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른 조선왕릉에 가보면 석호ㆍ석양 등 석수(石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석수(石獸)란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국립공주박물관에 가면 이상한 동물 모양의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石獸)’가 있습니다. 이 석수는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백제 때 만들어졌지요. 이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무령왕릉 통로 가운데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습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으며,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지요. 몸통 좌우, 앞ㆍ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또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삼국의 고분 가운데 무령왕릉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석수는 기존의 백제에서 유례가 없었던 것으로 본래는 중국의 부장풍습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석수가 본래 중국에서 부장풍습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해도 그 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발해사에 따르면 서쪽으로 거란에게 책망하여 돌려받고 북쪽으로 여진에게 책망하여 돌려받아 우리 강토를 잃지 않고 동양 세계에 일대 강국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거늘, 바로 고려의 문인 학자들이 이를 타인의 강토로 등한시하여 5경 15부의 빛나는 판도를 이역에 빠지게 하고 동남쪽 한 모퉁이로 축소되어 약소한 나라를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의 하나이다." 이 글은 〈제국신문〉과 함께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였던 <황성신문>의 1910년 4월 28자 논설 '발해고를 읽다' 일부입니다. 발해(渤海)는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의 유민들과 그 지역의 또 다른 한민족 계열의 사람들이 고구려의 영토 위에 다시 세웠던 왕조로 698년부터 926년까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인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지방에서 광대한 영토와 한민족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존재했던 나라입니다. 또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등 천자의 제국으로 우뚝 서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발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서 자신을 '고(구)려국왕'이라 했고, 일본에 왔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은 우리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처럼 돌림병이 돌면 속수무책이었는데 영조 때만 해도 지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홍역으로 50~6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조 임금 때인 1775년(영조 51) 이헌길은 한양에 갔다가 삼태기에 싣고 나가는 홍역으로 죽은 주검이 잠깐에 수백 명이나 되는 것을 보고, 상주의 신분임에도 백성을 구해야 한다며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이헌길은 홍역에 관한 한 최고의 의술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비방을 얻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가도 살아나고, 열이 오르다가도 내렸기에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홍역 환자를 치료하는 집 앞에는 사람들이 골목까지 줄을 설 정도였고,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병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그의 책 마과회통 서문에서 이헌길 덕분에 홍역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얘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의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정조의 15대손인 왕가의 자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자이거나 구분하지 않고 똑같이 치료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헌길은 치료만 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연구하고 체득한 비방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시인 도종환은 자신의 시 ‘세한도’에서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라고 노래한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습니다. 추사가 그림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곧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고 썼기에 우리에게 <세한도(歲寒圖)>라고 알려졌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는 58살이 되던 해(1844년),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한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그린 세한도(歲寒圖)입니다. 고립무원의 유배지에 남겨져 있는 자신을 잊지 않고 유배 중인 중죄인을 도우면 중벌을 받을 수 있음에도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드나들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에 감동하여 답례로 그린 그림이지요. 이에 이상적은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절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79년 전인 1941년 오늘(12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2월 초,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지요. 하와이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진 기지가 있는 곳으로, 미국이 중심인 연합국을 향해 총구를 들이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죠. 그러자 미국과 중국은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이에 성명서를 낸 것입니다. 일제의 침략 전쟁이 동남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치닫던 이때, 임시정부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적극적인 독립 활동을 모색하고 있었던 이때,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며 국권을 우리 힘으로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이때의 선전포고 내용을 보면 “왜구(倭寇)를 한국⋅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하기 위하여 혈전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한다.”라고 다짐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하자마자 임정 요인들은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여 육군을 편성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7일 2014년부터 추진한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 44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바둑돌 200여 점이 출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바둑돌은 피장자 발치 아래에 함께 묻힌 토기군(土器群) 사이에 모여진 상태로 확인되었는데 크기는 지름 1~2㎝, 두께 0.5㎝ 안팎이고 평균 1.5㎝ 정도의 것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색깔은 크게 흑색, 백색, 회색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인공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없어 자연석을 그대로 채취해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지요. 과거에도 신라시대 바둑돌은 황남대총 남분(243점), 천마총(350점), 금관총(200여 점), 서봉총(2점) 등 최상위 등급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만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후 시기로 넘어가면 7세기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인 용강동 6호분(170점)에서도 확인되었고, 분황사터에서는 가로ㆍ세로 15줄이 그어진 바둑판 모양의 벽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재위 737∼742) 때 기록에 효성왕이 바둑을 뒀다는 내용과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내용 등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는 조선시대 으뜸 화원으로 단원 김홍도(金弘道)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원은 풍속화를 독창적으로 담아낸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뛰어난 화원이 된 데에는 표암 강세황(姜世晃)의 공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단원이 7~8살 되던 무렵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표암은 그를 아끼며 글과 그림을 가르친 뒤 도화서에 천거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합니다. 심지어 표암은 호랑이 그림의 표준작이라 평가를 받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등의 그림을 함께 그렸지요. 표암은 <송하맹호도> 오른쪽 위에 ‘표암화송(豹菴畵松)’이라 적었고, 단원은 왼쪽 아래에 그가 40대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호 ‘사능(士能)’을 적어 놓았으며, 소나무는 표암이, 호랑이는 단원이 그렸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윗부분에 소나무 둥치만 그려 넣고 가지 한 줄기만 밑으로 뻗게 하여 공간감과 구성미를 동시에 그려낸 표암의 노련미, 수만 개의 호랑이 털을 정밀하게 그려 넣어 호랑이의 위용을 뽐낸 이 그림이야말로 불멸의 ‘송하맹호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한째인 대설(大雪)입니다. 소설(小雪)에 이어 오는 대설(大雪)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절기가 역법(曆法)의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華北地方)의 계절적 특징과 맞춘 것이기에 우리나라는 반드시 이때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時維仲冬爲暢月 때는 바야흐로 한겨울 동짓달이라 大雪冬至是二節 대설과 동지 두 절기 함께 있네 六候虎交麋角解 이달에는 호랑이 교미하고 사슴뿔 빠지며 鶡鴠不鳴蚯蚓結 갈단새(산새의 하나) 울지 않고 지렁이는 칩거하며 荔乃挺出水泉動 염교(옛날 부추)는 싹이 나고 마른 샘이 움직이니 身是雖閒口是累 몸은 비록 한가하나 입은 궁금하네 ... (아래 줄임) 위 시는 열두 달에 대한 절기와 농사일 그리고 풍속을 각각 7언 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19세기 중엽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입니다. 이때는 한겨울로 농한기이고 가을에 거둔 풍성한 곡식들이 곳간에 가득 쌓여 있어서 당분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족한 때입니다. 한편 이날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12월 8일부터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 실물을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3실에서 상설 전시합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발견 직후 8일 동안의 특별공개와 단기간의 특별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잠시 선보인 적 있었지만, 이후에는 복제품으로만 공개하였습니다. 실물이 상설전시를 통해 전시되는 것은 2018년 이후 처음입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 포항시 흥해읍 중성리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한 시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는 모양이 일정치 않으며, 12행 20자로 모두 203자의 비문이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는데 위쪽 일부와 오른쪽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비문 대부분은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입니다. 이 비의 글씨체는 예서로 분류되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서 신라 특유의 진솔미를 보여줍니다. 비에 새겨진 203개의 문자를 판독ㆍ해석한 결과, 신라 관등제의 성립, 6부의 내부 구조, 신라 중앙 정부와 지방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이 밝혀졌지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내릴 때 주는 임명장을 교지(敎旨)라고 합니다. 교지는 관원을 임명할 때뿐만 아니라 임금이 시호(諡號),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할 때도 발급되었는데, 대한제국 때에는 황제가 내려주는 칙명(勅命)이라는 문서가 이를 대신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 국립고궁박물관에 교지도, 칙명도 아닌 교명(敎命)이란 이상한 문서도 있습니다. 더구나 임명되는 사람 이름이 쓰여 있어야 할 부분은 공란으로 비워두고,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경기전(慶基殿)의 행(行) 수원참봉(水原參奉)인 관직을 임명하는 문서입니다. 문서를 발급한 때는 대한제국 때인 광무 6년 3월 아무개 날로 날짜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황제의 옥새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날인되어 있지요. 문서의 마지막에는 문서 발급자의 직함과 이름인 ‘궁내부 대신 육군부장 심상훈’이 적혀 있고, ‘궁내부대신인(宮內府大臣印)’이라는 인장이 날인되어 있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 문서는 가짜 임명장입니다. 조선후기부터 빈곤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관직을 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이때 발급한 임명장은 이름을 비우고 발급한 문서라는 뜻으로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