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인천개항박물관 광복 71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만주 아리랑-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삶과 기억]은 그동안 사진작가 류은규가 모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와 생활사 자료 중, 만주 지역의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그 기반이 되어준 우리 이주민들의 삶을 살펴보고자 기획되었다. 1층은 이주와 항일운동에 관한 사진 자료를 정리하고, 조선족의 생활유물도 선보인다. 그간의 사진수집에 관해 류은규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념사진은 그 한 장으로는 별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대를 비추는 역사자료가 된다. 지금 남은 사진도 언제 어떻게 소멸할지 모른다. 나는 사진가로서 본능으로 사진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모은 사진이 5만 여장이 되었다.” 고 말한다. 2층은 류은규 작가가 중국 동북 일대를 돌면서 항일지사 후손들을 찍은 인물사진전이다. 이에 대해 작가 류은규는 “역사의 증언자를 촬영하는 포트레이트 작업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기록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작업이다. 특히 만주 지역의 항일운동가 유가족의 촬영은 90년대에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더는 찾지 못할 뻔 했다.”고 했다. 인천관동갤러리와 인천개항박물관 기획전시실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머니 품이여 드리워 베푼 사랑의 손길에 내 어엿이 자라 멍멍개 마루에서 낑낑 꿈꾸는 자정까지 일해도 고된줄 모르는 힘 그 따사로움 가슴에서 흘러나오다 - 조선족 시인 설인의 고향사람들 가운데 ‘나를 낳은 산천이여’ 일부- 그렇다. 조선족 시인은 입을 열면 고향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붓을 들면 그 고향산천이 먼저 종이에 내려앉는 정서를 태생적으로 지녔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조선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자 좀 특별한 존재이다. 대부분의 소수민족은 그 지역의 토착민인데 견주어 조선족은 주로 19세기 말부터 고향을 떠나 국경을 넘어 정착한 사람들로 광복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인정을 받은 신참 소수민족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이주가 주로 일제강점기에 이뤄졌고, 조국의 분단으로 인해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점에서 볼 때 조선족의 이주와 정착의 과정엔 수많은 고통과 비애, 눈물과 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 열리는 조선족을 주제로 하는 사진전은 사진가 류은규가 한중수교 후 얼마 되지 않은 1993년부터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 조선족을 촬영하고, 그들의 역사를 증명
[우리문화신문= 경북 상주 이윤옥 기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어리는 겨레라. 그러하므로 말은 겨레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겨레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겨레도 내리 나니라. 이러하므로 겨레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닦아지나니라” 이 말은 힌힌샘 주시경 선생의 보중 친목회보 창간호 1910년 6월호 ‘한겨레 말 ’가운데 일부이다. 오늘은 평생 겨레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신 주시경 선생의 102주기 날이다. 이 날을 맞아 경북 상주의 마음닦기 수련원인 푸른누리(대표 최한실)에서는 아침 8시 조촐한 추도식이 있었다. 오늘 모임은 겨레말 살리는 이들의 ‘배달 겨레말 여름 모임’을 위한 전국 모임이다. *주시경 (1876.12.22~1914.7.27) 선생은? 국어학자로서 우리말의 정리와 보급에 크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왕조가 문을 닫고,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중국에 대한주종관계를 청산하였다. 이는 다분히 일제가 중국의 간섭에서 벋어난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충동질도 있었지만, 어떻든 대한제국은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국으로 그것도 황제국으로 일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이름만 바꾼다고 기울어 노쇠하고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마음껏 누리던 지배층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나라를 살리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고,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많은 대신들은 백성도 속이고 황제도 속이면서 나라를 팔아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앞장섰다. 그렇게 하여 이들은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백작 등의 작위를 받고, 또 나라를 팔아먹은 공로로 전국 곳곳에 토지를 할양받았다. 이들이 다름 아닌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장관 대신등 친일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그렇게 받은 각종 작위와 관직 그리고 할양받은 토지들에서 나오는 재물로 자식들은 해외로 유학을 보내서 대를 이어 부와 명예와 권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항일독립 전쟁사(抗日獨立戰爭史)에 불멸의 공적을 남긴 오동진 장군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어찌 몇 줄의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오동진 장군님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혈맥으로 흐르던 서간도 일대, 무명 독립군들의 피와 땀이 서린 항일유적지에서 몇 마디 흠모의 외침만으로 선열들의 이름을 어찌 가벼이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굴종의 침묵 보다 더 부끄러운 망각으로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와 유적, 애국선열의 업적을 올바로 기리지 못한 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고, 아직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오늘에 백절불굴의 항일명장(抗日名將) 오동진 장군님을 우러러 백년편지를 올립니다. “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독립군(朝鮮獨立軍) 사령(司令)이 되었다.”1932년 3월 5일이었지요.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장군님이 왜놈 검사와 판사, 법정을 가득 메운 왜인 방청객들, 친일파들을 향해 일갈하신 말씀입니다. 교만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의 재판장을 압도한 장군님의 기개는 왜놈들의 간담을 송두리째 뭉개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일제의 간계와 교활함으로 재판정에 서게 되신 장군님께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일본군위안부 기억의터 조성추진위원회(대표 최영희)는 6월 29일 오전 10시30분, 남산 통감관저터에서 일본군위안부 기억의 터 기공식을 할 예정이다. 기공식은 일본군위안부 기억의터 조성추진위원회 최영희 대표의 여는 인사와 김복동 할머니 인사말씀, 임옥상 화백의 기억의 터 조감도 발표와 작품해설, 강병인캘리그라피 작가 겸 서예가의 붓글씨 퍼포먼스와 함께 시삽식 그리고 공동 상징의식을 할 계획이다. 지난해 11월, 보수진보를 떠나 여성계, 학계, 문화계, 정계, 독립운동가유족회 등이 함께 모여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추진위원회’(이하 ‘기억의 터 조성추진위’)를 결성하고 범국민 모금운동인 [디딤돌 쌓기]를 진행해왔다. 지금까지 개인, 단체 등 19,500여명이 디딤돌 쌓기에 동참했다. (6월 24일 기준) 기억의 터는 세계적 인권이슈로 부각되었음에도 기념공원(메모리얼 파크) 하나 없다는 비판에 대한 반성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외치신 할머니들께 기억하겠다는 약속으로 시작한 일이다. 한분이라도 더 살아계실 때 완성하고자 매진하고 있는 와중에 피해자 할머니 한분이 또 세상을 떠나셔서 안타까운 심정이다. 이제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 중국 훈춘(琿春)지역의 3.1운동지도자 황병길(黃炳吉)선생은 일반 국민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황병길 선생은 1885년 4월 15일(음) 함북 경원군 양하면에서 출생하여 20세까지 고향에서 생활했다. 소년시절에는 향학열이 높아 가세형편으로 서당에 다닐 수 없었으나 동료들의 글읽는 모습을 넘보면서, 또는 훈장이 읽는대로 따라 읽는 등으로 독학하였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1904년에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가 급격하게 그 세력을 팽창시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행,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노령 연추(露領 煙秋)지역으로 망명했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때를 전후하여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 연해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선생은 훈춘지역 일대에서 1908년 러일전쟁 전의 우리나라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인 이범윤(李範允)의 사포대(射砲隊)에 참가했으며 안중근 최재형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속해 두만강을 건너 회령, 온성, 경원지방을 여러차례 공략했다. 두만강건너 일군수비대 습격, 「훈춘(琿春)호랑이」라는 별명 얻어 특히 경원군 신아산(新阿山)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스위스 제네바 현지 시간으로 6월 17일, ‘일본군성노예제 생존자들의 정의 회복에 대한 권리’라는 주제로 열린 사이드이벤트에서 프란시스 라데이(Frances Raday) 유엔 여성차별실무그룹 의장은 한일 양국 정부 간의 일본군성노예제에 관한 합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라데이 의장은 한일 간 합의는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 지원단체들과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개별 배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은 피해자들의 진실, 정의, 배상 등의 권리를 부정한 것이라며 조목조목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한국정부는 피해자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기림비(평화비 소녀상)의 철거를 고려하기로 동의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한일 간 합의 내용은 유엔 인권기구의 강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고 언급하며 국제적 인권 기준을 따르기 위해서는 명확하고 공식적인 사죄, 당시 일본정부와 군대의 완전한 책임 인정과 적절한 배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공식적인 사죄는 국가적 정책인 ‘위안부’ 제도 하에서 피해 입은 아시아 전역의 모든 여성들에 대해 자행한 위반 행위를 인정하는 표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재발 방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32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한일 양국 정부의 일본군성노예제 합의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 중인 김복동할머니는 현지시간으로 6월 16일 오전 자이드 라아드 알 후세인(Zeid Ra'ad Al Hussein) 유엔인권최고대표를 만났다. 지난 해 6월 서울에서 한 차례 김복동할머니를 직접 면담한 바 있는 자이드 대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접 할머니를 맞으면서 오늘 제네바의 날씨가 좋지 않은데 할머니의 방문으로 빛이 비추고 있다며 크게 환대했다. 김복동할머니는 자이드 대표에게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를 위해 힘써주는 데 대해 고맙다고 인사하고 군인들의 성노예가 되어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아직 해방은 오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한일 정부 간의 합의는 피해자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수십 년간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단체들마저 배제한 합의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우리(피해자들)는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배상도 아닌 이유 없는 돈을 거부한다고 강조하고 진정으로 사죄를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러한 바람으로 오랫동안 싸워왔는데도 끝이 나지 않아 눈도 잘 보이지 않는데 91살의 나이를 무릅쓰고 하소연하고자 제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산 장산(萇山)의 마고당(麻姑堂) 답사기 마고선녀 마고할망 마고할미 등으로 불리우는 마고는 예부터 전해오는 한국인의 창세신이다. 마고에 대한 우리의 기록으로는 신라때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에 마고성과 함께 한민족의 창세신으로 나오고 있다. 부도지는 한민족의 고대사를 밝혀주는 아주 귀한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마고’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한민족이 살고 있는 많은 곳에 전해져 내려 왔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에 대한 신화와 역사들이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무속적이라며 미신취급을 받았고, 근세에는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많이 우리의 곁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한민족이 살았던 곳곳에는 아직도 그 흔적들이 많이 있고, 한국인의 창조신으로 등장하는 ‘마고’는 ‘마고할미’ ‘마고할망’ ‘마고선녀’ 등으로 나오고 있으며, 제주에는 그 이름이 변하여 ‘설문대할망’으로 나오기도 한다. 또 지리산에는 노고단이 있는데 이 또한 본래는 ‘마고단’이 이름이 변하여 된 것이다. 마고할망은 거대한 몸집에 엄청난 힘이 있는 여신으로 사람을 창조한 어머니의 신으로 중국의 창조여신 ‘서왕모’와도 비교가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