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왕실에서 쓰던 도장으로는 국새와 어보가 있습니다. ‘국새는(國璽)’는 외교문서를 비롯한 각종 공공문서에 공적 목적으로 쓰였지요. 이와는 달리 ‘어보(御寶)’는 주로 존호(尊號,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과 시호(諡號,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칭송하여 임금이 품계를 높여주던 이름)를 올리는 등 궁중 의식을 치를 때 의례용으로 쓰던 도장입니다. 그런데 국새는 정변이나 전쟁 등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없어졌지만 어보는 종묘에 보관했기에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보와 국새의 모양과 크기, 재료는 거의 비슷합니다. 어보의 높이는 대략 10센티미터, 무게는 2~7킬로그램 정도며, 재료로는 금ㆍ은ㆍ옥 등이 쓰입니다. 대부분 사각 몸체에 거북이나 용 모양의 손잡이에 끈이 달린 모습인데 거북 모양의 손잡이는 임금을 상징하고, 황제의 상징으로는 용이 쓰였습니다. 어보에 새긴 글자는 임금ㆍ왕비ㆍ세자ㆍ세자빈 등의 시호(추증한 이름)나 존호(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하여 올리던 이름), 휘호 등을 새겼는데 적게는 4자에서 많게는 100자가 넘는 것도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조선 왕실의 어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충청남도 부여에 가면 사적 제135호 ‘부여 궁남지(宮南池)’가 있습니다. 백제의 별궁 연못이며,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궁남지라 부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20여 리나 되는 긴 물길을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물길과 물가ㆍ연못 속의 섬이 어떤 모양으로 꾸며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못의 가운데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기와 등이 출토되었지요. 연못의 규모 또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입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했다고 하는데,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리지요. 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 있는 것은 물론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종실(宗室) 원흥수(原興守) 이후(李煦)가 별감(別監) 김세명(金世鳴)을 만났는데, 김세명이 이후가 답례 절을 하지 않는다며 욕을 하므로, 후가 화를 내며 그의 입에다 오물을 집어넣고서 마구 때렸습니다. 그 뒤 김세명이 패거리 20여 명을 데리고 이후의 집에 갑자기 뛰어 들어가 이후를 끌어내다 묶어 놓고 마구 때렸습니다. 이후의 형 이경(李炅)이 격고(擊鼓, 임금이 나들이할 때, 억울한 일을 상소하기 위하여 북을 치는 일)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별감 등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몰아서 쫓아내고 뺨을 때려 피가 났으며, 사모(紗帽)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습니다.” 위 내용은 《숙종실록》 38년(1712) 10월 20일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김세명은 액정서별감(掖庭署別監) 곧 궁궐 안에서 왕실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궐내 각 문의 문단속, 궐내 각종 행사 준비, 시설물관리, 청소ㆍ정돈 따위의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고, 이후는 임금의 친족 곧 종친입니다. 액정서별감이 감히 종친을 두드려 팬 사건이지요. 물론 김세명은 처벌받았지만 이런 사건이 조선시대 내내 벌어집니다. 《순조실록》 16년 6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나들이할 때 바지저고리 위에 겉옷을 걸치는데 이 겉옷으로 많이 입던 것에는 두루마기를 비롯하여, 도포와 중치막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기, 도포, 중치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두루마기’는 소매가 좁고 직령교임식(直領交袵式) 곧 깃은 곧고 섶은 겹치도록 옷을 여미는 방식이며, 양옆 겨드랑이에 무(옷감을 덧대 것)를 달고, 길이는 발목에서 20~25cm 정도 올라옵니다. 또 도포는 깃이 곧고 소매폭이 넓으며, 옷 뒷면에 옷자락이 하나 더 붙어 있어 터진 곳을 가려주며, 품도 넓으며 길이도 길어서 발목까지 미칩니다. 여기에 도포는 특이하게 세조대(細絛帶)라 하여 가느다란 띠를 대는데 대의 끝에 술을 달고 품위에 따라 색깔을 다르게 하였습니다. 도포는 조선 중기 이후 많이 입었는데, 관리들도 관청에 나아갈 때를 빼고 사사로이 입는 겉옷이었습니다. 중치막은 도포와 달리 양옆 겨드랑이 부분의 무가 없이 트여 있어 활동하기 편할 뿐만 아니라 소매 너비가 넓어 널리 입었던 옷입니다. 그 밖에 유학자가 평상복으로 입던 겉옷으로 백세포(白細布, 빛깔이 하햔 모시)로 만들며 깃ㆍ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은 우리가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공연장도 많고 시디플레이어를 통해 듣기도 하고, 더더구나 요즘은 USB 등을 써서 컴퓨터로 즐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예전엔 음악 듣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오면 판소리가 유행하는데 이때는 명창을 불러와서 들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1860년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통해서 축음기라는 것이 들어와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축음기(蓄音機)는 말 그대로 “소리를 쌓아두는 기계”인데 이를 처음 본 조선 관리는 이 축음기를 “귀신소리 나는 기계”라고 했다 하지요. 명창 박춘재는 우리나라에 축음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고종 황제 앞에서 축음기에 소리를 녹음해 즉석에서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미국의 빅터레코드사로 건너가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였지요. 그 뒤 1930년대 이후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자 덩달아 축음기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축음기는 회사원이 몇 달 치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었기에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 하였지요. 그래서 축음기를 가진 총각에게는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유한 사람 외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남지방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맥이 끊겼던 ‘호미씻이’와 비슷한 ‘꽹말타기’라는 민속놀이가 있었습니다. 이 꽹말타기는 ‘징, 장구, 북, 꽹과리’ 외에 ‘딩각’을 더해 ‘오물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딩각’은 나무로 길게 만든 나팔 모양인데 울산광역시의 반구대 암각화에도 ‘딩각’을 의 형태로 보이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 딩각은 선사시대부터 쓰였던 악기라고 짐작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민속놀이인 꽹말타기가 사라지면서 ‘딩각’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또 경상북도 상주에는 콩나물을 삶아 콩가루에 버무려 만든 ‘콩나물히찝’이란 음식이 있는데 그것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군사정권 시절 사투리를 쓰면 안 되는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돼 점차 사투리가 사라졌습니다. 다른 나라 음식과 문화가 물밀듯 들어오는 것과 함께 군사정권과 산업화 속에서 미신이라고 치부되고 표준말 정책에 떠밀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겨레와 함께했던 많은 민속놀이나 음식 그리고 사투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판소리’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판소리’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잔치입니다. 판소리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추임새’도 잘헌다, 아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음식을 얹어 나르거나 방에 놓고 식탁으로 쓰는 상(床)의 종류를 소반(小盤)이라고 합니다. 소반에는 다리 모양새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뉩니다. 다리가 하나뿐인 상은 “외다리 소반[獨脚盤, 單脚盤]”이라 하고, 다리가 셋인 것은 “삼각반(三脚盤)”이라 하며, 다리 모양이 개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개다리소반[狗足盤]”이라 합니다. 또 호랑이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호족반(虎足盤)”, 말의 발같이 조각한 것은 “마족반(馬足盤)”, 대나무 마디같이 조각한 것은 “죽절반(竹節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 관가로 출장 다니던 소반이 있습니다. 바로 공고상(公故床)이 그것인데 옛날 높은 벼슬아치가 궁중이나 관가에서 숙직할 때 집의 노비들이 이 상에 음식을 얹어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고 하지요. 지금처럼 구내식당이나 외식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번(番) 곧 숙직이나 당직을 할 때 자기 집에서 차려 내오던 밥상이라 하여 “번상(番床)”, 바람구멍을 냈다고 하여 “풍혈상(風穴床)”이라고도 합니다. 양옆에 손을 잡을 수 있도록 “亞(아)” 자나 “卍(만)” 자로 된 뚫새김(투각) 구멍이 있으며, 앞쪽에는 내다볼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기운차게 일어나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 고대처럼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하게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의 뜻있는 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 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신국민을 양성할만한 문화를 진흥할지어다.” 이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 자에 쓴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 일부입니다. 내용을 보면 국수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닌 우리 고유문화의 장점 위에 다른 문명의 우수한 것을 더하여 국민을 이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진정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 오자키가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옛사람들은 뒷간을 맡는 귀신인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곳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하며, 젊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수광의《지봉유설》에는 매달 음력 6일, 16일, 26일에 측신이 뒷간을 지키는 날이므로 뒷간 출입을 삼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키려면 음식도 적게 먹어야 했겠지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뒷간에 갈 때는 헛기침한다고 하지요.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으면 길일 밤을 택해서 뒷간에 불을 켜고,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쓰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 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지요. 경첩은 신라시대의 유물에서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목관장식, 금속제품, 목공품의 장식에 세련미를 더하여 생활전반에 널리 쓰였습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지요.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 이중병풍, 제비추리(아래쪽이 제비 꼬리 모양), 구름, 난초, 나비, 호리병, 박쥐 따위로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