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조선인 최초로 중국 신해혁명에 가담해 나라안팎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던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1872~1936) 선생의 평전이 그의 고향 충북 옥천에서 발행됐다. 20일 옥천문화원과 김규흥기념사업회 등으로 구성된 편찬위원회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담은 평전을 펴내고 오는 21일 출판기념회를 연다고 밝혔다. 1872년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난 그는 1906년 현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명(진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한인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했으며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김복(金復)'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나라밖 항일운동가들의 외교활동과 무장 투쟁에 필요한 자금을 댔다. 이는 나라밖 독립운동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며 향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911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해 혁명정부의 도독부 참의 겸 육군 소장에 임명돼 중국 내 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의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박용만과 함께 베이징에서 흥화실업은행을 세워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며 항일독립운동의 든든한 축으로 활동했다. 이후 1936년 향년 65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위원장 이종찬)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인근 옛 서대문구의회 청사 부지에 건립 예정인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설계공모 당선작을 뽑았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설계공모 당선작은 <유선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의 ‘시작되는 터, 역사를 기억하는 표석이 되다’라는 작품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진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을 표현한 것이다. 주요 디자인 개념을 살펴보면, 건물을 드러내기 보다는 주변의 역사적 상징성을 조화롭게 받아들이고 단순함을 통해 역사를 숙독하는 표석이 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중앙광장은 전 층을 관통하도록 하여 빛을 통해 하늘광장과 닿게 하였으며,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건축물이 하나의 거대한 광장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총사업비 473억원을 투입하여 연면적 8,774㎡,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세워질 예정이며, 당선작을 토대로 ’19년 실시설계를 거쳐 2021년 8월까지 공사를 끝낼 계획이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학생독립운동 참여자 발굴 위해 ‘항일학생운동 참여 학교 학적(제적)부’ 전수 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수조사가 실시된 배경은 ‘일제강점기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퇴학을 당한 경우’가 새로운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전수조사 대상은 국가보훈처에서 남한지역 166개 학교[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학교 명단(광주시교육청, 2006) 참조]에 대하여 학교변천, 보관 실태 등을 자체 조사한 결과 국가기록원 또는 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55개 학교이다. 보훈처는 먼저 국가기록원에 항일학생운동 당시 학적부가 남아있는 22개 학교를 먼저 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이후 학교 자체에 보관하고 있는 33개 학교를 순서로 직접 전수 조사할 예정이다. 국가기록원에 학적부가 남아있는 22개 학교 중 2018년 11월말 현재 확인된 것은 독립운동 관련 처벌자는 400여명이고, 이 중 85명은 퇴학 처분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학적(제적)부에는 31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동맹휴학 등 구체적인 처벌사유와 징계내용이 분명히 기재되어 학생 개개인의 항일 독립운동 참여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30일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본군 고위관료 처단 계획을 실행하려다 붙잡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옥중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미상~1945. 8. 14.) 선생을 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라고 밝혔다.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한학을 공부하다 10세 되던 해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연길현 2도구로 이주했고, 봉밀구(峰密溝) 필산촌(畢山村)을 거쳐 용정촌으로 가 동흥중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다. 재차 화룡현으로 이주한 뒤 19세 되던 해 이모부인 이종익이 있는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서 생활하던 선생은 1930년경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영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홍콩과 광둥지방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했다. 중국정부는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국제연맹은 릿튼(Lytto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조사단은 이듬해인 1932년 5월 26일부터 다롄(大連)에 오게 되었다. 김구는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어제 2일(일요일) 오후 3시, 서울중앙보훈병원에 8달 2주일째 입원중인 오희옥 지사님을 찾아뵈었다. 생존애국지사인 오희옥 지사님은 한 달 전인 11월 8일에 뵐 때 보다 한결 혈색이 좋아 보여 기뻤다. 손을 흔들어 반갑게 맞이할뿐더러 손을 잡아주는 손목에 힘도 제법 느껴졌다. “어머님께서 요새 조금 좋아지셨어요. 오늘은 보훈병원 안에 있는 주일 예배에도 다녀오셨습니다. 여전히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으시고 계시고 목을 괴롭히던 가래도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씩이나마 기력을 차리시고 있는 것은 모두 걱정해주시는 여러분들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오희옥 지사님의 아들인 김흥태 씨의 말이다. 어제 보훈병원 병문안은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최해련 (3학년), 박준영(2학년), 이지영(2학년) 학생들과 함께였다. 이들은 ‘미래뉴스실습2’라는 과목을 이번학기 수강하면서 내년에 3.1만세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얼마 전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가흥과 남경까지 직접 현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이들은 그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조명하지 않았던 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제 한 달 후면 2019년이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또한 선생께서 그렇게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지 102년이 되는 해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편지로라도 존경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은 선생께서 보여주신 고결하고 헌신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다시금 조망해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생께서 출생하신 충북 진천군 덕산면은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이 우러러 보는 선생의 고향이 저와 같다는 점에서 선생님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각별합니다.^^ 시골집을 찾을 때 마다 제 자식들에게 여기가 이상설 선생의 출생지라고 말해주면서 선생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이제 성인이 되었지만 그 때 찾았던 선생의 유허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진천을 이야기할 때 저는 선생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내세웁니다. 그것은 그만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처절한 선생의 노력과 국권피탈 이후 연해주 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행적을 널리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생께서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 날 만큼 학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외할머니(노순경 지사)는 유관순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되셨지만 아무도 노순경 외할머니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노순경 외할머니는 3.1만세운동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였던 관계로 당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교수였던 스코필드 박사가 노백린 장군의 딸인 노순경을 면회하러 서대문형무소에 갔던 것이지 유관순을 만나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외할머니가 8호 감방에 있던 이화학당의 유관순과 개성에서 활동한 어윤희, 정신여학교 이애주, 구세군 사관 부인인 임명애 등을 소개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석호필(스코필드의 한국이름):민족대표 34인》 책 83쪽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노순경 지사(1995. 대통령 표창)의 외손자인 김영준 (65살, 가족사랑 나라사랑 협동조합 상임이사) 상임이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기자는 지난 16일(금) 오전 11시,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북원로 1187-19)의 한적한 곳에 전시중인 “애국지사 노순경의 가족역사전시회”에 다녀왔다. 전시장은 인적이 드문 야산인데다가 제법 날씨가 쌀쌀하여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전시장을 안내한 김영준 상임이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 어머니(홍매영 지사)의 건국포장을 받아들고 효창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차리석 지사) 묘소에 어머니 건국포장을 놓고 큰절을 올리자니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동안 험난한 풍파에 시달려왔으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싹 풀린 기분입니다.” 이 말은 임시정부의 버팀목 동암 차리석 지사의 아드님인 차영조(75살) 선생이 한 말이다. 차영조 선생은 어제(18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어머니 홍매영(洪梅英) 지사의 건국포장을 받아든 소감을 그렇게 말했다. 지난 17일(토) 오전 11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잔디광장에서는 국가보훈처 주최로 제79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차영조 선생은 어머니 홍매영 지사의 건국포장을 유족 대표로 추서 받았다. 특히 이번 79회 순국선열의 날에는 홍매영 지사를 비롯하여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 안맥결 지사, 박열 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 지사, 기전여학교 4명의 여학생 등 여성 32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는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 을사늑약 현장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습니다. 우당 이회영이 뤼순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한 날, 그의 아내가 쓴 <서간도 시종기>를 읽습니다. 순국선열추모일에 찬 서리 걷어내면서 독립운동사를 읽습니다. ‘을씨년 (乙巳年‧을사년)스럽다’는 말이 태어난 날 그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함께 읽어 ‘을씨년스러움’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3ㆍ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총감독 서울시가 3ㆍ1만세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7일(토) 제3차 ‘서간도 시종기 낭독회’를 연다. ‘서간도 시종기’는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우당(友堂)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애국지사가 일제강점기 등 50여 년 동안 겪은 일들을 놀라운 기억력으로 집필한 회고록이다. 이번 ‘서간도 시종기 낭독회’는 17일(토) 낮 3시 반부터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 예정이며 지난 6월 이회영 선생의 옛 집터인 서울 YWCA에서 진행된 첫 번째 낭독회와 9월 우당기념관에서 진행 된 두 번째 낭독회에 이어 올해 세 번째다. 낭독회가 열리는 11월 17일은 1905년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님은 광복군 출신으로 이름은 황영식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황영석이라는 이름의 가짜 독립운동가가 아버님 대신 대통령표창장을 가로채는 바람에각고의 노력 끝에28년만인 1991년 4월 13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아 아버님 영전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좀 더 일찍 아버님 살아생전에 훈장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 지난 10월 28일 일요일 낮 2시,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황영식(본명 황차식, 1913-1969) 지사의 아드님인 황부일(63) 씨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황영식(1991년 애국장 추서)과 어머니 김봉식(1990년 애족장 추서) 지사는 부부 독립운동가로 황부일 씨는 당시 자료를 보여주면서가짜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것이 가짜 황영석이 가로챘던 대통령표창장입니다. (지금은 회수하여 황부일 씨에게 전달된 상태) 여기 보시면 1963년 8월 13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는 아버님(황영식)이 살아 계실 때 였는데 가짜가 표창장을 가로채는 바람에 아버님은 살아생전에 당신의 독립운동 공적을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196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