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춘천 서면에 가면 〈붓 이야기 박물관〉이 있습니다. 장인 정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박물관이지요. 붓을 만들기 위해서는 100번 이상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연암 박지원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깁니다.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칼날을 만들되 끝이 대추 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 담갔다가 꺼낸다. 종횡무진 멋대로 치고 찌르되, 세모 창처럼 굽고, 작은 칼처럼 날카로우며, 긴 칼처럼 예리하고 가지창처럼 갈라졌으며, 살처럼 곧고 활처럼 팽팽해서, 이 병장기가 한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호질’에서 붓을 형상화한 글입니다. 붓은 결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붓의 힘은 칼보다 강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노예해방을 이끈 것은 북군의 총과 칼이기도 하지만 스토우 여사의 ‘엉클 톰스 캐빈’이라는 소설의 영향이 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체제공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깁니다. "붓아! 너를 잘 사용하면 천지 만물의 이치와 운명도 모두 묘사할 수 있지만, 너를 잘 쓰지 못하면 충신과 간신, 흑과 백이 모두 뒤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파원군 윤평이 숙신옹주를 친히 맞아 가니, 본국에서의 친영(親迎)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 3월 4일 세종 17년인 1435년 3월, 윤평과 숙신옹주가 혼인을 올렸다. 이 혼인은 무척 특별했다. 조선 왕실에서 친영례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처음으로 왕가의 혼인을 친영례로 치른 것이다. 친할 친(嚫), 맞을 영(迎)으로 된 말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와서 혼례를 치른 뒤 곧바로 시집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런 친영례는 명나라의 풍속이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랑이 혼례를 치른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지내는 ‘처가살이’ 전통이 강했다. 그래서 명나라에서는 줄곧 조선의 혼인 풍속을 문제 삼았고, 조선 왕실에서는 성리학에 따라 생활 예법을 중국식으로 바꾸며 친영례를 본격적으로 도입해 명나라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숙신옹주가 혼인을 올린 뒤에도 친영례는 한참 동안 일반화되지 않았다가, 무려 200년이 지난 17세기에 가서야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니까 17세기 때까지만 해도 ‘시집간’ 여인보다는 ‘장가간’ 남성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 책, 《옹주의 결혼식》은 조선 첫 친영례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한병철님의 《사물의 소멸》이라는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제 땅과 하늘이 아니라 구글 어스와 클라우드에 거주한다. 우리는 엄청난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다른 사람)와 마주치지 않는다. 우리는 탈사물화한 세계, 정보가 지배하는 유령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설파한 글입니다. 슬기말틀(스마트폰)은 절대적 기능을 하는 디지털 성물이 되어가고 있고 누리집마다 사람을 꼬드기는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우린 널려있는 주변의 정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세상을 살고 있고 먼 이야기들이 검색어를 통해 눈 앞에 펼쳐질 때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달아 놓은 댓글에 함몰되어 스스로 판단력을 내려놓고 암묵적 지지자가 되기도 합니다. 검색 단어 몇 개만으로 그 사람의 취향을 파악해 버린 빅데이터의 영향으로 같은 주제 같은 색깔의 데이터만 물어다 주는 디지털 편향인 세상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자기 아집을 더욱 공고히 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본인은 변고를 겪은 뒤 놀람과 걱정이 병이 되어 신하들을 이끌고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할 마음이 없습니다. 부득이 둘째 아들 혼(광해군)에게 국사를 섭정하고 영토를 보존하도록 명했고, 본인은 적에게 쫓겨 저희 땅에는 몸 둘 곳이 없으니 스스로 식구 몇 명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시 (황제에게) 아뢰어 실행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소방은 부모를 따르듯 대국을 받들고 있습니다. 자식이 위기에 처하면 부모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혹시 황제의 허락이 내려오지 않더라도 적의 예봉이 날로 닥쳐오면, 본인은 (압록)강을 건너 명(命)을 기다리겠습니다. 급히 처리해주기를 바랍니다. (김영진 《임진왜란》에서 재인용) 선조가 요동도사에게 보낸 자문(咨文, 조선의 대중국 외교 관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외교문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북상해오자 서울을 버리고 줄행랑을 놓은 선조는 평양도 위험해지자 다시 북으로 올라가 압록강 변 의주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대동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선조는 자기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들어갈 테니 제발 자신을 받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하늘재를 아세요?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아,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연결하는 고개인데, 거 왜 수안보에서 미륵불 있는 데로 해서 넘어가는 곳이요" 이렇게 말해 주면 "아, 거기요, 그게 이름이 하늘재입니까?"라며 비로소 어디인 줄 대충 파악하는 눈치다. 다시 묻는다. "하늘재를 올라가 보셨나요?" 이 질문을 들은 사람 열이면 열은 올라가 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사실 고향이 문경인 나도 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전에 도자기를 하는 도예가 차를 타고 문경 쪽에서 차로 올라가 충북 쪽에서 올라오는 길을 본 적이 있지만, 차로 간 만큼 올라갔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예전 주소로는 문경군 문경읍 관음리이고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용흥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쪽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로 올라가는 것인데 길옆에 띄엄띄엄 집도 있고 깨어진 돌탑도 있고 해서 옛길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걷는 고생이 없어서 고개를 오른다는 느낌이 약했기 때문인 듯, 가본 것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고개(峙)건 재(嶺)건 올라가는 길은 반드시 두 개 이상이 있을 터인즉 경북과 충북 사이에 놓인 이 하늘재도 올라가는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니, 궁중의 옛일부터 국가 제도, 다른 집 족보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한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서 질문하면 하나하나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혜경궁지문」, 《순조실록》, 1816년 1월 21일 / 20쪽 혜경궁 홍씨. 정조의 어머니이자 순조의 할머니인 그녀는 죽은 다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총명하다고 해서 ‘헌’, 늘 조심스러웠다고 해서 ‘경’이라는 글자를 썼다. 칠십 년 가까이 계속된 그녀의 궁중생활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런 살얼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열 살에 입궁한 혜경궁은 빨리 어른이 되었다. 1744년 가례를 올리고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약 18년 동안 이어진 불안한 혼인 생활,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 외척 척결에 따른 친정의 몰락, 그리고 마침내 손자 순조가 즉위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칠십 년 궁중생활이었다. 정병설 작가가 쓴 이 책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새벽 장거리 산행을 하기 위하여 세 시쯤 집을 나섭니다. 아무리 빨리 새벽을 맞아도 길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은 아직 꿈속에 헤맬 거로 생각하겠지만 언제나 세상은 나보다 빠릅니다. 도시에서는 새벽이슬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밤새 맺힌 이슬이 이른 아침의 햇살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은 아름다움입니다. 새벽이 살아있음을 이슬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슬은 밤새 뿌리가 흡수한 물이 밖으로 빠져나온 것입니다. 넘치기 전에 비우는 것이 좋습니다. 비움을 실천하지 못하면 욕심을 부리게 되고 결국 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이 들면서 기상 시간이 조금씩 앞당겨짐을 느낍니다. 새벽 시간이 좀 더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안온한 이불 속에서 실컷 게으름을 구가하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은 행복입니다. 새벽의 어둠은 한밤중의 어둠과 그 깊이가 다릅니다. 새벽은 밝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슴푸레한 사물이 점점 뚜렷하게 다가올 때의 환희를 생각합니다.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도연명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하루에 새벽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인생은 단품입니다. 영산홍 꽃떨기도 봄 한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강효백 교수가 《한국 진달래 오라》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표지에는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일본 무궁화 가라’가 적혀있고, 또 표지 윗부분에 ‘어느 경솔한 자가 진달래를 놔두고 궁벽한 무궁화를 조선의 꽃이라고 불렀는가’라고 적혀있습니다. 표지에 적혀있는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강 교수는 ‘일본 무궁화를 왜 우리나라 국화로 하느냐? 그보다는 한국 진달래를 국화로 해야 한다’라고 목청껏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궁화는 일본 열도 전체에 자생함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금북정맥 이남에서만 자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문화적으로 일본에는 무궁화에 대해 많은 자료가 있음에 반하여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강 교수는 이런 무궁화에 대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는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로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전에 펴낸 책 《두 얼굴의 무궁화》에서 자세히 얘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책의 끝에 그럼 무궁화 대신 어느 꽃을 국화로 봐야 할지에 대해 여러 후보 꽃을 들면서 그 가운데 진달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했습니다. 그렇게 강 교수는 그 책에서는 진달래를 유력한 후보로 거론하고 책을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UFO는 우리말로는 ‘비행접시’ 또는 ‘미확인 비행물체’ (Unidentified Flying Object)라고 말한다. UFO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상한 모양의 비행체 사진을 증거로 제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에 경기도 가평군에서 문화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UFO의 생생한 사진이 공개됐다. 그러나 UFO라고 주장하는 사진은 많지만, 사진에 찍힌 물체가 실제로 지구에 착륙했거나 파편이라도 남은 흔적은 아직 발견된 적은 없다. 1952년 7월 미국의 워싱턴 D.C. 공항 근처에서 목격자의 진술과 일련의 레이더 탐지 결과가 일치하였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공학자, 기상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UFO의 존재 여부를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는 극비로 분류되어 한동안 공개되지 않아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중에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목격한 것의 90%는 미지의 물체와 빛의 반사가 작용한 현상이라고 밝혀졌다. 곧 인공위성, 유성, 오로라, 기상관측기구, 비행기, 새떼, 풍선, 탐조등, 구름의 사진을 UFO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부는 기상학적 조건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공자는 논어에서 이런 말씀을 남깁니다.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니라 곧 "나의 도(道)는 한 가지로 일관된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필요에 따라 붙여 놓은 사회적 약속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물의 이름은 숱한 세월을 거친 지혜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 일관성이 이름을 낳은 것이지요. 우린 일관성 하면 늘푸른나무 곧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낙락장송의 멋스러움을 떠올리지요.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고독한 귀양살이를 할 때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제자 이상적이 고마워서 그려준 그림입니다. 그리고 《논어》의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를 그림 귀퉁이에 적어 두었지요. "세월이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 사람도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진정한 친구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지요. 세상인심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이 성공하고 부유하게 살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실패하고 가난해지고, 귀양을 떠나게 되면 외면하게 마련입니다. 세한도를 그린 추사 김정희는 물론 대단한 사람이지만 어쩌면 스승에 대해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인 제자 이상적이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