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39년 오늘(11월 10일)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한 날입니다. 창씨개명은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인데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날은 다음 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였는데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으뜸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그는 창씨개명한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는 조리서들을 보면 동쪽인 경북 영양의 정부인 장계향 선생이 1670년 무렵 궁체로 쓴 필사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서쪽인 충남 홍성의 사운종택에 전해지는 숙부인 전의이씨가 1891년 필사한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한반도 가운데랄 수 있는 충북 청주에는 영동대학교 호텔외식조리학과 지명순 교수가 발굴해낸 《반찬등속》이 있습니다. 먼저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처음 여성이 한글로 쓴 조리서라는 평가를 받지요. 《음식디미방》은 예부터 전해오거나 장계향 선생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과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지금 영양 장계향 선생 생가에는 “음식디미방체험관”이 있으며 여기서 《음식디미방》을 계승하려 노력하고 있구요. 그리고 홍성의 《음식방문니라》 곧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글’이란 책은 화향입주법, 두견주법, 소국주법, 송순주법, 신묘향법 같은 술빚기와 두텁떡법, 혼돈병법, 신검채단자, 석탄병법 같은 떡 만들기 그리고 승기약탕법, 삼합미음법, 증구법(개찜) 같은 요리와 반찬 만들기 따위가 설명돼 있습니다. 숙부인 전의 이씨의 후손인 사운종가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쌀쌀한 바람이 때때로 불며 누른 잎새가 우수수하고 떨어지든 가을철도 거의 다 지내가고 새빨갓케 언 손으로 두 귀를 가리고 종종 거름을 칠 겨울도 몃날이 못되야 또다시 오게 되얏다. 따듯한 온돌 안에서 쪽각 유리를 무친 미닫이에 올골을 대이고 소리 업시 날리는 백설을 구경할 때가 머지 아니하야 요사이는 길가나 공동수도에 모히어 살림이야기를 하는 녀인네 사이에는 ‘우리 집에는 이때까지 솜 한 가지를 못 피어 놓았는데 이를 엇지해….’ 하며 오나가나 겨울준비에 분망하게 되었다.” 위는 <입동과 침채(沈菜)* 준비>라는 제목의 1922년 11월 6일 치 동아일보 기사 일부로 당시의 입동 무렵 분위기를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내일은 24절기의 열아홉째인 입동(立冬)으로 겨울에 드는 때입니다. 이때쯤이면 곧바로 닥쳐올 겨울 채비 때문에 아낙네들은 걱정 속에 일손이 바빠집니다. 그런데 입동 전후에 가장 큰 일은 역시 김장이지요. 지금은 배추를 비롯한 각종 푸성귀를 한해 내내 팔고 있고 김치 말고도 먹을거리가 풍요롭지만, 예전에 겨울 반찬은 김치가 전부이다시피 해 김장은 한해 살림의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입동 무렵에는 김장 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침과 뜸 곧 침구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침구술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인체에 있는 수백 개의 경혈을 침구술을 시술하는 사람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지요. 경험이 부족한 의료진이 시술하면 환자가 위험할 수 있어서 조선 왕실에서는 청동으로 경혈을 표기한 인체상을 만들어 정확한 침구술을 익히는 연습을 했습니다. 침구술을 연습하기 위해 만든 청동인체상 머리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이나 수은을 넣은 뒤, 시술자가 올바른 혈 자리에 침을 놓으면 액체가 흘러나오도록 하였지요.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1747년(영조 23년) 숙종의 왕비인 인원왕후를 치료하기 전 2명의 의관을 뽑을 때 청동인체상으로 시험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근거가 확실한 것입니다. 현재 왕실에서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인체상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이 유일하지요. 국립고궁박물관은 2019년 5월부터 다달이 전시되고 있는 유물 가운데 한 점을 뽑아, 좀 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큐레이터 추천 왕실유물‘을 운영해 오고 있는데, 지난 9월 뽑힌 유물인 청동인체상은 유튜브 채널로 9월 23일부터 공개하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자장 자장 와리 자장 우리 애기는 잘두 잔다. 남의 애기는 울구 잔다. 자장 자장 와리 자장 꽃밭에는 나비오구 자장밭에는 잠이 온다.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님께는 효자동이, 일가에는 화목동이” 지난 10월 30일 서울 혜화동 JCC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 명창의 <북녘땅에 두고 온 노래 Ⅳ> 공연이 이었지요. 바로 위 노래는 이날 공연에서 불렸던 것으로 평안남도에서 전래했던 토속 <자장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모차르트ㆍ슈베르트 등 서양 자장가를 익숙히 들어왔는데 사실 우리 겨레에겐 이런 자장가들이 전승돼온 것입니다. 이날 공연에서는 불린 것들은 평안남도에서 전해 내려온 자장가 10곡이었는데 이 자장가들은 아가의 고운 잠결을 바라는 엄마의 간절함이 부드럽게 담겨있었습니다. 이날 공연에서는 자장가 말고도 죽은 어머니를 추모하는 ‘타박네야’와 함께 며느리의 시집살이를 표현하는 "시집가서 삼 일 만에 밭 김매러 나갔네 / 한 골 매고 두 골 매니 달이 떴네 달 떴네" 하는 ‘시집살이’, 그리고 ‘며느리의 말대답’, ‘물레질 소리’ 등을 들을 수 있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며 / 홍은동 사거리에서 사라진 털보네 대장간을 찾아가고 싶다 / 풀무질로 이글거리는 불 속에 시우쇠처럼 나를 달구고 / 모루 위에서 벼리고 숫돌에 갈아 / 시퍼런 무쇠낫으로 바꾸고 싶다 땀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위는 김광규 시인의 “대장간의 유혹”이란 시입니다. 우리는 조선 풍속도의 대가라고 하면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 ~ ?)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장간”이 있는데 또 다른 풍속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 ~ 1822) 그림에도 “대장간”이 보입니다. 김득신은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김득신의 ‘대장간’은 김홍도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이던 대장장이가 아닌 낫 갈던 녀석을 김득신은 과감히 빼버렸습니다. 대신 대장장이들이 훨씬 젊고 힘 있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김홍도는 대장간을 사실 그대로 그렸지만, 김득신은 생략할 건 생략하고 그 대신 대장간에 걸맞게 생동감 있고, 힘 있는 표현을 하고 있지요. 또 한 가지 더 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반 백성과 양반가의 음식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이들의 차이를 음식의 재료나 종류, 그리고 가짓수나 조리법으로 봅니다. 물론 이런 것의 차이도 있지만, 요리전문가에 따르면 양반가의 음식은 조상이나 집안 어른을 위하는 마음 씀씀이를 듬뿍 담고, 양념으로 쓰는 실고추ㆍ깨소금 하나에도 정성을 담아 오랜 시간 조리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양념장 속의 양념은 진이 나도록 다졌고, 고명을 만들 때도 일정한 맛과 모양을 냈으며 쇠고기도 결을 따라 곱게 써는 것이 원칙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음식은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양지머리 고깃국이라도 끓이는 날엔 핏물을 빼려고 찬물에 담가두는 일부터 시작하여 고기에 무ㆍ대파ㆍ마늘ㆍ생강 등을 넣고 푹 고아야 합니다. 이때 국 위에 떠오른 것들은 일일이 서서 걷어내야 할뿐더러 다 끓여낸 국을 뜰 때는 국그릇을 뜨거운 물에 미리 담가 따뜻하게 한 다음 마른행주로 잘 닦아 담아내야 했지요. 국 한 대접이 밥상에 오르려면 어머니들의 이러한 정성과 공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 음식의 기본으로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제맛이 나는 김치나 오래 둘수록 깊은 맛이 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8월 27일 문화재청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가거도 섬등반도」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섬 모두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신안 가거도’는 나라땅 최서남단이라는 지리적인 상징성이 있지요. 수많은 철새가 봄철과 가을철에 서해를 건너 이동하면서 중간에 잠시 들르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넓게 펼쳐진 후박나무 군락과 다양한 종류의 희귀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가거도 북서쪽에 있는 섬등반도는 섬 동쪽으로 뻗어 내린 반도형 지형으로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봉과 병풍처럼 펼쳐진 바닷가 낭떠러지가 볼만한 광경을 이루며, 특히, 해넘이 경관이 아름답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지요. 가거도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과 《여지도서》, 《해동지도》, 《제주삼현도》 등 고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 시대의 본래 섬 이름은 가가도(加佳島)이었는데, 다른 한자표기로 ‘가가도(加可島)’라는 기록도 보입니다.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의 명승 지정은 마지막 ‘끝섬’의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지요. 나라땅 최서남단의 가거도는 나라땅의 동쪽 끝인 독도(천연기념물 제336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예전 한겨울 추위를 누비옷으로도 견뎠습니다. 누비는 원래 몽골의 고비 사막 일대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200년쯤 중국과 티베트에서 쓰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치마, 저고리, 포, 바지, 두의(頭衣), 신발, 버선. 띠 등 옷가지와 이불 따위에 누비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누비는 보통 보온을 위해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함께 홈질해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입니다. 그냥 솜옷은 옷을 입을수록 옷감 안에서 솜이 뭉쳐버립니다. 하지만, 누비를 해놓으면 이렇게 뭉치는 일도 없고, 누비 사이에 공기를 품고 있어서 더 따뜻할 수가 있지요. 본래 누비는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려고 넝마의 헝겊 조각을 누덕누덕 기워서(納) 만든 옷(衣) 곧 `납의장삼(納衣長衫)`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납의가 `나비`로 소리 나다가 이것이 다시 `누비`로 자리 잡은 것이라지요. 여기서 `누비다`라는 새로운 바느질 양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누비는 무늬의 모양에 따라 줄누비, 잔누비, 오목누비 따위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홈집이 촘촘한 잔누비는 홈질줄의 간격이 1밀리미터 정도인데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누비는 섬세한 작업인 만큼 정성을 쏟지 않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은 오늘날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는데 장애인에겐 조세와 부역을 면해주고, 죄를 지으면 형벌 대신 면포로 받았으며, 연좌제도 적용하지 않았지요. 또한 시정(侍丁) 곧 활동보조인을 붙여주고, 때때로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내려주었습니다. 또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만들어 어려움에 부닥친 장애인을 구제하였지요. 특히 조선시대엔 장애가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조선이 세워진 뒤 예법과 음악을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꼽추였지만 좌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지요. 또 간질 장애인이었던 권균(權鈞, 1464~1526)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오르고 영창부원군에까지 봉해졌으며, 체제공(1720년~1799)은 사팔뜨기였지만 영의정까지 올라 정조 때 큰 공을 세웠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장애인에게 사회분위기가 긍정적이었습니다.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은 그의 시문집 《담헌서(湛軒書)》에서 “소경은 점치도록 하고, 벙어리와 귀머거리, 앉은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