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분황로에 가면 사적 제548호 경주 ‘분황사터’가 있습니다. 분황사터는 신라의 대표적인 절 가운데 하나인 ‘분황사’가 있던 곳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분황사’는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펼쳤던 유서 깊은 절입니다. 또 분황사는 황룡사, 흥륜사 등과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왕경(경주)에 조성되었으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 곧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라고 하지요. 분황사터에 남아있는 유물 가운데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입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白日靑天霹靂聲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외무총장 등을 지낸 신규식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보고 지은 시입니다. 오늘은 111년 전인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깬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이지요. 아침 9시 이등박문이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잠시 뒤 그가 열차에서 내려 걸어갈 때 안 의사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4발의 총을 쏘았고, 4발 모두 명중했습니다. 안 의사는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습니다. 거사 직후 안 의사는 하얼빈 내 일본영사관으로 잡혀갔다가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았지요. 당당했던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지요. 이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23일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霜降)”입니다.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릅니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수채색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누렇고 빨갛게 바뀌었지요. 그리고 서서히 그 단풍은 하나둘 떨어져 지고 나무들은 헐벗게 됩니다. 옛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 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라는 뜻입니다. 상강이야말로 가을 절기는 끝나고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이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운문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고(體露), 천지엔 가을바람(金風)만 가득하겠지.”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상강이 지나면 추위에 약한 푸나무(식물)들은 자람이 멈추지요. 천지는 으스스하고 쓸쓸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로 들어가는데 들판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한옥이란 주거공간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한옥은 앞에 마당, 뒤뜰엔 꽃밭이나 푸성귀밭(채소밭)을 두었지요. 또 마당에는 잔디를 깔거나 꽃, 나무들을 심지 않고 빈 채 놓아둡니다. 시골에 잇는 오두막집이라도 이 마당은 으레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마당을 빈 채 놓아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렇게 구조를 만든 가장 큰 까닭은 바로 자연을 활용한 과학적 삶의 슬기로움입니다. 마당을 비워두면 여름에 햇볕에 달궈져 뜨거운 공기가 만들어져 위로 올라갑니다. 이때 마당과 꽃과 나무가 있는 뒤뜰 사이엔 기압차가 생겨 바람이 불게 되지요. 그 바람은 대청마루를 빠르게 통과함으로써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빈터로 된 마당은 수시로 다양한 삶의 형태가 펼쳐지는 곳으로 다시 태어나곤 합니다. 우선 마당은 평소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마당 한 편에 놓인 평상은 사랑방이 되어 구수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지요. 또 집안에 혼례가 있으면 혼례식장, 상사가 나면 장례식장이 되기도 하며, 가을철 추수 때가 되면 마당에서는 타작도 합니다. 한 가지 더 마당은 조명장치의 구실도 하지요. 한옥은 처마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는 극락보전 후불 벽화인 보물 제1313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가 있습니다. 이 벽화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뒤 유려하고 간결한 맛으로 그린 관음보살벽화로, 1476년에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입니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습니다.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지요.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있지요.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있습니다. 높이 12m나 되는 이 탑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어서 백탑(白塔)이라는 별명이 생겼지요. 정조 때 이 탑골 주변의 지식인들이 모여 ‘백탑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인 박지원ㆍ홍대용과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조(正祖) 시대인 1776~1800년간 힘을 얻었던 백탑파(白塔派) 선비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며 이들은 또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실학자(實學者)들이지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이 그들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특히 백탑파는 당시 지배이념이면서 관념으로 흐르던 주자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위는 1894년 오늘(10월 19일) 태어난 외솔 최현배 선생이 펴낸 《우리말본》 머리말에서 있는 말입니다. 최현배 선생은 1929년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력하였고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2년 선생은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펴냈는데 이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광복될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지요.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의 상당수가 언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숙종의 제2계비로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5)는 1726년 언문교지를 내려 영조임금을 즉위시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원왕후는 아버지 김주신과 어머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문화재청이 지정한 무형문화재 가운데는 북한 쪽에서 전승되던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인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도 있지요. 이 사자놀음을 농경사회에서는 정월대보름에 놀았지만, 요즘은 때와 상관없이 놉니다. 또 이 놀음은 집안과 마을의 잡귀를 몰아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 계통의 놀이였습니다. 특히 이 사자놀음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됨을 비손하면서, 춤과 노래로 흥과 신명을 돋우고 새로운 기분으로 활력을 되찾기 위한 민속놀이였지요. 사자놀음은 먼저 사람들이 모여 마당놀이를 하고 사당춤, 무동춤, 꼽추춤 따위로 한바탕 놀면 사자가 등장하여 사자춤을 춥니다. 사자가 한참을 놀다가 기진하여 쓰러지면 처음에는 스님을 불러 반야심경을 외우지만 사자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원을 불러 침을 놓는데 이에 사자가 기운 차리고 일어나서 굿거리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 모두가 함께 춤을 추며, 사자를 놀리기도 합니다. 놀이에는 사자, 양반, 꺾쇠, 꼽추, 사령, 무동, 사당, 중, 의원, 거사들이 나옵니다. 또 이 북청사자놀음에는 퉁소, 북, 징, 장구가 쓰이는데, 특히 다른 지역과 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흔히 한국 신문만화의 처음을 말할 때 1909년 6월 2일 치 '대한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한 컷 만화를 꼽습니다. 다만, 이는 만화라기보다는 만평에 가까운데 어쨌든 한국 신문만화사의 중요한 기준으로 꼽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한국 신문 첫 넷 컷 연재만화는 1924년 10월 13일 치부터 시작한 조선일보 '멍텅구리 헛물켜기'입니다. 한량과 기생의 연예행각을 그린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의 만화 '메기와 지그스'에서 착안한 명랑만화였는데 주인공 최멍텅과 친구 윤바람, 그리고 미모의 기생 신옥매 연애행각을 그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독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림은 나중에 동양화의 대가로 꼽히는 노수현이 그렸고 줄거리는 '조선일보' 편집고문 이상협과 주필 안재홍이 꾸몄습니다. 이후 '멍텅구리 련애생활', '명텅구리 가뎡생활', '멍텅구리 세계일주' 등 시리즈로 연재되며 2년 5개월 동안 모두 501회나 연재되다 1927년 3월 11일 마지막 만화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역사문제연구소’의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를 보면 노수현은 일제강점기 동양화단의 손꼽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