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인생 가운데 잠자는 시간이 무려 1/3이나 차지한다고 하여 잠은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과입니다. 따라서 잠잘 때 필요한 베개는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전통적으로 쓰던 베개는 속에 왕겨ㆍ메밀껍질 등을 넣고 속싸개로 봉한 다음, 흰색 무명으로 홑청을 만들어 겉을 싼 것이지요. 베개의 양쪽 끝은 둥글게 하든가 각진 모양으로 베개의 형태를 잡아주거나 베개를 장식하는 용도인 베갯모가 있습니다. 베개는 재질이나 무늬에 따라 그 베개의 이름이 결정되었지요. 우선 재질에 따라 자수를 놓은 수침(繡枕), 자개를 박은 나전침(螺鈿枕), 쇠뿔로 꾸민 화각침(華角枕), 상아로 만든 상아침(象牙枕), 도자기로 만든 도침(陶枕) 등이 있습니다. 특히 베갯모에 수를 놓은 자수베개는 왕실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였으며 조선시대 여성이 시집갈 때 준비하는 대표적인 혼수품이었지요. 베갯모에 놓는 자수 무늬는 대부분 자손 번창과 부귀 장수를 뜻하는 것으로, 부귀를 뜻하는 모란 무늬, 복을 나타내는 박쥐,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호랑이, 다복한 가정을 꿈꾸는 봉황 한 쌍과 새끼 봉황 일곱 마리의 구봉문(九鳳文),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자 한복 가운데 ‘고쟁이’라는 속옷은 남자바지와 비슷하지만, 밑이 터져있고, 가랑이 통이 넓습니다. 이 고쟁이 종류 가운데는 ‘살창고쟁이’라는 것이 있는데 경북지역에서 많이 입던 여름용 고쟁이입니다. 살창고쟁이는 허리둘레를 따라 약 6㎝ 폭에 15~20㎝ 길이의 직사각형 구멍을 10개 이상 낸 다음 구멍의 테두리를 감침질로 정리하고 허리말기(치마나 바지의 허리에 둘러서 댄 부분)를 단 속바지지요. 살창고쟁이는 그 독특한 모양 때문에 다른 이름들도 있습니다. 살창처럼 생겼다고 ‘살창고쟁이’지만, 문어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문어고장주’, 가위로 잘라냈다는 뜻으로 사투리 가새로 된 '가새고장주‘라고도 합니다. 새색시가 시집갈 때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여러 벌의 옷을 겹쳐 입어서 몹시 더웠는데 조금이라도 시원하라고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입혀 보낸 것입니다. 또 시집살이도 그 옷처럼 시원하게 살라는 바람이 있었으며, 시집가는 딸의 행복을 비는 친정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또 살창고쟁이의 뚫린 구멍으로 신부의 흉이 새어나가 시집살이가 수월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이 살창고쟁이는 1930년대까지 입다가 이후부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14호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청자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참외모양의 꽃병으로, 높이 25.6㎝, 아가리지름 9.1㎝, 밑지름 9.4㎝의 크기입니다. 긴 목 위의 아가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것이 참외꽃 모양이고, 목의 가운데에는 2줄의 가로줄이 백토(白土)로 상감되어 있습니다. 몸통은 참외 모양으로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 골이 지어있습니다. 목의 바로 아래에는 8개의 꽃봉오리 띠가 백상감되어 있고, 몸통의 가운데에는 여덟 개의 면에 모란무늬와 국화무늬를 번갈아 가며 1개씩 장식하였으며 몸통의 아랫쪽은 연꽃이 흑백상감 되어 있습니다. 아래부분에는 주름치마 모양의 굽이 붙어있지요. 유약은 그다지 고르지 않고 빛깔도 조금 어두운 편이지만, 전체적인 비례나 균형에 있어 안정된 모습이며, 어색한 점들이 도리어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평가입니다. 이와 같은 병 종류는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가마터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모양이 비슷한 것으로는 국보 제94호인 청자 참외모양 병이 있습니다. 이런 모양의 병은 중국 송대 자주요ㆍ경덕진요ㆍ요주요 등에서 제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8월 19일부터 조선왕실 대표 100가지 보물을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www.gogung.go.kr)을 통해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공개하는 ‘소장품 100선’은 조선왕실과 대한제국황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유물들이며, 지난 15년 동안 국립고궁박물관이 새로운 소장품의 확보에 쏟아 온 노력과 열정 그리고 국내 유일 고궁박물관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성과를 엿볼 수 있는 귀한 문화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보물 가운데는 보물 제1618-2호 국새 황제지보도 있습니다. 그밖에 대한제국 고종황제 어새 등 어보와 인장 16가지가 함께 소개됩니다. 여기서 임금의 도장에는 국새와 어보가 있는데 어떻게 다를까요? 이 두 도장은 크게 쓰임새에서 다릅니다. 먼저 국새는 조정 문서에 찍는 행정용 도장입니다. 왕위 계승을 포함한 공식 의전에도 쓰였고, 임금이 행차할 때 맨 앞 가마에 실어 위엄을 과시하거나 할 때도 쓰였는데 국새는 국내 인사 발령이나 공무 처리에 쓰는 신보(信寶)와 외교문서에 찍는 행보(行寶)로 나뉘었습니다. 국새는 옥새ㆍ국인ㆍ새보ㆍ대보 등으로도 불렸는데 국새의 손잡이는 거북이나 용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2001년 우리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조수미의 노래 <나 가거든>을 들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통곡을 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4년 MBC “K-POP” 프로그램에서 젊은 가수 정은지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가슴 속으로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1895년 오늘(8월 20일)은 ‘을미사변’ 곧 대한제국 국모 명성황후가 일제의 “여우사냥”이란 음모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당한 날입니다. 청ㆍ일 전쟁의 승리로 기세가 올랐던 일본은 명성황후를 조선 침략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제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토오 가츠아키가 쓴 칼 히젠도(肥前刀)가 일본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에 보관돼있습니다. 토오 가츠아키는 1908년 일본으로 돌아가 이 히젠도를 쿠시다 신사에 기증했는데, 이 히젠도를 기증할 때 만든 문서에는 ‘이 칼로 왕비를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히젠도의 칼집에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곧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있어 히젠도가 명성황후를 시해할 때 썼던 칼임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지난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00~200년 전 우리 겨레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당시는 카메라가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전하는 그림으로 겨우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金得臣) 등의 풍속화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은 우리에게 1,500여 점이 넘는 풍속화를 남겨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100년 전 사람들의 풍속을 잘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지난 5월 20일부터 오는 10월 5일까지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 특별전이 열리고 있지요. 그리고 어제 8월 18일에는 이 특별전 연계 비대면 학술대회를 공식 유튜브 채널(www.youtube.com/tnfmk)로 연 바 있습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1976년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현 독일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의 동양학부에서 근무하며 유물을 정리하다 기산풍속화를 발견하고 처음 국내에 소개한 조흥윤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의 회고담을 들을 수 있어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경기민속학회 정형호 교수는 <기산풍속화의 분류에 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가운데 줄임)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이는 1960년대 대표적 민족시인의 한 사람인 신동엽 시인의 대표시 <껍데기는 가라>입니다. 1930년 오늘(8월 18일)은 신동엽 시인이 태어난 날입니다. 이 시에서 ‘껍데기’는 무엇일까요? 거짓된 모든 것, 부패한 것, 억압된 것, 외세와 반민족적인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시에서 시인은 ‘껍데기’를 여섯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모든 쇠붙이는 가라며,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염원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1967년 <신구문화사>가 펴낸 《현대문학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을 실음으로써 확고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펜클럽 작가기금”을 지원받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 신작 전집” 5권 《3인 시집》에 4천8백여 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하며, 그의 문단 내에서의 위치가 일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틀 전은 더위가 한고비로 치닫는다는 ‘말복’이었습니다. 장마가 지나고 이제 불볕더위가 한창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를 감상해보겠습니다. 그림 앞쪽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곳에는 조그마한 초가 하나가 있고 초가집 창문에는 맨 상투를 튼 한 선비가 외로이 앉아 있는 옆모습이 보입니다. 초가 뒤쪽으로는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겨울나무가 솟아 있고, 그 뒤로 그려진 산들은 눈이 쌓여 하얗게 등성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림 위쪽에는 “산과 시내가 조용하여 찾아오는 이 없으니, 임포의 집이 어디인지 물어나 볼까〔溪山寂寂無人到 試問林逋處士家〕”라는 화제가 있고, 다음에 ‘소치(小癡)’라는 호와 ‘허련지인(許鍊之印)’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 그림이나 글씨를 옴폭하게 파내서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도장)과 ‘소치(小癡)’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붉게 나오는 사각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로써 글씨와 그림 모두 허련의 작품임을 알게 합니다. 이 그림에 나타나는 산들은 하얗게 눈이 쌓인 설경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큰집을 지어 대사례 때 쓰는 활ㆍ화살과 여러 가지 기구를 간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각의 이름을 ‘육일각(六一閣)’이라 했으니, 대개 활쏘기는 육예(六禮)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영조실록》 영조 19년(1743년) 윤4월 7일의 기록으로 ‘활쏘기’는 유교경전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여섯 가지 기예(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붓글씨, 수학) 가운데 하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낸 뒤 명륜당(明倫堂,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에서 과거시험을 본 후 임금과 신하가 함께 활쏘기 곧 ‘대사례(大射禮)’를 행했지요. ‘활쏘기’는 우리 겨레가 고대로부터 주요한 무술의 하나로 생각해왔음은 물론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기품 있는 운동 또는 놀이로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었는데 문화재청은 이 ‘활쏘기’를 지난 7월 30일 새로운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영조임금은 평소 “공자가 이르길 활쏘기로 경쟁하는 것이 군자답다.”라고 하여 정신수양으로써 활쏘기를 강조할 정도였지요. ‘활쏘기’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狩獵圖)>, 《삼국지(三國志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동아일보 1935년 8월 13일 치에는 “본보 창간 15주년 기념 5백 원 장편소설 심훈 씨 작 <상록수> 채택”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심훈 작가의 <상록수(常綠樹)>가 당선된 것입니다. 이후 <상록수>는 그해 9월 10일부터 이듬해인 1936년 2월 15일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상록수>는 경기도 안산 샘골에서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대에 처녀의 몸으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애쓰다가 26살에 요절한 실존인물 최용신(崔容信) 애국지사를 그린 작품입니다. 심훈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붓으로 밭을 일군다.”라는 뜻의 필경사(筆耕舍)란 집필실을 손수 설계하여 짓고 이곳에서 '상록수'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완성하고 난 이듬해 당시 유행하던 장티프스에 걸려 그만 안타깝게도 36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지요. 당진 부곡리 필경사에는 그의 무덤과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유작품 따위가 전시되어있습니다. 이 작품은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과 당시 농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