잦습니다. 그런데 내리는 비에도 사연을 간직한 경우가 있습니다. 명절인 유두날(음력 6월 15일)에 비가 오면 ‘유두물’이라고 하는데 이 유두물이 오면 연사흘 내리 내린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녀자들의 바깥나들이가 안되던 시절에 특별히 나들이를 허락받은 날임에도 비가 내리면 나들이를 하지 못해 그 한이 서려 사흘 동안이나 내린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특정한 날에 내리는 비에는 태종우도 있습니다. ‘태종우(太宗雨)’는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이 고통받자 태종임금이 내가 죽어 하늘에 빌어 비가 오게 하리라고 유언하면서 죽었는데 죽은 그날 비가 내렸음은 물론 그 뒤 해마다 그날 곧 음력 5월 10일이 되면 태종우가 내렸다고 하지요. 또 ‘살창우(殺昌雨)’는 광해군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된 영창대군을 강화부사가 방에 가두고 불을 펄펄 때서 죽였는데 방바닥에서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필사의 몸부림을 치다 죽었기에 그 한으로 서럽게 죽은 영창대군의 눈물이 비가 되어 음력 2월 9일 앞뒤로 내리는 비를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내리는 ’광해우(光海雨)‘도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7월 1일 한국양금협회(대표 윤은화) 주최의 ‘2022 한국양금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때 윤은화 작곡의 ‘은하’를 양금으로 연주하는데 양금에 거문고, 피리와 대아쟁이 더해져 음악은 정말 풍성해졌습니다. 특히 대아쟁이 함께 하면서 우주의 공허함', '별들의 대화'는 물론 '우주 속에 하나 되는 우리'를 잘 표현했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여기서 우리에게 선보인 ‘대아쟁’은 가야금처럼 연주자의 앞쪽에 수평으로 뉘어 놓고 '활대'라는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활처럼 생긴 것을 써서 줄과 수직 방향으로 활을 비비거나, 가끔 손가락으로 가야금처럼 뜯기도 하면서 연주하는 아쟁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대아쟁은 정악 연주에 쓰는 것으로 원래 7현이던 것을 지금은 10~12현까지 확장해서 연주하고 있으며, 주로 8현인 소아쟁은 산조 연주할 때 쓰는 것으로 그 이름처럼 대아쟁에 견줘 크기도 작습니다. 특히 여기서 확인할 것은 아쟁의 '쟁(爭)'이라는 말은 일본의 '고토(爭)'나 중국의 '쟁(爭)'과 같은 글자를 쓰기는 하지만 일본, 중국의 쟁이 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겨서 연주하는 데 견줘 우리의 쟁은 가끔 손을 쓰기도 하지만, 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틀 뒤 토요일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초복(初伏)입니다. 초복은 삼복의 첫날인데 하지 뒤 셋째 경일*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입추 뒤 첫 경일을 말복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혹은 삼복이라 합니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립니다. 그러나 올해처럼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하지요. 삼복 기간은 한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로 이를 '삼복더위'라 하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 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습니다. 복중에는 더위를 피하려고 아이들과 부녀자들은 여름과일을 즐기고, 어른들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계곡에 가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면서 하루를 즐깁니다. 한편으로 바닷가에서는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고 복날에 고기 따위로 국을 끓여 먹는 복달임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 내기도 하였지요. 복날과 널리 퍼졌던 믿음으로는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하면 몸이 여윈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복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을 모르느냐? 네 할아비 덜렁쇠, 네 할미 허튼덕이, 네 아비 껄덕놈이, 네 어미 허천례, 다 모두 우리집 종이라. 병자 팔월 일에 과거 보러 서울 가고, 댁 사랑이 비었을 때 성질이 흉악한 네 아비놈이 가산 모두 도적하여 부지거처 도망하니 여러 해를 탐지하되, 종적 아직 모르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자세히 들어보니 너희 놈들 이곳에 있어 부자로 산다기로, 불원천리하고 나왔으니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고공살이(머슴살이)를 하라." 이는 판소리 흥보가 신재효본 사설 일부입니다. 여기서 놀부가 박을 타자 그 안에서 놀부의 옛 상전이 나와 하는 말이지요. 이 말에 따르면 놀부 아비가 상전의 집 재산을 모두 훔쳐 도망쳤습니다. 이때 놀부는 어쩔 수 없이 아비의 옛 상전에게 돈을 주어 돌려보낸 것으로 나왔지만, 도망 온 노비들은 자신을 잡으러 온 상전을 죽이기도 했지요. 2010년 방영된 드라마 <추노>도 이런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노비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중요한 재산으로 아비가 노비면 자식들도 모두 노비였는데 이런 신분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