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1920년대 초, 조선의 음악관련 현상이나 사회정황 등을 일본인 다나베의 기행문을 통해 소개해 보고 있는 중이다. 경성(京城)에 하나밖에 없던 조선악기 제조 판매점은 안동상점(安洞商店으로 종로 견지동에 있었고, 거문고는 35엔, 장구가 15엔이었다. 현재 시세는 장구 10대 값으로도 거문고 1대를 구입하기 어려운 실정인 점을 감안하면 가격의 대비가 다르다. 또한 단성사에 가서 승무, 검무, 창극 춘향전, 판소리 심청가, 그리고 평양의 수심가와 경기 잡가 여러곡을 들었는데, 특히 나이 어린 소녀가 승무를 잘 추어 갈채를 받았다는 점으로 당시에도 승무는 인기를 끌었다는 점, 성악에는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창극이 또한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밖에도 평양의 수심가라든가 경기잡가 여러 곡을 춤과 율동을 곁들여 부르도록 연출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노래도 일반 대중들이 좋아했던 분야로 보인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음악에 관한 내용과 악보가 실려 있는 《세조실록(世祖實錄)》 단성사에서 일반인들이 즐기는 춤이나 노래를 감상한 그가, 다음날에는 고관대작의 초대를 받아 상류층이 즐기는 음악과 춤을 접하기도 한다.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국악속풀이에서는 다나베가 쓴 《조선. 중국의 음악조사기행》 속에 나타난 당시의 음악관련 상황이나 사회 현상들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1921년 4월 1일, 다나베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부산 선창에 모여 있는 조선인의 옷이 모두 새하얗고 깨끗한 것을 보고 인상이 깊었다고 술회하였다. 조선인들이 왜 흰 옷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모르는 채 말이다. 당시 부산역에서 출발한 급행열차가 서울까지 10시간 정도 걸렸다는 점이나, 일본의 철도는 협궤(挾軌)인 반면 조선의 철도는 광궤이고 객차 내부도 널찍하며 흔들림도 적어 승차감이 좋았다는 이야기, 거리와 주택의 모습에서는 조선인들의 거리는 대체로 낮 동안만 활기가 있고, 밤이 되면 갑자기 적적해져 버린다는 점, 일본인 거리의 가옥은 지붕부터 건축양식이 직선적이고 딱딱한데 반하여 조선의 가옥은 작기는 하나 모두가 곡선미를 나타내고 있다는 이야기, 창덕궁 앞의 소옥(小屋) <단성사>에서 기생춤, 즉 장고춤을 보았는데 몸을 구불거리고 발놀림이 자연스러워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이 당시에는 영화관을 활동소옥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무대에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의 아악을 이해하고 그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상진행과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히사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상진행은 일본 궁내성 악부(樂府)의 책임자였고, 다나베는 부속 기관이었던 아악연습소의 강사였는데, 어느 날 그의 스승 상진행 악장으로부터 당시 조선의 아악부가 폐지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당시 총독부의 반응은 동물원과 아악부 중 동물원을 남기고 아악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아악부는 재정곤란을 이유로 악인들이 감축되고 있었다. 1917년 무렵에는 겨우 50여명이 남게 되었다가 폐지가 결정되면서 명완벽 등 6명의 노악사만이 남아 잔무를 처리 중에 있었다. 일본 악부의 책임자였던 상진행 악장 역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 다나베가 찍은 종묘등가악(宗廟登歌樂), 1921년 대 그렇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어온 아악부인가!! 저 멀리 신라시대부터 국가의 음악을 관장해 오던 음성서(音聲署)란 국가기관이 그 뒤 대악감이나 전악서 등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고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조선의 음악 현황을 살피러 나온 다나베 앞에서 아악부의 존폐를 걱정하며 연주하게 된 노악사들의 심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선조들에게 응원을 청하였을 것이고,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 연주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에 감동을 받은 다나베는 실로 세계의 보배인 이 음악을 동양의 음악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악사들의 혼신을 다한 연주도 연주이지만, 그보다도 종묘제례 음악속에 녹아있는 한민족의 혼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감동을 받은 다나베는 아악부의 청사를 확대 증축하는 문제, 악사들의 처우 개선문제, 아악의 보존을 당국에서 더욱 철저히 해야 된다고 청원을 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아악부에서는 계획대로 일반인들로부터 아악생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등, 등을 하였다. ▲ 다나베 히사오가 쓴 《조선, 중국음악조사기행》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침략국의 음악인이 식민지국가의 음악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니 쉽게 믿어지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의 아악을 직접 조
[한국문화신문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에서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의 이야기와 종헌례, 철변두, 송신례와 관련된 음악이야기를 하였다. 아헌례에 쓰이는 정대업의 음악적 분위기는 보태평과 달리, 씩씩하고 활달하며 강렬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란 점, 둘째 잔을 올리는 의미는 조상의 외적인 업적, 즉 무(武)와 공(功)을 칭송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 음악의 시작은 진고십통이라고 해서 큰 북을 10회 치는 것으로 시작하며 일무는 무무라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종헌례는 셋째잔을 올리는 의식이며 음악이나 춤은 아헌례와 동일하지만, 음악을 끝낼 때는 대금십차(大金十次), 즉 징을 10회 쳐서 음악을 끝낸다는 점, 종묘의 제례음악에서 시작은 북소리, 종료는 쇳소리를 내는 것은 고진퇴금(鼓進退金)으로 옛 전쟁터에서 북소리 울리거든 진격, 쇳소리 나면 퇴각이라는 전술에서 유래되었다는 점, 다음의 의식은 철변두와 송신(送神)례로 이어지며 음악은 공히 진찬이란 점, 특히 종묘제례악은 1920년대 초, 조선의 음악을 살피기 위해 나온 일본의 다나베 히사오(田邊常雄)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다나베가 찍어 책에 올린
[한국문화신문 = 사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종묘의 제사의식 중 영신례, 전폐례, 진찬, 초헌례까지의 음악과 춤 이야기를 하였다. 영신례는 신을 맞이하는 의식으로 <희문>을 헌가에서 연주하며 왼 손에 약(), 오른손에는 적(翟)을 들고 추는 문무(文舞)가 행해진다는 점, 두 번째 의식은 전폐(奠幣)례로 등가에서 <전폐희문>을 연주하며 역시 문무가 추어진다는 점, 전폐희문은 희문을 변주시켜 연주한다는 점, 세 번째 의식은 진찬의 예로 진찬이라는 악곡을 연주하지만 일무는 쉬게 된다는 점을 말했다. 또 종묘나 문묘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가 두 곳에 나누어져 있는데, 돌계단 위의 악대는 등가, 댓돌 아래 넓은 뜰에 위치한 악대는 헌가라는 점, 그리고 네 번째 의식이 바로 첫잔을 올리는 초헌례의 의식인데 여기서는 보태평 전곡을 반복하여 연주하게 되며 춤은 문무가 이어진다는 점, 제사를 지낼 때 초헌, 아헌, 종헌 등 세잔을 올리는데, 그 중에서도 첫째잔의 의미는 조상의 내면세계, 즉 문(文)과 덕(德)을 칭송하는 의미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 종묘제례에서 일무를 추고 있다. 이번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에서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의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세조이후 종묘제례에 연주되고 있는 보태평 11곡의 이름, 임진왜란으로 인해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 전쟁은 인명의 손실이나 재산의 피해, 주권의 침해가 막대하지만 이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의 공백, 예술의 퇴영을 가져오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인조임금 때 다시 종묘에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으나 그 규모는 매우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는 이야기, 실례로 성종 때의 헌가악사는 70여명이었으나 그 절반도 못되는 23명뿐이었으며, 특히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와 같은 향악기들이 빠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보태평과 정대업이 종묘의 제사음악으로 채택된 이래, 오늘날까지 그 음악의 전승과정은 충실한 편이라는 이야기, 역사성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나 그 위에 예술성을 인정한다면 이 음악의 가치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국가는 1964년 12월, 종묘제례악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였고, 이 음악의 예능보유자로 성경린 외 19명을 인정한 바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종묘제례악에서 편경을 연주하는 모습 이번 주에는 종묘제례의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조의 역대 임금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종묘에서 이분들을 위한 제례를 할 대 연주하는 음악의 총칭이 종묘제례악이고, 실제로 연주되고 있는 악곡의 이름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이야기, 보태평은 첫잔, 정대업은 둘째잔과 셋째잔을 올릴 때 연주된다는 이야기, 종묘제례악은 관현타악기들의 합주음악이면서 성악과 의식무를 포함하고 있어서 악가무의 종합연출이란 이야기를 했다. 또 보태평과 정대업은 세종17년(1435)에 지어졌으나 그 뒤 세조시대에 와서 개작을 한 후, 종묘의 제례음악으로 채택이 되었다는 이야기, 고쳐진 음악은 세종 때에 비하여 음계가 높아졌다는 점, 악곡의 수를 줄였다다는 점, 악곡의 길이를 원래의 악곡보다 짧게 줄였다는 점, 악장가사의 자구를 줄인 점 등이지만, 가사의 원 뜻은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 종묘제례악으로 채용이 된 후, 선조임금까지는 충실하게 쓰였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참고로 세조이후 종묘제례에 연주되고 있는 보태평 11곡의 이름은 1, 희문(熙文) 2,기명(基命) 3, 귀인(歸仁) 4, 형가(亨嘉) 5, 집녕(輯寧) 6, 융화(隆化) 7, 현미(顯美) 8, 용광정명(龍光貞明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음악의 범주에 포함되는 기악, 성악, 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음악의 개념은 악기로 연주하는 기악만이 아니라 시나 사를 노래하는 성악, 무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개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였다. 기악과 성악, 춤 등이 각기 독립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지만, 원래는 한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라는 이야기도 하였고, 가야금 악사 우륵선생이 신라의 3제자에게 그의 음악을 전해 주면서 한 사람은 악기, 또 한사람은 노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춤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전통은 조선조 이후,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왕가 시절의 아악부나 국립국악원의 국악사 양성과정에서도 기악 전공자들에게 성악과 춤을 가르쳐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러한 배경은 악의 개념이 악, 가, 무 일체라는 점을 확인하며 생활 속에서 함께 익혀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대한민국의 무형문화재 제1호가 바로 <종묘제례악>인데, 바로 이 음악이 기악, 성악, 춤 등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음악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악에 대하여 개략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종묘제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산조음악의 악보화문제, 즉 산조를 위시하여 판소리나 시나위, 무악과 같은 음악은 악보가 필요 없다는 무용론(無用論)과 유용론(有用論)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산조음악처럼 유동성이 심한 음과 미묘한 음정의 표기나 음색, 또는 농현의 모양을 악보화 할 수 없다는 무용론의 주장은 자칫 자유분방하고 역동성(力動性)이 생명인 산조음악이 악보로 인해 고착될 위험이 크다는 점을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은 악보라는 매체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 그러므로 유용론의 주장처럼 악보의 장점을 살리면서 악보가 주는 폐단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야기, 산조는 12현 가야금으로 타야 제대로 된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 18현, 25현 등의 개량가야금은 기존의 12현 가야금과는 전혀 다른 악기임으로 전공의 세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산조음악에 있어서 장단의 비중은 곧 산조음악 그 자체라 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부터는 음악의 개념 속에 기악, 성악, 춤이 포함되어 왔다는 이야기, 나아가 전통춤과 반주음악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도록 한다. 노래와 반주음악, 또는 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