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조선시대 으뜸 화원으로 단원 김홍도(金弘道)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원은 풍속화를 독창적으로 담아낸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뛰어난 화원이 된 데에는 표암 강세황(姜世晃)의 공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단원이 7~8살 되던 무렵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표암은 그를 아끼며 글과 그림을 가르친 뒤 도화서에 천거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합니다. 심지어 표암은 호랑이 그림의 표준작이라 평가를 받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등의 그림을 함께 그렸지요. 표암은 <송하맹호도> 오른쪽 위에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 적었고, 단원은 왼쪽 아래에 그가 40대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호 ‘사능(士能)’을 적어 놓았으며, 소나무는 표암이, 호랑이는 단원이 그렸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윗부분에 소나무 둥치만 그려 넣고 가지 한 줄기만 밑으로 뻗게 하여 공간감과 구성미를 동시에 그려낸 표암의 노련미, 수만 개의 호랑이 털을 정밀하게 그려 넣어 호랑이의 위용을 뽐낸 이 그림이야말로 불멸의 ‘송하맹호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小雪)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절기가 역법(曆法)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과 맞춘 것이기에 우리나라는 반드시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時維仲冬爲暢月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동짓달이라 大雪冬至是二節 대설과 동지 두 절기 함께 있네 六候虎交麋角解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 鶡鴠不鳴蚯蚓結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 荔乃挺出水泉動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 身是雖閒口是累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 ... (아래 줄임) 위 시는 열두 달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각각 7언 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19세기 중엽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입니다. 이때는 한겨울로 농한기이고 가을에 거둔 풍성한 곡식들이 곳간에 가득 쌓여 있어서 당분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족한 때입니다. 한편 이날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12월 8일부터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 실물을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3실에서 상설 전시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발견 직후 8일 동안의 특별공개와 단기간의 특별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잠시 선보인 적 있었지만, 이후에는 복제품으로만 공개하였습니다. 실물이 상설전시를 통해 전시되는 것은 2018년 이후 처음입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한 시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는 모양이 일정치 않으며, 12행 20자로 모두 203자의 비문이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는데 위쪽 일부와 오른쪽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비문 대부분은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입니다. 이 비의 글씨체는 예서로 분류되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서 신라 특유의 진솔미를 보여줍니다. 비에 새겨진 203개의 문자를 판독ㆍ해석한 결과, 신라 관등제의 성립, 6부의 내부 구조, 신라 중앙 정부와 지방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밝혀졌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내릴 때 주는 임명장을 교지(敎旨)라고 합니다. 교지는 관원을 임명할 때뿐만 아니라 임금이 시호(諡號),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할 때도 발급되었는데, 대한제국 때에는 황제가 내려주는 칙명(勅命)이라는 문서가 이를 대신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 국립고궁박물관에 교지도, 칙명도 아닌 교명(敎命)이란 이상한 문서도 있습니다. 더구나 임명되는 사람 이름이 쓰여 있어야 할 부분은 공란으로 비워두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경기전(慶基殿)의 행(行) 수원참봉(水原參奉)인 관직을 임명하는 문서입니다. 문서를 발급한 때는 대한제국 때인 광무 6년 3월 아무개 날로 날짜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옥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날인되어 있지요. 문서의 마지막에는 문서 발급자의 직함과 이름인 ‘궁내부 대신 육군부장 심상훈’이 적혀 있고, ‘궁내부대신인(宮內府大臣印)’이라는 인장이 날인되어 있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입니다. 조선후기부터 빈곤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관직을 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때 발급한 임명장은 이름을 비우고 발급한 문서라는 뜻으로 ‘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57년 전인 1863년 오늘(12월 2일)은 “대종교(大倧敎)는 삼신일체(三神一體) ‘한얼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단군 한배검을 교조(敎祖)로 받드는 한국 고유의 종교다.”라는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나철(羅喆, 1863 ∼1916)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을사늑약 매국노들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유배까지 된 분입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1909년 1월 15일 구국 운동의 하나로 단군 신위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올린 뒤 민족종교 단군교를 선포했고 1910년에는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대종교는 상해 임시정부의 총령 일곱 가운데 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 등 3명과 임시정부 29명의 의정원 의원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었음을 물론 한글학자 주시경ㆍ이극로ㆍ김두봉도 대종교인이었을 정도로 구국운동과 대종교는 떼어놓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대종교에 큰 빚을 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과 대종교 본부의 이전은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대종교 회원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만들었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종묘제례악을 연주할 때 보면 ㄱ자 모양으로 깎은 16개의 경돌을 두 단으로 된 나무 틀에 위아래 여덟개씩 매달아 소뿔로 만든 각퇴로 때려서 연주하는 유율 타악기 ‘편종(編鐘)’이란 악기가 있습니다. 편경은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편종’처럼 생긴 종 하나를 나무틀에 매단 국악기 ‘특종(特鍾)’도 있습니다. 이 특종 관련 기록은 맨처음 《세종실록》 12년(1430) 3월 5일에 나오는데 당시는 특종이 아니고 가종(歌鍾)이라고 했지요. 그러다 성종(1469~1494) 때 이 타악기는 비로소 특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길이가 62cm, 밑 부분의 긴 지름이 29.3cm인 종 한 개를 틀에 매달아 놓은 이 특종은 편종의 종보다 두 배나 큽니다. 특종은 동철(銅鐵)과 납철(鐵)을 화합하여 주조하지요. 특종의 음은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黃鍾)입니다. 특종은 종묘제향(宗廟祭享) 때 제례악이 시작할 때만 연주됩니다. 곧 특종은 박(拍)의 지휘에 따라서 한 번 연주되는데. 특종의 연주에 이어서 축을 세 번, 북을 한 번 치지요. 이 동작이 세 번 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엇을 하든 간에 / 때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겠거늘 / 밤에는 물시계(자격루)가 있지만 / 낮에는 알 길이 없더니 / 구리를 부어 기구를 만드니 / 형체는 가마솥과 같고 / 반경에 둥근 틀을 설치하여 / 남과 북이 마주하게 하였다 / (가운데 줄임) / 동물신의 몸을 그리기는 / 글자 모르는 백성 때문이요 / 각과 분이 또렷한 것은 / 햇볕이 통하기 때문이요 / 길가에 두는 것은 / 구경꾼이 모이는 때문이니 / 이제 비로소 / 백성이 일을 시작할 것을 알게 되리라” 이는 세종 때 오목해시계를 만들고 기록했던 김돈이 오목해시계를 만든 의의를 살피고 그 기쁨을 노래한 글입니다. 그 당시 시간을 측정하고 알리는 것은 임금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오목해시계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혜정교(현재 교보문고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에 있던 다리) 길가에 세우고 시간을 백성들이 스스로 알 수 있게끔 나눠 주었지요. 그것도 한자 모르는 백성과 어린아이까지 배려한 것으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9년 전에 글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만든 훈민정음에 버금가는 값어치를 지닌 시계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호랑이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영물이자 수호신입니다. 사람들은 백수(百獸)의 왕인 호랑이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신성시하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 그림에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고 새해가 되면 대문과 집안 곳곳에 호랑이 그림 곧 문배도(門排圖)를 붙였지요. 또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등장하는 호작도(虎鵲圖)는 민화의 단골 소재였고, 호랑이는 무(武)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조선시대 무관(武官)의 관복에는 호랑이를 흉배(胸背)로 붙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박물관에는 호랑이 몸체를 닮은 그릇도 보입니다. 먼저 1979년 3월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그릇은 동물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얼굴 부위에는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지요. 이 그릇은 ‘호자(虎子)’라고 하여 남성용 소변기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옛날에 기린왕이라는 산신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 거기에 오줌을 누었다고 전하며, 새끼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호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호자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높이가 25.7cm, 주둥이의 지름은 6.6cm입니다. 그런가 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에서 출토되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흥례문을 들어서면 작은 개울 곧 금천(禁川)이 나옵니다. 그러면 작은 다리 영제교(永濟橋)를 건너야 하는데 이 영제교 좌우로 얼핏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동물석상이 양옆으로 두 마리씩 마주 보면서 엎드려 있습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이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라고 묘사된 이 석수는 무엇일까요?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이 짐승들은 혹시라도 물길을 타고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과 임금을 지키는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용머리, 말의 몸, 기린 다리, 사자를 닮은 회백색의 털을 가진 이 동물을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실린 “경복궁 유관기”에는 “천록(天祿)”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천록은 물론 해태 그리고 근정전 지붕 위의 잡상 따위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중국 황실의 거대하고 위압적인 석상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석상들은 해학적이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영제교 북서쪽에 있는 천록은 개구쟁이처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소학》을 읽고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이제부터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구차스럽게 어찌 잘살기를 부러워하리오? 이는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굉필(金宏弼)의 <독소학(讀小學)> 곧 《소학(小學)》을 읽고 쓴 한시입니다. 그는 공부해도 아직 천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소학(小學)》을 읽고 나서야 어제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니 구차스럽게 잘사는 삶을 부러워하지는 않겠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으며, 주위에선 그를 《소학》의 화신이라고 했습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책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위 시에 대해, “김굉필은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 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