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는 건안12년(20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그의 초막을 무려 세 번이나 찾아가지요. 그때 제갈량은 유비보다 21살이나 어렸으니 아들뻘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관우와 20년, 장비와는 15년의 격차를 보입니다.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지요. 그런 제갈량의 집에 유비는 묵묵히 세 차례나 찾아갑니다.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유비가 삼국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것도 제갈량이라는 지혜로운 자에게 전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제갈량의 의견과 판단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는 유비의 삼고초려의 영향이 큽니다. 유비ㆍ관우ㆍ장비는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된 사이입니다. 두 아우 관우와 장비는 자신들보다 한참이나 어린 제갈량의 지시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겠지만 형이 삼고초려로 해서 어렵게 얻은 인재니 그 말을 따라주는 데 주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유비의 삼고초려가 없었다면 관우ㆍ장비와의 불화로 인하여 제갈량은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겸손하게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하고 믿어준 자의 편입니다. 지도력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 나라가 망하고, 또 그 궁궐은 동물원이 되고… 불과 백여 년 전 우리 역사에 일어났던 일이다. 지금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이런 슬픈 역사 속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김명희가 글을 쓰고, 백대승이 그림을 그린 이 책, 《동물원이 된 궁궐, 창경궁》은 창경궁이 품고 있는 슬픈 ‘창경원’의 역사를 모르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은 그림책이다. 일제는 궁궐에 있던 소나무를 모두 베고 곳곳에 벚나무를 잔뜩 심었다. 그리고 광복이 되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창경원은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책의 앞부분에는 부모님과 창경원에 놀러 간 한 소녀의 이야기가, 책의 뒷부분에는 창경궁의 역사와 주요 건물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재미와 정보를 함께 얻을 수 있다. 창경궁을 한 번쯤 가보거나 들어는 봤어도,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견주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창경궁은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쪽에 지은 ‘수강궁’을 성종이 증축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성종은 정희왕후, 안순왕후, 소혜왕후 세 대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고, 그래서 나랏일을 돌보는 ‘외전’보다 생활공간인 ‘내전'에 더욱 신경을 썼다. 세종이나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서울 성곽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 서울의 명소입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성북동에 만해 한용운의 유택인 심우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아한 한옥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 까닭은 한용운 선생님이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고 해서 숭인면의 산비탈 북향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고 하지요. 그는 평생 일제의 만행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변절자인 육당 최남선이 찾아왔을 때도 그는 호되게 혼을 내며 말하지요. "내가 아는 육당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소" 한용운 선생님은 결국 북향집인 심우당에서 삶을 마감했는데요. 그때가 광복을 맞이하기 1년 전이니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웅전 벽면에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는 절이 있습니다. 주로 선종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견주어 그린 것인데요. 소를 찾아 나서다 소의 발자국을 보고 소를 발견하여 소를 데려다 기르다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남아 있게 됩니다. 결국에는 소와 함께 자기 자신마저도 잊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곧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 문묘에서 세 왕께 예를 드리니 동궁과 성균관에 봄이 왔구나. 술 단지를 받든 모습이 엄숙하고 자리에 올라 글 읽는 소리가 새롭다. 나이 따라 양보하는 것은 주나라의 선비요 둘러앉아 듣는 이는 한나라의 빈객이라. 나는 직함을 가지고 태만히 한 일이 부끄럽지만 축하를 드리는 소리가 궁궐 안에 가득하네. 이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입학식에 관리로 참석했던 이만수(李晩秀)가 쓴 시다. 효명세자의 입학식은 1817년 3월 11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입학식에는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리들과 성균관에 소속된 유생들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하며” 구경했다. 이렇듯 왕세자의 입학례는 조선왕실의 기쁨이자 나라의 ‘경사’였다. 조선왕실의 공식 후계자가 학교에 갈 만큼 장성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예식이니, 그 위상과 중요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김문식의 이 책, 《왕세자의 입학식-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이런 왕세자의 입학식을 세세히 살펴보며 조선왕조가 후계자 교육에 얼마나 열성을 쏟았는지, 입학식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세상을 살면서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던 종래는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호화로운 묘지 속에 묻히거나, 이름 없는 풀섶에서 인멸되거나, 한 줌 재로 바람에 날려가거나, 영생원 한 귀퉁이의 유골함에 담겨 보관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아무리 전생과 후생을 논하고 사후의 인생을 논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죽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삶도 다 알 수 없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대답한 것으로도 알 수 있지요. 또한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건 강물처럼 인생을 본질적으로 멈출 수 없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생 역시 도도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물은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강물 같은 인생에서 우린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지요 우린 바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2023년 4월 15일 자정 독일의 네카베스트하임 원전이 가동을 멈췄다. 이로써 1969년부터 54년 동안 원전 36기에서 전기를 공급받던 독일은 탈원전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 독일의 탈원전은 정치인의 공적이라기보다는 50년 동안 꾸준히 원전을 반대한 시민운동의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서독(당시는 독일 통일 이전)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에너지 주권을 위한 상징이 되었다. 1974년에 서독 경제부는 1985년까지 원전 50기를 새로 짓고 전력의 50%를 원전으로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4년에 프라이부르크 인근 새로운 원전 부지 주변 주민들이 처음으로 원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원전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1976년 독일 북부 브로크도르프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3만 명이 원전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79년 3월에 발생한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를 계기로 독일 시민들은 원전의 안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7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소련과 핵무기 감축 협상을 진행하면서 서독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결정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91) “지금의 명나라가 있기 전, 그러니까 당나라보다 더 훨씬 앞선 시기인 초나라에 영왕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영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웠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허리가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켜 초요(楚腰)라 불렀단다. …(줄임)… 그래서 나는 마지막 글자는 미녀 갱(妔) 자를 써서 초요갱이라 지었다.” 허리가 가는 초나라의 미녀를 닮은, 조선 전기 한양을 떠들썩하게 한 으뜸 기녀 초요갱은 그렇게 탄생했다. 허구와 사실을 절묘하게 섞어 쓴 이 소설, 박지영이 쓴 《초요갱》에서 주인공 ‘다래’의 첫 정인(情人)인 평원대군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 실제 역사 속 초요갱은 어마어마한 ‘화제의 인물’이었다. 세종의 세 아들, 평원대군, 계양군, 화의군이 모두 그녀에게 반했다. 드라마에나 나올 만한 ‘조선 왕자 삼각관계’가 실제 역사에 펼쳐진 것이다. 황진이도 한 줄 나오지 않는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열여섯 번이나 기록이 실렸으니, 한 시대를 풍미한 으뜸 예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 초요갱의 마음을 얻은 이는 세종의 7남, 평원대군이었다. 소설 전반부에서는 평원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온달 열전이 실려있습니다. 거기에 온달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와 있지요.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기고 우스꽝스러웠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늘 밥을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신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온달이라고 하였다."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요? 온달이 바보였다는 주장은 우온달(愚溫達)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나중에 장군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쓰기엔 쉽지 않은 표현이지요. 가난하여 떨어진 옷을 입고 구걸했다고 해서 바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제로 발달장애인이나 낮은 지능의 소유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진짜 지능이 낮다면 학문과 무예를 익혀 고위직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거나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 온달입니다. 그는 삼국이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였을 때 고구려 장수로 명성을 크게 얻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우직함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민주 사회에서 갈등과 대립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3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각종 행복 물질이 쏟아지게 되지요. 도파민, 엔도르핀, 세로토닌이 그런 호르몬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관계가 시들해지고 나면 더 이상 행복 물질이 쏟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럼, 사랑은 끝난 겁니다. 그러니 부부가 2~30년을 함께 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임은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뇌 속에서 행복을 만드는 물질은 엔도르핀입니다. 엔도르핀은 과거의 행복한 추억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즐거워야 엔도르핀이 형성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오늘, 지금, 이곳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옳습니다. 지금이 즐거워야 행복 물질이 분비되니까요. 내가 아파트를 나서면 인사성이 바른 경비원을 만납니다. 그는 아무리 봐도 힘든 삶인데 나보다 여유롭습니다. 나보다 늙었고 부양가족이 많아 부담 속에 살 텐데도 행복해 보입니다. 옛날엔 가난했어도 행복 지수가 대체로 높았습니다. 그건 가진 것에 만족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무조건 다 행복해야 옳습니다. 1960년대보다 훨씬 잘살고 있으며, 죽으로 연명하는 사람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우리나라에서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치고 ‘오은선’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예! 세계 여성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 고봉 14좌를 전부 오른 분이지요. 그리고 조금 더 아신다는 분이면 국내 여성 처음으로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오른 인물이라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 오은선 씨가 자신의 등정기를 《오은선의 한 걸음》이라는 책으로 냈습니다. 저는 2011년도에 오은선 씨와 불암산을 함께 산행하면서 나눈 이야기를 월간중앙에 ‘오은선 대장과 불암산을!’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은선 씨가 책을 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14좌를 오르는 오은선 씨의 거친 숨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은선 씨는 너무 힘들어 어떤 때는 그냥 한 걸음만 절벽 쪽으로 내딛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었답니다. 그러면 1,000m 이상을 미끄러지며 그대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오죽하면 절벽 쪽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 싶었을까? 그 극한적인 상황을 떠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합니다. 은선 씨가 오른 산 가운데 제일 힘들었던 산은 어떤 산일까요?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