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속담에는 “원님 덕에 나발 분다.” 또는 “사또 덕에 나발 분다.”라는 것이 있지요. 원님은 자신이 필요하여 행차하지만, 행차 때 부는 나발 덕에 우연히 이익을 얻을 때 곧 윗사람 덕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또 다른 속담으로는 “사또 떠난 뒤에 나팔 분다”도 있습니다. 이 뜻은 제때 안 하다가 뒤늦게 대책을 세우며 서두름을 핀잔하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춘향가 가운데 ‘어사출도’ 대목을 보면 “사령은 나발 잃고 주먹 쥐고 홍 앵 홍앵‘이란 부분이 있어 참 재미납니다. 여기서 “나발”은 무엇일까요? “나발(喇叭)”은 놋쇠로 된 긴 대롱을 입으로 불어 소리 내는 관악기입니다. 원래 이름은 한자로 “喇叭”이어서 “나팔-喇(나)”, “나팔 叭(팔)”로 ”나팔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보통은 센소리를 피해 “나발”이라고 합니다. 나발은 지공(손가락으로 막는 구멍)이 없어 한 음을 길게 부는 악기인데 태평소, 나각, 자바라, 징, 북과 함께 대취타(조선시대 군악대)에 편성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풍물굿에도 쓰입니다. 여기서 한자로 “螺髮”이라고 쓰는 또 다른 나발이 있습니다. 이는 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기 롯데백화점의 광고판이 영어로 도배되었습니다. 광고판 어디를 봐도 한글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광고를 하면서 영어를 전혀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 주문할 수 없겠지만 한국인 상대의 광고를 하면서 마치 미국의 광고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 문제일 것입니다. 원래 롯데백화점 광고가 대부분 영어를 도배하곤 했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영어 일색이진 않았는데 이번엔 참으로 심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있는 신세계백화점의 광고판은 뜻밖에 SHINSEGAE란 자신들의 상호를 빼면 모두 한글 일색입니다. 그것도 흔히 쓰는 ’추석’이란 한자말 대신 우리말 ‘한가위’를 쓰고 그밖에 감사와 명절이란 한자말 말고는 모두 토박이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 광고판은 분명 한글이 주인이어서 정말 롯데백화점 광고판에 견주면 크게 칭찬해야 할만한 일입니다. 10여 년 전 서울에 온 중국 연변대학교 총장은 ”만주족은 말에서 내렸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은 사람이 타는 말도 뜻하지만, 사람이 입으로 하는 말도 뜻하는 것이어서 만주족이 자신들의 말을 버렸기 때문에, 만주족의 흔적이 사라졌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천하의 명필이라는 추사 김정희. 그는 그렇게 으뜸 명필이 되기까지 그가 낯선 유배지에서 쓰라리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부단한 노력을 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날 때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도 붓을 들었으며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붓을 들었다고 합니요.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반가운 편지와 소식이 올 때는 자다가도 일어나 붓을 들었습니다. 한번은 친구 김유근이 자신의 벼루에 추사의 글씨를 새기겠다고 글씨를 부탁하자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글씨체를 연습했다고 하지요. 또 후배 윤정현이 호를 써달라고 하자 윤정현이란 인물에 걸맞은 글씨체를 찾으려고 고민하다 무려 30년 만에 글씨를 써주었을 정도로 자신의 글씨에 철저했습니다. 그는 공부 과정에서 중국의 비석 글씨 309개를 베끼고 베끼면서 글씨를 담금질했고 일흔 살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벼루 열 개를 갈아 치우고, 붓 천 자루를 닳도록 썼다고 하지요. 명필이란 이름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의 전직 외교관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잔혹사를 간직한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에 관한 책을 출판한다. 오는 10일 출간 예정인 《기린(평화 시대를 상징하는 상상 속 동물)이여》라는 귀무덤 관련 일본어 서적을 출판하는 주인공은 아마키 나오토(天木直人ㆍ73) 전 주 레바논 일본대사다. 그는 “일본이 과거에 대해 사죄하고 미래를 향해 (한일이) 협력해 나가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책을 출판했다."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이 (역사를) 알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연합뉴스에 보도된 이야기입니다. 한일 간 사이가 극도로 험악해진 상황에서 저런 양심적인 일본인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마키 씨가 말하는 것에 대해 결정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토의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며, 이를 코무덤(鼻塚ㆍ비총ㆍ하나즈카)으로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코무덤이나 귀무덤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귀를 자른 것과 코를 자른 것은 잔학성 면에서 견줄 수가 없는 것이며, 일본 오사카성(풍신수길이 쌓았고, 지금 그에 관련된 전시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은 광풍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과 같이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게 부끄러운 일을 전혀 범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옷감 몇 자, 동전 몇 잎 때문에 잠깐이라도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호연지기가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느냐 귀신이 되느냐 하는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극히 주의하도록 하라” 이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전남 담양에 가면 그 유명한 명승 제40호 소쇄원이 있습니다. 소쇄원(瀟灑園)은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조선전기 문신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출사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곳으로,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원입니다. 소새원을 들어서면 계곡을 따라 먼저 광풍각(光風閣)이 있고 그 위에 제월당(霽月堂)이란 조그만 집이 있습니다. 광풍각은 소쇄원 집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지은 것으로 너럭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떡본 또는 떡손ㆍ병형(餠型)이라고도 하는 떡살은 누르는 면에 오목새김(음각)이나 돋을새김(양각) 무늬가 있어서 절편에 찍으면 예쁜 무늬가 생깁니다. 적절한 크기로 잘라낸 떡에 물기를 묻혀서 떡살로 도장을 찍듯이 누르면 되는데 이렇게 찍은 떡은 어느 정도 굳으면 그 무늬가 선명하게 나타나지요. 무심한 절편에 어떤 뜻을 가진 무늬를 찍어 넣어 그저 떡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선물이 됩니다. 고려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진 떡살은 재질에 따라 나무떡살과 자기떡살로 나눕니다. 단단한 소나무, 참나무, 감나무, 박달나무 따위로 만드는 나무떡살은 1자 정도의 긴 나무에 4∼6개의 각기 다른 무늬를 새긴 것입니다. 한편, 사기, 백자, 오지 같은 것으로 만드는 자기떡살은 대개 보통 5∼11㎝ 정도의 둥근 도장 모양으로, 손잡이가 달려서 잡고 꼭 누르게 되어 있지요. 특히 궁중에서 쓰던 사기떡살은 고급스러운 백자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떡살의 무늬는 선원, 꽃당초, 고기, 나비, 거북의 등딱지, 문구름, 천도, 석류, 박쥐, 포도, 국화 같은 꽃과 동물들이 많은데 그밖에 기하학문, 십장생문, 칠보문, 태극문, 격자문, 창살문, 길상무늬 따위도 많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 주변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착해도 다른 착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법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법이란 건 여간 어렵지 않아서 일반인은 다가서기 쉽지 않지요. 그래서 현대사회에선 변호사가 일반인을 대신해서 법에 관한 업무를 맡아주고 있습니다. 다만, ‘전관예우’라던지 하는 것을 앞세워 정의롭지 못하게 소송이 끝나는 수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어땠을까요? 법 정보가 모두 한자로만 되어있던 조선시대 역시 공부를 한 사람을 뺀 일반 백성은 다른 사람이 대신 법 관련 일을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을 ‘외지부(外知部)’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식 관원이었던 도관지부와 달리 외지부는 관원이 아니면서도 소송인에게 대가를 받고 소장을 대신 작성해주거나 법률 자문을 통해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품삯을 받고 대리소송을 하기도 했고, 사람을 부추겨 소송을 일으키거나, 법률 조문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옳고 그름을 뒤바꾸어 송사를 어지럽히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임금이 내리는 문서까지 위조하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맑은 물가 습기 많은 자리 몇 방울 물 흐르는 바위틈에 이끼를 벗하고, 작년에 떨어진 낙엽도, 마른 솔잎도 몇 개 어우러져 피는 물매화 혼자라고 외로운 것은 아니다. 먼 인적 아랑곳없이 쑥부쟁이 개미취도 지켜볼 뿐” 최상만 시인의 시 <물매화>입니다. ‘물매화’, 먼 인적 아랑곳없이 혼자라고 외롭지 않게 피어있지만,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정원을 가꾸던 선녀가 땅에 떨어져 꽃이 되었다고 하지요. 물가에서 자라며 매화를 닮았다 하여 “물매화”인 이 꽃은 풀매화, 풀매화초라고도 합니다. 특히 물매화 가운데 암술에 빨간빛이 묻어있어 별명이 “립스틱물매화”인 녀석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어 사진작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물매화는 쌍떡잎식물로 여러해살이풀이지요. 산자락의 볕이 잘 드는 습지에 자라며, 키는 10~40cm 정도로 자그마한 녀석입니다. 꽃은 7월에 피기 시작하여 9월 중하순 절정기에 달합니다. 꽃의 지름은 2∼2.5cm이고, 꽃받침조각은 5개이며 긴 타원 모양의 녹색이지요. 꽃잎은 5개고 길이 7∼10mm의 넓은 달걀 모양입니다. 한방에서는 뿌리만 빼고 꽃과 줄기, 잎 모두 매화초(梅花草)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단아한 모습의 조선 사대부가 여성은 아침마다 얼레빗과 참빛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습니다. 이때 머리를 빗는 도구들은 빗접이란 도구에 담아 두었지요. 빗접은 모양에 따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빗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창호지 따위를 여러 겹 붙여 기름에 절여서 만든 소첩(梳貼)과 나무로 짜서 만든 소갑(梳匣)이 있습니다. 또 빗접 자체가 고비 겸용으로 만들어져 벽에 걸어둔 것을 빗접고비라 합니다. 빗접은 쓰임새에 따라 크고 작은 서랍이 여러 개 달립니다. 또 꾸민 방법으로 나누면 먹감나무ㆍ느티나무ㆍ오동나무 따위로 만들어 나뭇결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개를 붙여 화려하게 꾸민 “나전빗접”, 쇠뿔로 장식한 “화각빗접”이 있습니다. 그 무늬는 대개 십장생ㆍ원앙ㆍ연꽃ㆍ산수 따위로 여성들의 기호와 취향에 맞는 것들입니다. 빗접은 거울이 없으므로 면경(面鏡, 주로 얼굴을 비추어 보는 작은 거울)이나 좌경(座鏡, 앉아서 볼 수 있게 경사지게 만든 거울)을 따로 있어야 하지요. 항상 경대와 함께 머리맡에 두고 썼던 빗접은 빗빗솔(빗살 사이에 낀 때를 빼는 솔)ㆍ빗치개(가르마를 타거나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 쓰는 도구)ㆍ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금년 더위는 넘치고 가혹했는데 미친듯한 장마가 더 때려서 고생했네 세월이 어찌 바뀌지 않는가 했더니 속이지 않고 백로가 찾아 왔구나. 이우현 시인의 소박한 시 “백로날에 한편”이라는 시입니다. 정말 세월이 어찌 바뀌지 않는가 했더니 정말 속이지 않고 백로가 찾아 왔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열다섯째로 흰 이슬이 내린다고 하는 백로(白露)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때만 되면 편지 앞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시고”라는 인사를 꼭 넣었습니다. 그것은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절기는 포도가 제철일 때여서 그런 것이지요. 포도는 예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생각해서 맨 처음 따는 포도는 사당에 고사를 지낸 다음 그집 맏며느리가 통째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포도를 먹으면 망측하다고 호통을 들었지요. 또 이때쯤 되면 포도지정(葡萄之精)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포도를 먹일 때 한알 한알 입에 넣고 씨와 껍질을 발라낸 뒤 아이의 입에 넣어주던 정을 일컫습니다. 특히 백로 때는 밤 기온이 내려가고,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연해집니다. 원래 이때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