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57년 전인 1863년 오늘(12월 2일)은 “대종교(大倧敎)는 삼신일체(三神一體) ‘한얼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단군 한배검을 교조(敎祖)로 받드는 한국 고유의 종교다.”라는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나철(羅喆, 1863 ∼1916)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구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을사늑약 매국노들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유배까지 된 분입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1909년 1월 15일 구국 운동의 하나로 단군 신위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올린 뒤 민족종교 단군교를 선포했고 1910년에는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대종교는 상해 임시정부의 총령 일곱 가운데 이동녕ㆍ이시영ㆍ신규식 등 3명과 임시정부 29명의 의정원 의원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었음을 물론 한글학자 주시경ㆍ이극로ㆍ김두봉도 대종교인이었을 정도로 구국운동과 대종교는 떼어놓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대종교에 큰 빚을 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과 대종교 본부의 이전은 독립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습니다. 대종교 회원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만들었으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종묘제례악을 연주할 때 보면 ㄱ자 모양으로 깎은 16개의 경돌을 두 단으로 된 나무 틀에 위아래 여덟개씩 매달아 소뿔로 만든 각퇴로 때려서 연주하는 유율 타악기 ‘편종(編鐘)’이란 악기가 있습니다. 편경은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편종’처럼 생긴 종 하나를 나무틀에 매단 국악기 ‘특종(特鍾)’도 있습니다. 이 특종 관련 기록은 맨처음 《세종실록》 12년(1430) 3월 5일에 나오는데 당시는 특종이 아니고 가종(歌鍾)이라고 했지요. 그러다 성종(1469~1494) 때 이 타악기는 비로소 특종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길이가 62cm, 밑 부분의 긴 지름이 29.3cm인 종 한 개를 틀에 매달아 놓은 이 특종은 편종의 종보다 두 배나 큽니다. 특종은 동철(銅鐵)과 납철(鐵)을 화합하여 주조하지요. 특종의 음은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黃鍾)입니다. 특종은 종묘제향(宗廟祭享) 때 제례악이 시작할 때만 연주됩니다. 곧 특종은 박(拍)의 지휘에 따라서 한 번 연주되는데. 특종의 연주에 이어서 축을 세 번, 북을 한 번 치지요. 이 동작이 세 번 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엇을 하든 간에 / 때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겠거늘 / 밤에는 물시계(자격루)가 있지만 / 낮에는 알 길이 없더니 / 구리를 부어 기구를 만드니 / 형체는 가마솥과 같고 / 반경에 둥근 틀을 설치하여 / 남과 북이 마주하게 하였다 / (가운데 줄임) / 동물신의 몸을 그리기는 / 글자 모르는 백성 때문이요 / 각과 분이 또렷한 것은 / 햇볕이 통하기 때문이요 / 길가에 두는 것은 / 구경꾼이 모이는 때문이니 / 이제 비로소 / 백성이 일을 시작할 것을 알게 되리라” 이는 세종 때 오목해시계를 만들고 기록했던 김돈이 오목해시계를 만든 의의를 살피고 그 기쁨을 노래한 글입니다. 그 당시 시간을 측정하고 알리는 것은 임금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오목해시계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혜정교(현재 교보문고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에 있던 다리) 길가에 세우고 시간을 백성들이 스스로 알 수 있게끔 나눠 주었지요. 그것도 한자 모르는 백성과 어린아이까지 배려한 것으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9년 전에 글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만든 훈민정음에 버금가는 값어치를 지닌 시계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호랑이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영물이자 수호신입니다. 사람들은 백수(百獸)의 왕인 호랑이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신성시하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 그림에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고 새해가 되면 대문과 집안 곳곳에 호랑이 그림 곧 문배도(門排圖)를 붙였지요. 또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등장하는 호작도(虎鵲圖)는 민화의 단골 소재였고, 호랑이는 무(武)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조선시대 무관(武官)의 관복에는 호랑이를 흉배(胸背)로 붙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박물관에는 호랑이 몸체를 닮은 그릇도 보입니다. 먼저 1979년 3월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그릇은 동물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얼굴 부위에는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지요. 이 그릇은 ‘호자(虎子)’라고 하여 남성용 소변기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옛날에 기린왕이라는 산신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 거기에 오줌을 누었다고 전하며, 새끼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호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호자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높이가 25.7cm, 주둥이의 지름은 6.6cm입니다. 그런가 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에서 출토되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흥례문을 들어서면 작은 개울 곧 금천(禁川)이 나옵니다. 그러면 작은 다리 영제교(永濟橋)를 건너야 하는데 이 영제교 좌우로 얼핏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동물석상이 양옆으로 두 마리씩 마주 보면서 엎드려 있습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이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라고 묘사된 이 석수는 무엇일까요?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이 짐승들은 혹시라도 물길을 타고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과 임금을 지키는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용머리, 말의 몸, 기린 다리, 사자를 닮은 회백색의 털을 가진 이 동물을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실린 “경복궁 유관기”에는 “천록(天祿)”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천록은 물론 해태 그리고 근정전 지붕 위의 잡상 따위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중국 황실의 거대하고 위압적인 석상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석상들은 해학적이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영제교 북서쪽에 있는 천록은 개구쟁이처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소학》을 읽고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이제부터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구차스럽게 어찌 잘살기를 부러워하리오? 이는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굉필(金宏弼)의 <독소학(讀小學)> 곧 《소학(小學)》을 읽고 쓴 한시입니다. 그는 공부해도 아직 천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소학(小學)》을 읽고 나서야 어제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니 구차스럽게 잘사는 삶을 부러워하지는 않겠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으며, 주위에선 그를 《소학》의 화신이라고 했습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책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위 시에 대해, “김굉필은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 밖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용은 여러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우리에겐 친숙하거나 존경스러운 초월자로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떤 민족에게선 혐오와 공포의 상징인 악마로서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거북은 상상의 동물인 용과 달리 세상에 실재하는 동물입니다. 그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여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꼽히지요. 그런데 그 용과 거북을 합쳐놓은 상상의 동물은 무엇일까요?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636호 “서수모양 주전자”가 있습니다. 바로 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모양을 한 주전자입니다. 높이 14cm, 길이 13.5㎝, 밑지름 5.5㎝인 이 주전자는 경주시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것이지요. 흡사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현무(玄武)를 연상시키고 있어 무덤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뜻을 담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무(玄武)는 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과 함께 사신(四神)의 하나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모양새를 보면 뒷머리에 지느러미가 6개 있는데, 쑥 내민 혀, 툭 튀어나온 눈은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등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화도 마니산 줄기가 서쪽으로 쭉 뻗어 내리다 세 발 달린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모습을 닮아 봉우리를 이루룬 정족산(鼎足山)이 있습니다. 그 정족산에는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산성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삼랑성 내(內)에 정남향을 향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년고찰, 바로 전등사(傳燈寺)가 있습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에 자리잡은 전등사는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등사에는 다른 절과는 다른 독특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바로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裸婦像)’ 곧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이 있지요. 부처님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자가 있을까요?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만큼이나 여러 차례 불이 났었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부상은 17세기 말에 만들어졌다고 짐작합니다. 이 나부상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지요.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던 도편수가 절 아래 사하촌 한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도편수는 돈이 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한 뒤안길에는 “이면도로 안전한 교통환경 조성을 위한 제한속도 하향”이란 기다란 펼침막(현수막)이 붙어있었는데 이면도로, 조성, 하향 같은 한자말로 온통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들 가운데 “이면도로”는 국립국어원이 펴낸 《국어대사전》 올림말에 없으며, 대신 <행정 용어 순화 편람(1993년 2월 12일)>에 “‘이면도로’ 대신 순화한 용어 ‘뒷길’만 쓰라”고 되어 있지요. 《국어대사전》에는 “이면도로”가 없는 대신 “이면(裏面)”만 올림말로 설명되어 있는데 그 뜻을 보면 “1. 뒷면, 2.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풀이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면도로”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란 어색한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면도로”보다는 뒷쪽에 있는 길이란 뜻으로 우리말인 뒤안길 또는 속길로 하면 뜻이 명확해지고 어린아이도 알기 쉬운 말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올레길'을 비롯하여 우회로를 뜻하는 '에움길' 같은 아름답고 정겨운 토박이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또한, ‘우로 굽은 길’, ‘좌로 굽은 길’ 같은 말을 도로 표지판에 새기고 있는가 하면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백과사전 격인 책들이 나왔습니다. 먼저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芝峰類說)》이 시작이고, 영조임금의 명으로 1770년에 나온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성호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따위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조선 후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서유구(徐有, 1764~1845)가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책 900여 종을 참고로 하고 시골 마을에서 보거나 수집한 문헌 자료를 정리해서 1827년(순조 27)에 엮어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백과사전의 하나입니다. 《임원경제지》는 농업 일반을 다룬 ‘본리지’, 푸성귀(채소)를 쓴 ‘관휴지’, 꽃을 설명한 ‘예원지’, 의생활에 필요한 농잠ㆍ직조ㆍ염색을 쓴 ‘전공지’, 농사에 가장 중요한 날씨와 절후를 다룬 ‘위선지’, 요리법과 조미료, 술 담그는 법이 있는 ‘정조지’, 몸을 보신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보양법’ 따위가 있습니다. 특히 향촌에서의 삶에 빼놓을 수 없는 여러 예법은 ‘향례지’에 담아 관혼상제, 향음주례, 향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