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8월 27일 문화재청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가거도 섬등반도」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섬 모두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신안 가거도’는 나라땅 최서남단이라는 지리적인 상징성이 있지요. 수많은 철새가 봄철과 가을철에 서해를 건너 이동하면서 중간에 잠시 들르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넓게 펼쳐진 후박나무 군락과 다양한 종류의 희귀식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가거도 북서쪽에 있는 섬등반도는 섬 동쪽으로 뻗어 내린 반도형 지형으로서,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봉과 병풍처럼 펼쳐진 바닷가 낭떠러지가 볼만한 광경을 이루며, 특히, 해넘이 경관이 아름답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지요. 가거도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과 《여지도서》, 《해동지도》, 《제주삼현도》 등 고지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 시대의 본래 섬 이름은 가가도(加佳島)이었는데, 다른 한자표기로 ‘가가도(加可島)’라는 기록도 보입니다. 「신안 가거도 섬등반도」의 명승 지정은 마지막 ‘끝섬’의 국가지정문화재 지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지요. 나라땅 최서남단의 가거도는 나라땅의 동쪽 끝인 독도(천연기념물 제336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예전 한겨울 추위를 누비옷으로도 견뎠습니다. 누비는 원래 몽골의 고비 사막 일대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200년쯤 중국과 티베트에서 쓰였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치마, 저고리, 포, 바지, 두의(頭衣), 신발, 버선. 띠 등 옷가지와 이불 따위에 누비가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누비는 보통 보온을 위해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함께 홈질해 맞붙이는 바느질 방법입니다. 그냥 솜옷은 옷을 입을수록 옷감 안에서 솜이 뭉쳐버립니다. 하지만, 누비를 해놓으면 이렇게 뭉치는 일도 없고, 누비 사이에 공기를 품고 있어서 더 따뜻할 수가 있지요. 본래 누비는 스님들이 무소유를 실천하려고 넝마의 헝겊 조각을 누덕누덕 기워서(納) 만든 옷(衣) 곧 `납의장삼(納衣長衫)`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납의가 `나비`로 소리 나다가 이것이 다시 `누비`로 자리 잡은 것이라지요. 여기서 `누비다`라는 새로운 바느질 양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누비는 무늬의 모양에 따라 줄누비, 잔누비, 오목누비 따위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홈집이 촘촘한 잔누비는 홈질줄의 간격이 1밀리미터 정도인데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습니다. 누비는 섬세한 작업인 만큼 정성을 쏟지 않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은 오늘날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는데 장애인에겐 조세와 부역을 면해주고, 죄를 지으면 형벌 대신 면포로 받았으며, 연좌제도 적용하지 않았지요. 또한 시정(侍丁) 곧 활동보조인을 붙여주고, 때때로 잔치를 베풀어주며 쌀과 고기 같은 생필품을 내려주었습니다. 또 동서활인원이나 제생원 같은 구휼기관을 만들어 어려움에 부닥친 장애인을 구제하였지요. 특히 조선시대엔 장애가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조선이 세워진 뒤 예법과 음악을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꼽추였지만 좌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지요. 또 간질 장애인이었던 권균(權鈞, 1464~1526)은 이조판서와 우의정에 오르고 영창부원군에까지 봉해졌으며, 체제공(1720년~1799)은 사팔뜨기였지만 영의정까지 올라 정조 때 큰 공을 세웠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장애인에게 사회분위기가 긍정적이었습니다. 북학파의 선구자 홍대용은 그의 시문집 《담헌서(湛軒書)》에서 “소경은 점치도록 하고, 벙어리와 귀머거리, 앉은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분황로에 가면 사적 제548호 경주 ‘분황사터’가 있습니다. 분황사터는 신라의 대표적인 절 가운데 하나인 ‘분황사’가 있던 곳으로 《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분황사’는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펼쳤던 유서 깊은 절입니다. 또 분황사는 황룡사, 흥륜사 등과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왕경(경주)에 조성되었으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 곧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라고 하지요. 분황사터에 남아있는 유물 가운데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입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白日靑天霹靂聲 푸른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외무총장 등을 지낸 신규식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보고 지은 시입니다. 오늘은 111년 전인 1909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를 깬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등박문을 처단한 날이지요. 아침 9시 이등박문이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잠시 뒤 그가 열차에서 내려 걸어갈 때 안 의사는 권총을 빼들고 이등박문을 향하여 4발의 총을 쏘았고, 4발 모두 명중했습니다. 안 의사는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습니다. 거사 직후 안 의사는 하얼빈 내 일본영사관으로 잡혀갔다가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았지요. 당당했던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등박문을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지요. 이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23일은 24절기의 열여덟째 “상강(霜降)”입니다.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리는 때인데 벌써 하루해 길이는 노루꼬리처럼 뭉텅 짧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면 하룻밤 새 들판 풍경은 완연히 다릅니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수채색 물감으로 범벅을 만든 듯 누렇고 빨갛게 바뀌었지요. 그리고 서서히 그 단풍은 하나둘 떨어져 지고 나무들은 헐벗게 됩니다. 옛사람들의 말에 “한로불산냉(寒露不算冷), 상강변료천(霜降變了天)”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한로 때엔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상강 때엔 날씨가 급변한다.”라는 뜻입니다. 상강이야말로 가을 절기는 끝나고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이지요.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진 날 한 스님이 운문(雲門, 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운문 선사는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고(體露), 천지엔 가을바람(金風)만 가득하겠지.”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상강이 지나면 추위에 약한 푸나무(식물)들은 자람이 멈추지요. 천지는 으스스하고 쓸쓸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로 들어가는데 들판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겨레는 한옥이란 주거공간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한옥은 앞에 마당, 뒤뜰엔 꽃밭이나 푸성귀밭(채소밭)을 두었지요. 또 마당에는 잔디를 깔거나 꽃, 나무들을 심지 않고 빈 채 놓아둡니다. 시골에 잇는 오두막집이라도 이 마당은 으레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마당을 빈 채 놓아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렇게 구조를 만든 가장 큰 까닭은 바로 자연을 활용한 과학적 삶의 슬기로움입니다. 마당을 비워두면 여름에 햇볕에 달궈져 뜨거운 공기가 만들어져 위로 올라갑니다. 이때 마당과 꽃과 나무가 있는 뒤뜰 사이엔 기압차가 생겨 바람이 불게 되지요. 그 바람은 대청마루를 빠르게 통과함으로써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빈터로 된 마당은 수시로 다양한 삶의 형태가 펼쳐지는 곳으로 다시 태어나곤 합니다. 우선 마당은 평소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마당 한 편에 놓인 평상은 사랑방이 되어 구수한 이야기가 오가기도 하지요. 또 집안에 혼례가 있으면 혼례식장, 상사가 나면 장례식장이 되기도 하며, 가을철 추수 때가 되면 마당에서는 타작도 합니다. 한 가지 더 마당은 조명장치의 구실도 하지요. 한옥은 처마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는 극락보전 후불 벽화인 보물 제1313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가 있습니다. 이 벽화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뒤 유려하고 간결한 맛으로 그린 관음보살벽화로, 1476년에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입니다.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습니다.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지요.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있지요.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앉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는 ‘원각사터 10층 석탑’이 있습니다. 높이 12m나 되는 이 탑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어서 백탑(白塔)이라는 별명이 생겼지요. 정조 때 이 탑골 주변의 지식인들이 모여 ‘백탑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대 집권세력이던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인 박지원ㆍ홍대용과 비록 서얼이지만 세상의 폐단과 새로운 학문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차별의 벽을 넘어 우정을 나누고 조선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조(正祖) 시대인 1776~1800년간 힘을 얻었던 백탑파(白塔派) 선비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하며 이들은 또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이기도 합니다. 청나라 문명의 우수성을 깨닫고 그것을 배우자고 주장한 실학자(實學者)들이지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등이 그들이 대표적인 책입니다. 특히 백탑파는 당시 지배이념이면서 관념으로 흐르던 주자 학설을 좇는 것을 거부하고 자주적 학문의 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그러므로, 조선말의 말본을 닦아서 그 이치를 밝히며, 그 법칙을 드러내며, 그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다만 앞사람의 끼친 업적을 받아 이음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계계승승(繼繼承承)할 뒷사람의 영원한 창조활동의 바른 길을 닦음이 되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함이 되는 것이다.” 위는 1894년 오늘(10월 19일) 태어난 외솔 최현배 선생이 펴낸 《우리말본》 머리말에서 있는 말입니다. 최현배 선생은 1929년 조선어 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33년까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이루어내기 위해 진력하였고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42년 선생은 한글을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펴냈는데 이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광복될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였지요.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