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 프로기사 신민준 9단이 LG배 결승3번기 최종국에서 중국 순위 1위인 커제 9단에게 승리하여 세계대회 첫 우승을 달성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동안 세계 으뜸 기사라는 커제 9단에 열세였던 신민준 9단의 쾌거여서 바둑애호가들은 기뻐했습니다. 바둑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즐겼던 놀이의 하나로 한ㆍ중ㆍ일 세 나라가 모두 좋아합니다. 바둑은 선인(仙人)들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던 나무꾼이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를 정도로 세월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난가(爛柯)라는 말도 있다고 하지요. 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끼리라도 바둑을 두면 마음이 통한다는 뜻으로 수담(手談)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바둑판을 아끼는 이들도 많았고, 대단히 아름다운 바둑판도 전해져 옵니다. 특히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한 바둑판이라고 알려진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은 그 화려함이 대단하지요. 목화자단기국은 일본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인 나라 정창원에 보관 중인데 상아로 새겨진 옆면의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 일본 왕실 보물이자 으뜸 예술품으로 꼽힙니다. 그밖에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용과 호랑이 무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어제는 봄이 선다는 날 입춘(立春)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춘 무렵 먹는 시절음식에 다섯 가지 매운맛이 나는 모둠 나물 ’오신채(五辛菜)‘가 있지요. 오신채는 파, 마늘, 자총이(껍질이 누런 자줏빛이고, 속은 흰색인 파보다 더 매운 파), 달래, 평지(유채), 부추, 파, 무릇(마늘과 비슷한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미나리 등의 푸성귀들 가운데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고 하얀, 오방색을 골라 무친 나물입니다. 노란빛의 나물을 가운데에 놓고, 동서남북에 청, 적, 흑, 백의 사방색(四方色)이 나는 나물을 놓는데 임금이 굳이 오신채를 진상 받아 중신에게 나누어 먹인 뜻은 사색당쟁을 타파하라는 화합의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또 일반 백성도 식구들의 화목을 상징하고 인(仁)ㆍ예(禮)ㆍ신(信)ㆍ의(義)ㆍ지(志)를 북돋는 것으로 보았으며, 삶에는 다섯 가지 괴로움이 따르는데 다섯 가지 매운 오신채를 먹음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라는 의미도 있다고 하지요. 옛말에 오신채에 기생하는 벌레는 고통을 모른다는 말도 있는데 오신채는 자극을 주는 정력음식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절의 규칙인 ‘선원청규(禪苑淸規)'에 절간의 수도승은 오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허망하도다.(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이 말은 한말 호남의병 기삼연(奇參衍) 총사령관이 일본군에 잡혀 광주 감옥에 갇힌 뒤 남긴 시입니다. 선생의 꿈이 해를 삼키려고 했다는 것은 일제를 패망시키려는데 뜻을 두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기삼연 선생은 그렇게 체포된 다음 날인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피살되어 58살의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이 그렇게 빨리 순국한 것은 추종하는 의병부대의 구출 작전을 두려워한 일제가 재판도 없이 서둘러 학살한 때문이었지요. 선생은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특히 선생은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장성군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을 모아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했으며, 그 뒤 호남일대를 무대로 본격적인 의병전쟁에 돌입했고, 1907년 9월 23일, 고창 문수사(文殊寺) 전투에서 일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을 비롯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올해는 신축년(辛丑年) 소띠해입니다. 그래서 십우도(十牛圖) 또는 심우도(尋牛圖)라고 하는 선종화(불교 종파의 하나인 선종의 이념이나 그와 관련되는 소재를 다룬 그림)가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도를 상징하는 소를 발견하고 길들이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잊고 초탈하는 과정을 그리는 이러한 그림은 지금도 절에서 그려지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 심우도와는 다른 조선중기의 문인화가 김식(金埴)의 그림 <우도(牛圖)>도 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 소들의 평화로운 한나절을 그려냈는데 송아지는 어미의 젖을 정신없이 빨고 있고, 어미 소는 사랑스러운 듯 새끼의 엉덩이를 핥아주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에는 뾰족한 모양의 산이 무덤덤하게 있구요. 이 그림은 부드러운 몸매의 소와 송아지 가족을 통해 따뜻하고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김식의 이 그림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소의 모습을 통하여 군자의 마음가짐을 은유한 것이라고 하지요. 김식은 조선 중기의 권력가였던 김안로의 손자인데 소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소를 그릴 때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沒骨法)을 써서 소의 얼굴, 넓적다리, 엉덩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906년 2월 1일 일제는 조선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기구인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통감부는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써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통감부는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지요. 이때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으며, 통감정치의 실시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대한제국 정부를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위장하고 조선 사람들의 반일 기세를 무마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일제는 통감부를 조선의 국가유신 실현을 위한 기관으로 얘기했으나, 물론 이것도 악독한 식민지배를 감추기 위한 속임 술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1907년 5월 이완용(李完用)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체제를 만들었지요. 이처럼 실질적인 식민통치의 성격을 갖는 통감정치의 실시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우리 겨레의 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고종 44년(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문회(文會) 특별회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광문사의 부사장 서상돈은 모든 국민이 금연으로 돈을 모아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했고, 참석자들이 이에 찬성하면서 즉석에서 2,000여 원이 모금됐습니다. 이어 2월 21일,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대동광문회 주최로 국채보상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려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됐고, 대회에 참석한 군민들부터 성금을 모으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전국 각 지역으로 번져 나갔지요 이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강압적으로 떠안긴 차관 1,300만 원을 온 국민의 힘을 모아 청산함으로써 경제 자립을 실현하고 나아가 국권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1906년을 기준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 세입액은 1,318만 9,336원, 세출액은 1,395만 523원으로, 적자 상태였기에 한 해 예산과 맞먹는 거액의 국채를 대한제국 정부가 도저히 갚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모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매화보다도 더 일찍 눈을 뚫고 꽃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얼음새꽃이 있습니다. 얼음새꽃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며 숲속 습기가 많은 그늘에서도 자라는 꽃으로 키는 보통 10~30cm입니다.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둥그렇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하여 눈색이꽃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생명력이 강하다고 하여 한자말 복수초(福壽草)로 알려졌습니다.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 하여 설련화(雪蓮花), 꽃이 황금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하며 눈송이꽃이라고도 불리는 등 이름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모진 겨울의 껍질을 뚫고 나온 / 핏기 어린 꽃의 날갯짓을 봐 / 햇살 한 모금에 터지는 신(神)의 웃음을 / (중략)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 어둠 속 깨어나지 않는 벽을 넘어 /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고 있구나 / 낙엽더미의 굳은 목청을 풀어 / 마른 뼈들 살아 굼틀하는 소리 / 산을 들어 올리는 저 생기를 봐.” 한현수 시인은 얼음새꽃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며 꽃피는 얼음새꽃에는 산을 들어 올리는 생기가 엿보입니다. 산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국보 제178호로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 무늬 편병(扁甁)’이 있습니다. ‘편병’이란 몸체의 양쪽 면이 편평하고 납작하며, 위쪽에 주둥이가 달린 휴대용으로도 쓰인 술병을 말합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토기에도 그 예가 있었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널리 쓰였지요. 분청사기에 많이 남아 있지만, 백자나 청화백자(靑華白磁)에도 있어 조선시대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분청사기 조화 물고기무늬 편병(扁甁)’은 조선시대 전기에(15~16세기 무렵) 제작된 편병으로 크기는 높이 22.6㎝, 입지름 4.5㎝, 밑지름 8.7㎝입니다. 백토을 두껍게 입히고 조화수법으로 무늬를 그린 위에 연한 청색의 투명한 유약을 칠하였습니다. 앞ㆍ뒷면과 옆면에 서로 다른 무늬와 위로 향한 두 마리의 물고기를 생동감이 넘치는 선으로 그려냈지요. 물고기 무늬는 분청사기 조화수법의 특징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데 조화수법이란 백토로 바른 그릇에 선으로 오목새김의 무늬를 새겨넣고 백토를 긁어내어 하얀 선으로 된 무늬를 만드는 기법입니다. 양 옆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위와 중간에 4엽 모란무늬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장사지냈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망곡(望哭)을 하였고, 백관(百官)들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곡하였다.” 이는 《영조실록》 21권, 영조 5년(1729년) 1월 26일 기록입니다. 《영조실록》은 뒤이어 “아! 통탄스럽다. 무신년(1728년)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경궁 진수당(進修堂)에서 훙서(薨逝)하였으니 곧 사기일(私忌日)이며, 나이 겨우 10살로써 왕세자에 있는지 겨우 4년이었다. (가운데 줄임) 아! 나의 비덕으로 믿는 바는 오로지 왕세자였고, 성품이 또한 이와 같았기에 동방(東方)의 만년의 복이 될 것을 바랐는데, 어찌 나이 겨우 10살 만에 이 지경에 이를 줄 생각했겠는가?”라고 영조는 통탄해했습니다. 사실 효장세자는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했다.’라고 합니다. “어느 날 서운관에서 탁상시계인 문신종(問辰鐘)을 바치자 그냥 서당에 놓아두었다. 한데 젊은 내관이 그것을 구경하다 잘못 건드려 고장이 나버렸다. 영조가 서당에 찾아왔을 때 중관이 그 일을 고하면서 내관을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우연히 일어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35년 전인 1886년 1월 25일 <한성순보(漢城旬)報>의 복간형식으로 박문국(博文局)에서 우리나라 첫 주간신문인 <한성주보(漢城周報)>가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을 깨닫게 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삼았는데 1884년 4월 19일 김윤식(金允植)이 통리아문독판(統理衙門督辦, 조선 말기 외교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 벼슬)에 임명되면서 발간작업이 추진되었지요. 편집체재는 1단제로서 1면 16행, 1행 40자, 1호 16면 또는 18면씩 발행되었는데 규격은 세로 22.5㎝, 가로 16.5㎝였습니다. 특히 <한성순보>가 한자만을 쓴 데 반하여 이 신문은 최초로 국한문을 섞어 썼고, 내용에 따라 순한글 또는 순한문만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일부라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국민계몽에 한 발짝 내디뎠다는 것으로 평가를 받지요. 주보는 제4호인 1886년 2월 22일 자부터는 상업광고를 실었는데 독일인 상인 에드바르트 마이어의 세창양행이 광고주로 등장한 이 광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광고로 알려져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