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철로 만든 부뚜막은 평안북도 운산군 용호동에 있는 고분 3기 가운데 ‘궁녀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네모난 돌방무덤에서 금동 봉황 모양 장식, 금동 투조(透彫, 투각) 금구(金具, 쇠붙이로 만든 손잡이, 문고리, 돌쩌귀, 곽쇠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조각, 토기 등과 함께 출토된 것입니다. 크기는 길이 67.2cm, 높이 29.1cm, 너비 23cm입니다. 긴 네모꼴 한쪽에 아궁이와 솥 구멍을 마련하고, 반대쪽에 굴뚝을 붙인 모양입니다. 아궁이와 굴뚝을 옆으로 나란히 배치한 점이 특징입니다. 아궁이는 네모난 모양이며, 주위에 돋을새김하였고 이마에는 불꽃모양 무늬가 있습니다. 휴대가 가능해 실제로 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부뚜막과 아궁이 여기서 부뚜막과 아궁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부뚜막은 아궁이 위 가마솥이 놓인 언저리에 흙과 돌을 쌓아 편평하게 만들어, 솥의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을 두거나 간단한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아궁이는 불을 때기 위하여 만든 구멍입니다. 따라서 부뚜막은 아궁이를 포함한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뚜막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만, 전남지역에서는 ‘부수막’, ‘부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뒷간을 맡는 귀신인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곳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하며, 젊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수광의《지봉유설》에는 매달 음력 6일, 16일, 26일에 측신이 뒷간을 지키는 날이므로 뒷간 출입을 삼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키려면 음식도 적게 먹어야 했겠지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뒷간에 갈 때는 헛기침한다고 하지요.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으면 길일 밤을 택해서 뒷간에 불을 켜고, 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중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인기 상품으로 팔리던 '일본제 무쇠냄비'가 최근 중국산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져 비난을 사고 있다. 상하이 공상당국(工商当局) 등에 의해 적발된 곳은 푸젠성 취안저우시(泉州市)에 있는 업자로 인터넷 가게 톈네코(Tmall) 등에서 일본 장인이 만들었다고 속인 무쇠냄비를 대량 판매해 큰 돈벌이를 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경제 인터넷" 등 복수의 중국 언론에 따르면 이 업자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일본 도야마현에 있는 "일본주식회사 이토제작소"라는 가짜 대리점과 광고 동영상도 찍었다. 동영상에서는 고용된 중국인 배우가 “이토 가문 4대째 주인으로 위장한 인물”로부터 무쇠 냄비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등을 소개했다. 가짜 장인은 “인생을 걸고 한 우물을 파고 있다.”라면서 이토 가문의 창업 정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평생을 무쇠냄비 만들기에 바쳤다고 하는 가짜 명인은 동영상에서 이토 가문의 초대 주인공 사진 한 장을 공개했는데 이 사진은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위조 업체는 중국에서 생산된 무쇠냄비 800위안(약 1만 3,370엔)짜리를 1,400위안(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시대 청화백자를 생각하면 우선 18세기 문인(文人)의 그림과 같이 잔잔하고 정갈한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푸른색의 가는 선으로 그린 사군자, 산수화, 동물화와 하얀 여백이 주는 느낌은 고요함과 편안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 그리고 특히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전혀 색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단정함보다는 화려함이 압도적입니다. <운현(雲峴)이란 글자가 쓰인 영지 넝쿨무늬 병>은 청화(靑畫) 물감만으로 세련된 화려함을 가장 잘 표현해낸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병의 형태는 19세기 들어서 새롭게 나타납니다. 목은 곧고 긴 편이며 몸체 아랫부분은 공처럼 둥급니다. 유색은 맑고 환하며 청화의 발색도 밝고 선명합니다. 몸 전체를 여백 없이 가득 채운 무늬는 영지버섯 넝쿨무늬입니다. 영지버섯은 자연에서 오래 사는 열 가지 사물인 십장생(十長生)의 하나입니다. 농담(濃淡)을 살려 영지 넝쿨을 정성껏 그렸고 입구 부분과 몸체 밑 부분에 돌린 여의두(如意頭)와 연판문대(蓮瓣文帶)까지 세부를 정성스럽게 묘사하고 청화 물감을 채워 넣었습니다. 굽바닥에는 청화로 ‘운현(雲峴)’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는데, 이로 보아 이 병이 운현궁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한국음악심포지엄> 제10~11회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각각 48명, 39명이 참가했다는 점, 판소리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민요와 같은 전통의 소리들이 미국 땅에 살고있는 한국인과 고국의 한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굵은 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 공연을 마치면서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와 UCLA 한국음악과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인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에는 실제로 마지막이 되어버린 2013년도 제12회 UCLA <한국음악심포지엄> 이야기다. 제12회 학술강연은 서한범 「전통음악의 시김새 기능」 , 김병혜 「판소리 심청가의 비교연구」, 김선정 「초등학교 전통음악 교육의 현황」, 조혜영 「심상건 가야금산조의 음악적 특징」, 김동석 「미 캘리포니아주의 한국음악 교육현황」 등, 각각의 특색있는 주제들이어서 참가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학술강연에서 한국음악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요소는 시김새라고 전제하면서 식음(飾音)→시금→시김으로 변화되었다는 점, 단순하게 장식음이나 잔가락, 간점이나 간음(間音) 등의 사이가락이지만, 넓게는 요성, 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가 진 후에도 얼마간은 빛이 남아 있어서 낮이 좀 더 길게 느껴집니다. 춘분 즈음엔 논밭에 뿌릴 씨앗을 골라 씨 뿌릴 준비를 서두르고, 천둥지기 곧 천수답(天水畓)에서는 귀한 물을 받으려고 물꼬를 손질하지요. '천하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시작하는 달'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은 이 음력 2월을 이르는 것으로, 바로 춘분을 앞뒤 때를 가리킵니다. 옛말에 ‘춘분 즈음에 하루 논밭을 갈지 않으면 한해 내내 배가 고프다.’ 하였습니다.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 대부분 사람은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지요. 그 흔적으로 “점심(點心)”이란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다과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 끼가 고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방에 무덤을 쓴다?” 제목 자체만 보면 엽기적(?)인 느낌을 준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방에다 무덤을 쓰는 것을 일본말로는 자택묘(自宅墓), 가묘(家墓), 택묘(宅墓)라고 한다. 물론 일본도 한국처럼 대부분은 무덤이 있어 거기에 조상을 모신다. 일본의 장례는 일왕(日王)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화장(火葬) 문화이기에 한국처럼 매장(埋葬) 문화는 없다. 따라서 무덤을 오하카(お墓)라고 하여 유골단지를 땅에 묻는 형식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유골단지를 묻는 형식일지라도 무덤은 존재한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무덤을 찾아가기도 여의치 않은데다가 자손들의 나이가 많다 보니 오하카마이리(墓参り, 성묘)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시가현(滋賀県)에서 유골단지를 140년째 만들고 있는 우라베석재공업(浦部石材工業)에서는 집안에 모실 수 있는 유골함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이 유골함은 올해 4대째인 사장 우라베 히로키(浦部弘紀, 49살)씨가 5년 전에 처음 고안해낸 야심작(?)이다. 쉽게 생각하면 유골함을 방에 모시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우라베 사장이 이런 고안을 하게 된 것은 “5년 전쯤부터 조상대대로 사용하던 무덤 관리가 안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 부석사에서는 폭 6미터, 길이 9미터가 넘는 비단에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펼쳐 건다면 아파트 4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이 그림은 당연히 법당 내부가 아닌 야외에 걸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법당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불교 의식을 위해 ‘괘불(掛佛)’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누각이나 중정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법당 앞에 걸린 불화를 보며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사과나무가 심어진 산길을 오르면 나지막한 터에 자리잡은 부석사를 만나게 됩니다. 무심한 듯 자리잡은 전각, 화려한 단청 없이 담담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량수전, 안양루 앞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산자락, 자연과 건축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신라시대 창건된 화엄종찰 부석사의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절집의 명성에 견줘 괘불이 그려진 1684년의 부석사에 관해 우리가 아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부석사에서 있었던 일들과 이 불화에 담긴 내용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이 들려줄 이야기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부석사에서 괘불을 그리기로 했을 때 석가모니불의 설법회를 담아야겠다는 것이 첫 번째 의도였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찌 분칠한 것을 참 자색이라 할 수 있으랴. 옛사람의 시에, ‘분ㆍ연지로 낯빛을 더럽힐까 봐 화장을 지우고서 임금을 뵈네’라고 하였으니, 앞으로는 간택 때에 분칠하지 말게 하여 그 참과 거짓을 가리라." 이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 11년(1505년) 1월 11치 기록입니다. 이는 단순히 분 화장만 금한 것이 아니라 참 얼굴을 알기 위하여 쓰지 못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는 자연히 연지화장도 포함된 것이지요. 이는 고종 3년(1866년)에 행해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에서도 보이는데, 초간택 시에 참여하는 처자들이 궁에 들어올 때는 분만 바르고 성적(成赤)은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성적은 이마를 4각이 되도록 족집게로 솜털을 뽑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는 색채화장을 뜻하지요. 그런데 여기 이마를 4각이 되도록 족집게로 솜털을 뽑는 것을 ‘진수아미(螓首蛾眉)’ 미용법이라고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등록문화재 제486호 <운낭자상>의 얼굴화장은 진수아미(螓首蛾眉) 미용법을 따랐습니다. 이 화장법은 고대 여인들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미용법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제5~7회 <한국전통음악심포지엄>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 관련 행사를 거듭할수록 3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이들에 의한 별도의 특별공연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마침 2007년 대회는 김동석이 남가주 서울대 총동창회장이 되어 합창단, 오케스트라와 함께 국악공연의 활성화를 통해 교포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는 이야기, UCLA 외에도 루가시 아카데미나 한국문화원 공연을 통해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주에는 무려 48명의 국악교수 및 실기인들이 참여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던 10회 대회 때의 이야기와 39명이 참가했던 제11회 대회 때의 이야기가 되겠다. 처음 6명이 참여하여 제1회 <한국전통음악심포지엄> 곧 UCLA 학술강연과 무대 공연을 조촐하게 가졌던 때에 견주면 양(量)적인 면에서는 대단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서한범, 윤명원, 이현주 등의 학술강연과 유지숙, 박복희의 경서도 소리, 그리고 거문고 산조의 오명석이 객석을 압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제10회 대회의 공연무대는 예능보유자 황용주 외 9명이 부르는 선소리 산타령으로 시작하였다. 벌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