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온봄날’ 곧 ‘춘분(春分)’으로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 곧 추분점(春分點)에 왔을 때입니다. 이날은 음양이 서로 반인 만큼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고 봅니다. 음양이 서로 반이란 더함도 덜 함도 없는 중용의 세계를 생각하게 되지요. 이렇게 24절기는 단순히 자연에 농사를 접목한 살림살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세계를 함께 생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춘분 무렵엔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둥지기 곧 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으려고 물꼬를 손질하지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이 있으며 옛말에 ‘춘분 즈음에 하루 논밭을 갈지 않으면 일 년 내내 배가 고프다.’ 하였습니다. 또 농사의 시작인 논이나 밭을 첫 번째 가는 애벌갈이 곧 초경(初耕)을 엄숙하게 행하여야만 한 해 동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지요. 음력 2월 중 춘분 무렵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2월 바람은 동짓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평화의 제단에 숭고한 희생으로서 바친 3천만의 망령에 의하여 가장 웅변으로 또 가장 통철히 오인(吾人)에게 가르쳐 준 것은 실로 민족자결주의란 오직 한마디다. 일본은 입을 모아 조선을 혹은 동족(同族)이라 말하고 동조(同祖)라 역설한다. (가운데 줄임) 우리 한국은 4천 3백 년이란 존엄한 역사가 있는데 일본은 한국에 뒤지기가 실로 3천여 년이다. 이를 봐도 조선민족은 야마토(大和)민족과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것을 췌언(贅言, 장황하게 말하다)할 필요도 없는데 합병 이래 이미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일본은 조선에 임(臨)함에 얼마나 참학(慘虐)과 무도(無道)를 극(極)하였던가.(뒷줄임)” -재 오사카 한국노동자 일동 대표 염상섭- 이는 소설가 염상섭(1897~1963)이 쓴 <독립선언서> 가운데 일부입니다. 염상섭은 1919년 3월 19일 저녁 7시 무렵 오사카 덴노지(天王寺) 공원에서 독립선언을 거행할 목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8시쯤 집회 장소에 모인 참가자 22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감옥생활을 해야 했지요.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에는 책을 놓고 읽거나 붓글씨를 쓰던 낮은 책상 서안(書案), 사방이 트여 있고 여러 단으로 된 사방탁자(四方卓子), 여러 권이 한 질로 된 책들을 정리, 보관하는 궤인 책궤(冊櫃), 안방의 보료 옆이나 창 밑에 두고 문서ㆍ편지ㆍ서류 같은 물건이나 일상용 기물들을 보관하는 가구인 문갑(文匣) 같은 소박한 가구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방에는 그것 말고도 선비들이 아끼던 ‘고비’ 곧 ‘편지꽂이’도 있었지요. 편지꽂이는 방이나 마루의 벽에 걸어놓고 편지나 간단한 종이말이 같은 것을 꽂아두는 실내용 세간을 말합니다. 고비는 가벼운 판자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만드는데 위아래를 길게 내리 걸도록 만들었지요. 또 두꺼운 종이로 주머니나 상자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종이띠를 멜빵 모양이나 X자형으로 벽에 붙여서 쓴 소박한 형태도 있었습니다. 등판과 앞판 사이를 6∼9㎝쯤 떼어 2∼3단 가로질러 놓음으로써 편지를 넣어두기에 알맞게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이 편지꽂이를 ‘考備’, 또는 ‘高飛’처럼 한자로 쓰기도 하지만 이는 소리를 빌려 쓴 취음일 따름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만영(李晩永)이 1798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해 ‘대화지’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물었고, 이에 자장이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잇닿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해 큰 우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인은 신라가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했다. 자장은 이에 ‘내가 귀국한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되묻자 신인은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자신의 큰아들이므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주변 아홉 나라가 복종하며, 왕실이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는 《삼국유사》에 있는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우게 된 연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진 기술을 가지고 있던 백제의 탑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해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1층부터 차례로 일본, 중국, 오월(吳越,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 탁라(托羅, 삼국시대 제주에 있던 나라), 응유(鷹遊, 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四友相須獨號君 네 친구가 서로 어울리되 너만을 임금이라 함은 中書總記古今文 고금의 문장을 너만으로 쓰기 때문이리라. 銳精隨世昇沈別 출세하고 낙오함도 네 힘에 달렸고 尖舌由人巧拙分 영리하고 우둔함도 네 혀끝에 달렸도다. 김삿갓이 지은 “붓”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예전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였던 붓은 보통 짐승 털로 만든 모필(毛筆)이었지만 그 밖에도 대나무로 만든 죽필(竹筆), 볏짚으로 만든 고필(藁筆), 닭 목의 털로 만드는 닭털붓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특히 가장 많이 쓰였던 것은 양털로 만든 양호필(羊毫筆)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 황서붓-黃鼠筆)이 유명했으며, 중국 문헌에서는 이 붓을 낭미필(狼尾筆)ㆍ서랑모필(鼠狼毛筆) 또는 성성모필(猩猩毛筆)이라 했는데, 일찍부터 중국에 수출되었지요. 그밖에 붓을 만드는 털로는 노루 앞가슴 털로 만들어 붓 가운데 가장 부드럽다는 장액필(獐腋筆)을 비롯하여 여우ㆍ토끼ㆍ이리ㆍ사슴ㆍ호랑이ㆍ산돼지ㆍ살쾡이ㆍ담비ㆍ개ㆍ말은 물론 쥐수염까지도 붓으로 쓰였습니다. 20여 년 전에만 해도 누구나 썼던 만년필ㆍ볼펜마저도 이젠 별로 쓰지 않고, 모든 걸 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겨레신문 2월 15일 치 신문 1면에는 대문짝만하게 대통령 후보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제목을 “펜데믹 이후 한국사회 ‘리셋의 시간’”이라고 달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을 좀 길더라도 ”지구촌 돌림병 대유행 이후 한국사회 ‘재시동의 시간”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책이건 신문이건 글을 쓰는 바탕은 쉽게 쓰기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써서는 안 되겠지요.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굳이 ’펜데믹‘, ’리셋‘이라는 말을 써야 유식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잘난 체와 다름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문화신문>에 들어오는 보도자료들을 보면 기자나 편집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말을 쓰는 곳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해당 보도자료를 쓴 곳에 전화를 걸어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을 생각해 봤느냐고 묻습니다. “’보도자료‘란 더 많은 이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일 텐데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쓴다면 짜증 내는 독자가 더 많지 않겠느냐?”라고 물으면 “죄송하다”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될 수 있으면 우리말로 바꿔쓰려고 애를 씁니다. 보도자료를 쓴 담당자에게 묻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한해 가운데 보름달이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은 예부터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비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라고 하여 이날은 남녀노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날 풍속에 가운데는 “용알뜨기”도 있습니다. 용알뜨기란 부인들이 닭이 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남들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데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이 물을 떠오는 것은 집안에 복을 가지고 오는 것이므로 복(福)물, 수복수(壽福水), 복물뜨기, 복물퍼오기, 용물뜨기, 새알뜨기라고도 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온다. 이것을 용알뜨기라 한다. 맨 먼저 물을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정월대보름 먹거리로는 오곡밥과 나물을 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관아에 딸려 말단의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이들)와 각 군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관청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1819년 김매순(金邁淳)이 한양(漢陽)의 세시기를 쓴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가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고위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고 하지요. ‘세함(歲啣)’이란 지금의 방명록(芳名錄) 또는 명함과 비슷합니다. 흰종이로 만든 책과 붓ㆍ벼루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을 적었습니다. 설이 되면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해야 해서 집을 비울 수 있는데 그사이 다른 세배객이 찾아오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까치설날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때 왕후가 한 스님과 내통하여 임금을 해치려 하였는데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인도로 이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쥐, 돼지, 용은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기리는 날이 있지만, 까치를 기릴 날이 없어 설 바로 전날을 까치를 기리려고 까치설이라 했다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옛날 섣달그믐을 작은설이라 하여 “아치설” 또는 “아찬설”이라 했는데 이 “아치”가 경기지방에서“까치”로 바뀌었다고도 합니다. 음력 22일 조금을 다도해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이라 하지만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그믐 전날, 어린이 수십 명을 모아서 붉은 옷과 두건을 씌워 궁중에 들여보내면 그믐날 새벽에 관상감에서 북과 피리를 갖추고 방상씨(方相氏, 탈을 쓰고 잡귀를 쫓는 사람)와 함께 쫓아내는 놀이 곧 <나례(儺禮), 나희(儺戱)>를 했습니다. 또 그믐날 이른 새벽에 처용(處容), 각귀(角鬼), 수성노인(壽星老人), 닭, 호랑이 등과 같은 그림을 궁궐문과 집 문에 붙여, 잡귀를 쫓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문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담배는 병진년(1616)부터 일본에서 건너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년(1621)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茶)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거래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위는 《인조실록》 16년(1638) 8월 4일 기록에 나온 담배 이야기입니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자신의 책 《임하필기(林下筆記)》의 “담배의 시말”이란 글에서도 담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글에서 이유원은 담배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는 글을 끝맺으면서 “나 역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다. 지금 담배를 입에 물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담배를 비판하지만, 애연가임을 고백하고 있지요. 그 당시 담배는 돈을 버는 작물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곡식을 심는 것보다 이문이 곱절이나 많이 생기기 때문에 좋은 경작지가 거지반 담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