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중국 연길 이윤옥 기자] 금은방의 반지 만드는 곳 구두 닦는 집 숙식이란 뜻은 고기종류의 내장류를 요리해서 파는 것을 말함 액세서리를 파는 집으로 장식의 세계라는 뜻이다 옷궤란 옷장을 말한다 토집이란 시골을 의미하며 시골집에서 만든 떡을 말함 중국에서는 빵, 죽, 만두를 잘 먹는다 목이버섯을 귀버섯이라 한다 연길 시내를 돌아다니며 참 재미난 간판을 찍어 보았다. 같은 한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재미나게 표현할까 싶어 찍은 것이지만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도 많다. 목이(木耳) 버섯을 귀버섯이라 부르는 것도 재미있는데 이 사진은 연길시내에서 용정의 윤동주 생가까지 택시를 전세내어 가는 도중에 눈에 띄어 차를 잠시 세우고 찍은 것이다. 중국이지만 자신의 말글을 중국어 보다 우선하고 있는동포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문화신문 = 중국 연길 이윤옥 기자] “젊은이들은 모두 돈 벌러 한국으로 나갔지요. 약자(弱子)와 노인 분들만 남았어요. 저도 나가지 못해 남았지만 지금은 살만해요. 돈 벌러 나간 조선족들 땅을 제가 다 맡아서 농사도 짓고 한족에게 빌려주기도 해서 이제는 걱정 없이 살지요” ▲연변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 왼쪽이 대문이고 돌비석은 담장으로 꾸며져 있다. ▲199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생가 ▲생가에는 작은 방이 두어개 있는데 입구 방에초라한 모습으로 이렇게 꾸며져 있다. 올해로 69주기다. 어제 29일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갔을 때 “윤동주생가”는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용정시내에서 택시로 30분 거리인 윤동주생가는 왕복 60위안을 주고 전세 낸 택시로 갔는데 생가에 도착해보니 그만 나무 대문이 잠겨있는 것이었다. 대문 앞에서 서성이다 보니 대문 한켠에 관리인 전화번호가 적혀 있기에 전화를 거니 밭에서 일하다가 나왔다며 단숨에 아주머니가 한 분 달려 나왔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아래 보이는 집이 생가이며 집 앞에는 너른 들판이 있고 멀리 산이 있는 이곳에서 윤동주 시
[그린경제/ 얼레빗 = 전수희 기자]강기동 선생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여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으로 이사하였는데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09년 1월부터 1911년 2월까지 약 2년여에 걸쳐 반일 투쟁을 전개하다 일제에 의해 총살 순국한 선생은 의병에 투신하기 이전에 의병을 진압하는 일본 헌병의 보조원이었다. 헌병보조원은 1908년 6월 도입된 것으로 선생은 일본어에 능통한 것을 계기로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경기도 양주군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1909년 고안헌병분견소에 의병들이 수감되고 의병의 실상을 접한 선생은 자신도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1909년 1월 15일 옥문을 부수고 길인식 등 2명의 의병을 탈주시킨 후 총과 탄환을 탈취하여 의병장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 의병으로서 대일항장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창의원수부는 1909년 1월 한 달 동안 포천 양주지방의 산악을 배경으로 약 27회에 걸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헌병보조원 시절의 정보를 바탕으로 효율적 군자금 확보책과 일본군대 헌병 경찰의 정보를 제공하여 창의원수부의 반일투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이러한 공로로 투신한 지 1개월만에 의병장
[한국문화신문 = 중국 연변 이윤옥 기자] 9월27일 아침 9시, 흑룡강성 목단강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발해 동경성(渤海 東京城)으로 가는 버스는 전날 수분하( 綏芬河, 쑤이펀)로 가던 20인승 승합차 보다는 조금 큰 차였지만 낡고 덜덜 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버스터미널에 걸린 발해 동경성행 (渤海 東京城行)이란 팻말만 보아도 가슴이 울컥한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럴 것이다. 함께 이번 여행을 하는 일본인 도다이쿠코 작가는 나와는 다른 감정일 것으로 기자는 애써 묻지 않았다. ▲ 발해궁성터 안의 발해박물관 내부 전시장 물론 그녀는 20대 처녀시절에 발해터를 둘러 볼 정도로 중국 속의 조선역사에 대해 깊은 애정과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차창 밖은 온통 옥수수 밭이었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벌판이었다. 더러는 고구마도 심어 들판에서는 한창 고구마 수확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또한 담배농사와 파밭도 간간이 이어졌다. ▲ 발해궁성터임을 알리는 중국정부의 돌표지석 목단강에서 발해 동경성 (渤海 東京城) 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옥수수, 고구마, 담배, 파로 이어지는 벌판을 지나자 이제는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논이 나타났
[우리문화신문 = 중국 하얼빈 이윤옥 기자] “이 화면은 수용자를 묶어 놓고 팔목을 자르는 모습인데요. 그냥 자르는 것이 아니라 팔에 칼집을 넣은 뒤 자르는 모습입니다.” 중국인 안내원의 말은 격앙되어 있었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면 속 소녀의 팔은 두 동강이 났다. 칼집을 넣은 팔목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러 나왔다. 이어서 수용자인 앳된 소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좁은 전시관 안을 가득 메웠다. 731부대 전시관을 찾은 중국인 관람객들의 비명소리도 동시에 들리는 듯했다. ▲ 여성 수용자를 실험대에 올려놓고 생채 실험을 하는 장면, 산채로 껍질을 벗기거나, 강제 임신, 낙태를 시키는 실험을 하는 등 그 만행은 입에 담을 수 없다. ▲ 영하에서 산 사람을 얼려보는 실험 모습 재현 이것은 9월 26일 기자가 찾은 중국 하얼빈시 평방에 자리한 731부대 전시관 안의 모습이다. “수용자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조선인도 많았습니다. 이곳 731부대로 잡혀온 사람들은 살아나간 사람이 없습니다. ” 안내원은 끊임없이 당시 731부대 안에서 벌어진 잔인하고 끔찍한 생체실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고 전시관 벽면 가득 천인공로할 사진과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습이
[우리문화신문 = 중국 하얼빈 이윤옥 기자] “네 맞아요. 이곳이 외국인 묘지가 있던 터입니다.” 남자현 애국지사가 묻혔던 무덤을 찾아 찾아간 것은 어제 9월 25일 오후로 현재 이곳은 하얼빈 문화공원(文化公園)으로 바뀌어 높다란 관람차가 돌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왕봉의 (王鳳儀, 하얼빈공전대학 수학과 교수, 81살) 씨는 당시 무덤자리를 가리키며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다.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조선이 독립을 원한다는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와 자른 손가락을 흰 천에 싸서 당시 하얼빈에 와 있던 국제연맹 조사단에게 보내어 조선의 독립 의지를 호소하던 남자현 애국지사 (1872∼1933) 가 이곳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2년 전인 1932년의 일이다. ▲ 남자현 애국지사가 묻혔던 첫번째 무덤 (하얼빈 남강 외국인 무덤 앞에서 도다이쿠코 작가와 기자)이 있던 자리로 1930년 쯤 이장되었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단장 리틀경)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 애국지사는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고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혈서를 쓰면서 까지 이러한 일을 감행한
[그린경제/얼레빗=한성훈 기자]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칠백의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칠백의사(七百義士) 순의제향(殉義祭享) 행사를 오는 23일 오후 3시 충청남도 금산군에 있는 칠백의총에서 한다. ▲ 칠백의총 전경 올해로 제422주기를 맞는 이번 제향 행사는 문화재청장을 비롯하여 지역 국회의원, 충남도지사, 금산군수와 칠백의사 후손 등 1,000여 명이 참석한다. 이번 행사는 초헌관(칠백의총관리소장)의 분향과 초헌례(初獻禮), 축관(祝官)의 축문 낭독, 아헌관 헌작의 아헌례(亞獻禮), 종헌관 헌작의 종헌례(終獻禮)와 헌관 재배, 문화재청장의 헌화(獻花, 대통령 명의)와 분향(焚香) 순으로 진행된다. 제향행제(祭享行祭) 뒤 의총참배가 이어지며, 다양한 부대행사를 통해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게 된다. 부대행사로 전통예술공연(살풀이춤), 다과회, 전통차 시음회, 활쏘기 체험프로그램과 시연 따위가 진행된다. 아울러 육군 제32사단 군악대의 연주로 금산 지역 초등학생들로 구성된 소년소녀합창단이 칠백의총 노래 등을 합창한다. ▲ 2002년 칠백의사(七百義士) 순의제향(殉義祭享) 모습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중봉
[그린경제/얼레빗=마완근 기자]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협회가 주최하고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 주관하는 2014 몽양 아카데미가 지난 9월 13일 토요일 14시~17시까지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위치한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에서 50여명의 수강생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와 몽양 여운형이라는 주제로 지난 4월부터 월 1회씩 시민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실시하였는데 이 날은 제5강으로 변은진(한국방송통신대)교수가 해방직전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과 친일세력에 대해 2시간 동안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고 친일행위가 심화된 이른바 해방직전시기의 나라안팎 민족운동의 현황과 몽양 여운형 선생이 중심이 된 조선건국동맹의 활동과 의의에 대해 열강하였다. ▲ 2014 몽양 아카데미 한국 근현대사와 몽양 여운형 수강 모습 이후 참가자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몽양기념관의 장원석 학예사는 31혁명을 기획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셨으며 해방 전후엔 건국동맹과 건국 준비위원회를 지도하신 몽양 여운형선생의 활동과 독립운동 정신을 알리고자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매번 강의실이 꽉 찰 뿐 아니라 안동, 파주, 용인 등 먼 곳에서도 관심을 갖고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한국인으로 중국 음악, 예술의 전당에 빛나는 이름을 새긴 걸출한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을 기리기 위한 정율성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지난 8월 25일 중국 장춘국제회의센터에서 성황리에 열렸다고 길림신문이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에서 주최한 이번 기념행사는 정율성의 딸 정샤오티(71) 를 비롯하여 전 길림성정협부주석 정용철, 전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부주임 남상복 등을 비롯한 길림시의 지도층과 길림성 관계기관, 조선족지도자 간부, 조선족학교 등 1000여명이 기념식장을 가득 메웠다고 전했다. 중국의 3대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는 정율성은 격동의 시대를 풍부한 음악으로 표현한 위대한 작곡가로 옌안송, 1928년,중국인민해방군군가(팔로군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뿐만아니라 오페라, 항일가요, 군가, 서정가곡, 민요, 동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총 397곡의 명작을 남겼다. 정율성은 곡을 만들 때 중국 각지를 돌며 민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창작의 바탕을 삼고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작곡가로 유명하다. ▲ 중국 장춘서 열린 '정율성 탄생100주년 기념음악회' 사진 조선족네트 제공
[그린경제/얼레빗=한성훈 기자] 현충사관리소(소장 최이태)는 영화 명량의 흥행으로 이순신 장군과 현충사에 대해 높아진 국민의 관심을 지속해서 담아내기 위하여 9월부터 다양한 교육․문화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운영한다. 청소년 리더십 함양을 위한 생생 이순신은 현충사로 수학여행을 오는 학교의 학생 100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야외 강연이다.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했던 은행나무 활터 특별무대에서 임원빈 소장(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이 청소년들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배워야 할 리더십을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 이 행사는 오는 11일부터 매주 목요일 진행되며, 참가를 원하는 학교나 단체는 오전과 오후 중에 시간을 선택하여 신청하면 된다. ▲ 현충사 자연캠프(2014년 상반기) 현충사 자연캠프는 현충사 경내의 수려한 조경과 풍부한 수목을 배경으로, 초등학생과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숲 체험 프로그램이다. 오는 17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며, 20~40명 단위로 단체 신청하면 된다. 현충사 휘호교실은 현충사 경내의 은행나무 활터에서 오는 20일부터 매주 토․일요일 오후 2시부터 4시 30분까지 진행된다. 현충사를 방문한 관람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