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우리 겨레는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마실 때 소반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소반의 쓰임새에 따른 종류를 보면 임금 수라상을 비롯하여 궁궐에서 쓰던 상을 ‘궐반’이라 하고. 잔치할 때 쓰는 큰상으로 개화기 이후 만들었던 ‘교자상’도 있지요. 또 돌을 맞는 아이를 위해 차리는 상 곧 ‘돌상’이 있는데 이를 ‘백완반(百琓盤)’이라고도 합니다. 그 밖에 점쟁이가 점을 칠 때 필요한 기구인 방울, 살, 동전 등을 올려놓고 쓰는 ‘점상’이 있으며, 머리에 이었을 때 구멍이 나 있어 앞을 내다볼 수 있으며, 다리는 어깨 위에 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고상(풍혈반)’도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혼인예식 때 쓰는 ‘합환주상’도 있지요. 전통혼례 때 신랑, 신부가 잔을 주고받는 의식을 합근례라 합니다. 이때 쓰는 술잔은 작은 박을 쪼갠 ‘합환주잔’인데 이 잔에 술을 담았을 때 쏟아지지 않게 하려고 작은 소반 위에 잔이 걸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놓은 상이 바로 ‘합환주상’이지요. 구멍이 두 개인 ‘합환주상’과 달리 그저 구멍이 하나 뚫린 것은 ‘잔상’이라고 합니다. 겨레의 슬기로움이 돋보이는 ‘합환주상’ 참 재미난 상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남북이 갈린 지 어언 70여 년. 분단 뒤 남녘으로 온 실향민들은 그들의 고향에 노래를 두고 왔습니다. 그렇게 두고 온 노래들이 어슴푸레 잊혀가고 있는데 유지숙 명창은 지난 2016년부터 어렵게 어렵게 그 노래들을 찾아 사람들에게 “북녘땅에 두고 온 노래”를 선물하고 있지요. 지난 2019년 12월 11일 그 세 번째 무대에서의 특별한 발견은 북녘의 상여소리입니다. 이제 남녘에서조차 상여소리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들만 겨우 보존될 뿐 상여 행렬이 없는 거리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는 노랫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더더욱 들을 수 없는 북녘의 상여소리를 찾아 헤맨 유지숙 명창은 남녘의 메나리조와 육자배기조 상여소리와는 음악적 특징이 다른 상여소리들을 선보였지요. 황해남도 배천, 황해북도 연산, 남포시 강서, 평안남도 둔덕 그리고 평양에서 불리던 상여소리들입니다. 유지숙 명창은 북녘에서 전해온 상여소리 악보를 오랫동안 익히고, 서도소리 선율이 묻어나도록 시김새를 얹혀 무대에 올렸지요. 그동안 애절한 남녘 상여소리에 익숙해 있던 청중들은 남녘 소리보다는 좀 더 씩씩하고 맑은 북녘의 상여소리에 빠져들어 숨을 죽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襪底江光緣浸天(말저강광연침천) 버선 밑 강 빛은 하늘에 잠겨 푸른데 昭陽芳艸放筇眠(소양방초방공면) 소양강 방초에 지팡이 놓아두고 자네 浮生不及長堤柳(부생불급장제류) 뜬 인생 긴 둑의 버들에 미치지 못하여 過盡東風未脫綿(과진동풍미탈면) 봄이 다 지나도록 솜옷을 벗지 못하네 이는 조선 말기의 한학자, 개화 사상가인 고환당(古懽堂) 강위(姜瑋)가 춘천 소양강의 버들 둑에서 길을 가던 도중 회포를 읊은 ‘수춘도중(壽春道中)’이란 한시입니다. 발아래 소양강 빛은 하늘에 잠겨 푸른데, 소양강가에 피어 있는 방초에 지팡이를 던져두고 잠을 청합니다. 부평초같이 둥둥 뜬 내 인생은 저 긴 둑에 자란 버들보다도 못한데, 봄이 다 지나가지만, 겨울에 입던 솜옷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곧 때를 만나지 못한 울분의 잠재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인(武人) 집안에서 태어난 강위(姜瑋)는 문인(文人)이기를 바랐지만, 신분적 한계 때문에 길이 막힘을 알고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 동안 배웠으며, 민노행이 죽은 뒤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도와 북청에 귀양간 추사 김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남녀 사이 자유스러운 접촉을 금하였던 관습 또는 제도를 “내외(內外)”라 했습니다. 내외의 기원은 유교 경전 《예기(禮記)》 내측편(內則篇)에 “예는 부부가 서로 삼가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니, 궁실을 지을 때 내외를 구별하여 남자는 밖에, 여자는 안에 거처하고, 궁문을 깊고 굳게 하여 남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여자는 임의로 나가지 않으며,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한 예론에서 비롯되었지요. 이 내외법에 따라 여성들은 바깥나들이를 쉽게 할 수도 없었지만, 꼭 나들이해야 할 때는 내외용 쓰개를 써야만 했고, 가마를 타거나, 귀신을 쫓는 나례(綵棚儺禮)와 같은 거리행사 구경을 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용 쓰개의 종류를 보면 얇은 검정 깁으로 만든 너울[羅兀], 치마와 같은 것으로 끈이 달린 쓰개치마, 두루마기와 비슷한 형태로 겉감은 초록색, 안감은 자주색을 쓴 장옷, 방한을 겸한 내외용 쓰개 천의, 비나 볕을 피하기 위한 삿갓, 주로 기녀들이 바깥나들이 용으로 머리에 썼던 전모 따위가 있었습니다. 쓰개 가운데는 주로 장옷과 쓰개치마가 많이 쓰였는데 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오늘(1920년 6월 25일) 민족문화실현운동으로 세운 개벽사(開闢社)에서 천도교 월간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했습니다. 《개벽》이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의 어두운 세계는 끝나고 후천의 밝은 문명세계가 돌아온다.”라는 뜻의 ‘후천개벽’에서 따온 것입니다. 창간 취지는 “세계사상을 소개함으로써 민족자결주의를 고취하며, 천도교사상과 민족사상의 앙양, 사회개조와 과학문명 소개와 함께 정신적ㆍ경제적 개벽을 꾀하고자 함”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 《개벽》의 기사들을 보면 종교ㆍ사상은 물론 정치ㆍ경제ㆍㆍ역사ㆍ천문ㆍ지리ㆍ문학ㆍ미술ㆍ음악ㆍ기술ㆍ풍속ㆍ인물 등을 아우르는 종합지적인 성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개벽》은 창간호부터 큰 시련을 겪게 되는데 발간과 동시에 표지(호랑이 그림)와 ’금쌀악‘ㆍ’옥가루‘ 등 몇몇 기사가 문제가 되어 일제에게 전부 압수되고 말았지요. 이에 문제가 된 기사를 삭제하고 호외(號外)를 냈지만, 이것마저 압수되어 다시 임시호(臨時號)를 발행하였으며, 그 뒤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고,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를 끝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호곡장(好哭場)]” 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요동벌판 하늘과 땅 사이에 뚝 트인 경계를 보고 외친 말입니다. 연암은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사신단으로 가는 팔촌형 박명원을 따라 지금으로부터 241년 전인 1780년(정조 4)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서 시작해 요동,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관문)을 거쳐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인 열하에 이르는 6달 동안의 여정 속에 열하(熱河)의 문인들,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사귀며 그곳 문물제도를 보고 배운 것을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런데 《열하일기》를 현대어로 뒤쳐서(번역) 책을 펴낸이들은 한결같이 '세계 으뜸 여행기'라는 훈장을 달아주는데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행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전라남도 나주시 국립나주박물관에 가면 전체 높이 3.27m, 간석 높이 0.83m, 지대석 너비 1.44m 크기의 보물 제364호 나주 서성문 안 석등(石燈)이 있습니다. 이 석등은 본래 전라남도 나주읍 서문안에 있던 것을 1929년 경복궁으로 옮겨놓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건되어 보관되던 중 2017년 해체, 보존처리를 거쳐 고향인 국립나주박물관으로 돌아가 전시돼 있습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지요. 네모난 모양의 널찍한 바닥돌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아래받침돌은 8각이고 연꽃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둥모양의 중간받침은 8면으로 면마다 테를 둘러 공간을 만들고 그 중심 안에 한 줄씩의 문장을 새겼는데. 윗받침돌은 8각면에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조각했고, 화사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으로 창이 4개입니다. 지붕돌은 매우 장식적으로 8개 면마다 처마 끝에 짧은 막을 드리운 것처럼 세로줄무늬가 있고, 그 위로 막 피어오르는 형상의 꽃장식이 두툼하게 달려 있으며, 지붕돌 위로는 마치 지붕을 축소해 놓은 듯한 돌이 올려져 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15일 ‘막걸리 빚기’를 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번 지정 대상은 막걸리를 빚는 작업은 물론이고, 다양한 생업과 의례, 경조사 활동 등에서 나누는 전통 생활관습까지를 포괄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쌀 막걸리는 쌀을 깨끗이 씻어 고두밥을 지어 식힌 뒤, 누룩과 물을 넣고 여러 날 동안 발효시켜 체에 거르는 과정을 통해 빚지요. 막걸리의 ‘막’은 ‘바로 지금’, ‘바로 그때’와 ‘걸리’는 ‘거르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순우리말일 뿐만 아니라 이름 자체에서도 술을 만드는 방식과 그 특징이 드러나 있습니 막걸리는 멥쌀, 찹쌀, 보리쌀 등 곡류로 빚기 때문에 삼국 시대 이전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막걸리는 물과 쌀, 누룩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요.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농사꾼들 사이에서는 “같은 품삯을 받더라도 새참으로 나오는 막걸리가 맛있는 집으로 일하러 간다.”라고 할 정도로 농번기에는 농민의 땀과 갈증을 해소하는 농주(農酒)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도롱이 접사리며 삿갓은 몇 벌인고 모찌기는 자네 하소 모심기는 내가 함세 들깨 모 담뱃 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 가지 모 고추 모는 아기 딸이 하려니와 맨드라미 봉선화는 내 사천 너무 마라 아기 어멈 방아 찧어 들 바라지 점심 하소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 위는 조선 헌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가운데 5월령 일부로 이 음력 오월 망종ㆍ하지 무렵 농촌 정경을 맛깔스럽게 묘사했습니다. “모찌기는 자네 하소 모심기는 내가 함세 / 들깨 모 담뱃 모는 머슴아이 맡아 내고”라며 모내기에 바쁜 모습을 그려내고,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능을 두소”라며 맛있는 점심이야기를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의 열째 “하지”입니다. 이 무렵 해가 가장 북쪽에 있는데, 그 위치를 하지점(夏至點)이라 합니다.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 14시간 35분이나 되지요. 한해 가운데 해가 가장 오래 떠 있어서 지구 북반구의 땅은 해의 열을 가장 많이 받아 이때부터 날이 몹시 더워집니다. 그런데 하지는 양기가 가장 성한 날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젯밤 KBS 뉴스에는 “쿠팡 이천물류센터서 큰불, 소방관 1명 중상ㆍ1명 고립”이라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인력 360여 명과 장비 120여 대가 대거 투입됐지만, 불길은 오히려 건물 전체로 계속 번지고 있다는 소식도 이어졌지요. 그런데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이날 점심때 크게 불이 나 경시서(京市署, 시전을 관리했던 관아) 및 북쪽의 행랑 1백 16간과 인가 2,170채가 불에 탔으며, 인명 피해는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인데, 어린아이와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처참한 기록이 보입니다. 이에 세종임금은 종루 옆에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고 집과 집 사이에 방화담을 쌓았으며, 초가지붕은 기와지붕으로 고친 것은 물론, 곳곳에 우물을 파서 방화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넉 달 뒤엔 금화도감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으로 고쳤는데, 이후 성종 12년에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뜻의 ’멸화군(滅火軍)‘이란 상근소방대원이 있었는데 정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