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국방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만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도 행복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이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겨레의 지도자며, 나라의 큰 어른 김구 선생은 광복 4년 뒤인 1949년 오늘 (6월 26일) 1945년 11월 4일부터 1949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로 썼던 경교장(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형을 면제받습니다. 그리곤 현역으로 복귀한 뒤 전역하고 군납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이는 대단한 배후를 짐작하게 하는 정황일 것입니다. 이렇기에 세간에서는 많은 배후설이 나돌았습니다. 특히 국내에 지지세력이 별로였던 이승만이 가장 큰 위협이라 여겨 선생의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과 암살범 안두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백성들이 불행하게도 거듭 흉년을 만난 데다가 돌림병까지 겹쳐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몹시 가난하여 잇따라 죽고 있으니, 이것만도 매우 참혹하고 불쌍하다. 그런데 또 제 때에 주검을 묻지 못하여 주검과 뼈가 도로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족히 화창한 기운을 침해하여 재앙을 초래할 만하다. 고요히 그 허물을 생각하면 내 실로 부끄럽고 마음 아프다." 《순조실록》 34년 1월 24일의 기록으로 흉년에 돌림병까지 겹쳐 많은 백성이 죽어가고 그 주검이 길거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처참한 상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는 돌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 조정에서는 한성과 지방에 여제단(癘祭壇)을 설치해 돌림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달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을 피막에 수용, 격리하고, 돌림병이 지나간 마을을 불태우는 게 고작이었지요. 또 절에서는 비명횡사했거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을 위해 수륙재(水陸齋)를 지내주었습니다. 그런데 수륙재를 지낼 때는 ‘감로도(甘露圖)’라는 불화를 걸어놓는데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의 감로도를 보면 한가운데에 아귀(餓鬼)가 등장합니다. 아귀는 먹으려는 음식이 모두 불로 변해버리는 형벌을 받았기에 항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순종비(純宗妃) 윤황후(尹皇后)가 영친왕비(英親王妃)에게 내려주었다는 <영친왕비 쌍학문 자수 두루주머니>가 있습니다. 주머니 가운데에는 두 마리 학이 정면을 향하여 날아들어 긴 목을 서로 부드럽게 감고 있는 모습을 수놓았지요. 학 주변은 구름무늬로 채웠는데, 안은 금사로 메우고 무늬 가장자리를 역시 금사로 마무리했습니다. 주둥이는 주름을 잡고, 좌우로 구멍을 뚫어 남색 끈을 꿰고 거기에 매듭을 장식하여 양쪽으로 늘어뜨려 붉은색 금사로 가락지를 끼워 마무리하였지요. 주머니는 자질구레한 물건이나 돈 따위를 넣고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꾸미개로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녔는데, 특히 대한제국 말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조끼를 뺀 다른 한복에는 물건을 넣을 만한 호주머니가 없어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주머니 가운데 아래는 둥글고 위는 모진 것인데 입구에 잔주름을 잡아 오므리는 주머니를 두루주머니라 합니다. 두루주머니 가운데서도 특히 오방색 곧 노랑, 파랑, 하양, 빨강, 검정의 5가지 빛깔을 써서 아름답게 만든 것이 오방낭자(五方囊子) 곧 오방 두루주머니입니다. 여기서 오방색이란 음과 양의 기운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흔한 모습이 아닌 독특한 모양의 석탑이 있는데 바로 국보 제102호 충주 정토사터 “홍법국사탑(弘法國師塔)”이 그것입니다. 흔히 석탑의 몸돌들을 보면 네모난 모양인데 견주어 약간 찌그러진 공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승탑입니다. 등근 몸돌에는 가로ㆍ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로 꾸몄습니다. 또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飛天像)이 조각되어 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높이 2.55m의 이 탑은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탑으로, 홍법국사는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禪)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大禪師)를 거쳐 목종 때 국사(國師)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탑은 원래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박랍회)를 경복궁에서 열면서 같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초기 안평체의 이용(李瑢, 안평대군), 중기 석봉체의 한호(韓濩, 석봉), 말기 추사체의 김정희와 더불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룩한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입니다. 전남 구례의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에는 그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쓴 ‘智異山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는 편액이 걸려있지요. 절 천은사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였는데 숙종 때 고쳐지면서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고 해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泉隱寺)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그 뒤 원인 모르게 불이 자주 일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는데 이광사 글씨의 편액을 붙인 뒤로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고요한 새벽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현판에서 신비롭게도 물소리가 들린다고 하니 당시 이광사의 글씨는 신비스러운 경지에 다다른 것이 분명하지요. 이광사는 글씨를 쓸 때 소리꾼에게 노래를 시켜 노랫가락이 맑고 씩씩한 우조(羽調)면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쓰고, 평조(平調)면 글씨도 평화롭고 담담한 분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레 일요일은 24절기 가운데 열째 절기인 ‘하지(夏至)’입니다. “하지가 지나면 오전에 심은 모와 오후에 심은 모가 다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농촌에서는 하지 무렵 모심기를 서두르는데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었기에 비가 오지 않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지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지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기우제”가 무려 3,122건이나 나올 정도입니다. 기우제의 유형은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산 위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산에서 불을 놓으면 타는 소리가 천둥 치는 소리같이 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며, 연기를 통해 천신에게 기원을 전한다고도 합니다. 또 신을 모독하거나 화나게 하여 강압적으로 비를 오게 하기도 합니다. 부정물은 개, 돼지의 피나 똥오줌이 주로 쓰이지요. 전라도 지방에서는 마을 여인네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일제히 오줌을 누면서 비를 빌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짚으로 용의 모양을 만들어 두들기거나 끌고 다니면서 비구름을 토하라고 강압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용서받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픈 생활에서 때때로는 웃어도 보아야겠다. 웃어야 별수는 없겠지마는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것도 아니다. 우리는 형편도 그렇게 되지 못하였지만 웃음을 웃을 줄도 모른다. 자! 좀 웃어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너털웃음 웃어보자. 그렇다고 아픈 것을 잊어서도 아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써 1년이나 전부터 취미와 과학을 갖춘 잡지 하나를 경영해 보자고 생각하였었다.“ 이를 보면 마치 지금 우리의 상황을 두고 독백하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는 1926년 11월 1일 자로 창간된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의 편집후기인 〈여언(餘言)〉의 일부분입니다. 《별건곤》은 3·1만세운동이 낳은 큰 잡지 《개벽(開闢)》이 1926년 8월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폐간당하자 그 대신 나온 잡지이지만, 《개벽》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하여 취미와 실익을 위주로 한 대중잡지였지요. 특이한 《별건곤》이란 제호를 보면 ‘건곤(乾坤)’은 ‘천지(天地)’와 같은 뜻이고 보니 ‘별천지(別天地)ㆍ별세계(別世界)’ 쯤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별건곤》이 취미잡지라고는 하지만 그 창간호 여언(餘言)에, 취미라고 무책임한 독물(讀物, 읽을거리)만을 늘어놓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월하노인과 함께 가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하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내외가 처지를 바꾸어서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나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그대가 나의 이 슬픔을 알게 할까? 이는 추사 김정희의 <도망(悼亡)> 곧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함’이라는 한시입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는 사이 그의 나이 57살인 1842년 11월 13일 본가 예산(禮山)에서 아내 예안 이씨가 죽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추사는 계속 아내에게 편지를 썼지요. 그 가운데는 특히 제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젓갈 등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추사의 한글편지는 40통인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아내에게 쓴 것이라고 하지요. 부인이 죽은 지 한 달이 지난 뒤인 12월 15일에야 부인이 죽었음을 안 추사는 죽은 부인에게 반찬 투정했음을 알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곤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함’이란 한시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혼인을 관장하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을 데리고 저승에 가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하여 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옛사람들은 집안 곳곳에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집을 다스리는 성주신을 비롯하여 부엌에 있다는 조왕신, 장독대의 터주신은 물론 심지어 측간(뒷간)에도 신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한, 문에도 신이 있는데 이 신은 문신(門神)으로 문전(門前) 또는 수문장신(守門將神)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특히 제주도 사람들은 이 문신이 늘 문을 지켜서 집안의 모든 일을 수호한다고 생각하여 아주 중요한 신으로 모셨지요. 그런데 문신에게 굿을 할 때 외우는 “문전본풀이”에 따르면 “아버지는 집의 출입로에 대문 대신 가로로 걸쳐놓는 정낭의 신이 되고, 어머니는 부엌의 조왕신이 되고, 계모는 측간신이 되고, 아들 일곱 형제 가운데 첫째에서 다섯째까지는 오방토신(五方土神)이 되어 집터를 지키고, 여섯째아들은 뒷문전이 되고, 똑똑하고 영리한 막내아들은 일문전(마루방 앞문 신)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이 “문전본풀이”를 바탕으로 조왕(부엌)과 측간은 멀리 띄어서 지었는데 어머니(부엌신)와 계모(측간신)를 떼어 놓으려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측간의 돌 하나 나무 하나도 부엌에 가져오지 않는 관습이 있습니다. 지독한 여자들의 질투를 고려하여 집을 지은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쪽 찐 머리에 똬리 얹어 / 함지박 이고 어머니 우물가는 길 / 누렁이 꼬리 흔들며 따라나서고 / 푸른 하늘 두레박에 넘실거릴 때 / 이남박 가득 하얀 햅쌀 / 일렁이며 돌 고르던 마음 / 아! 어머니 마음 이는 신수정 시인의 <이남박>이란 시입니다. ‘이남박’은 예전엔 어느 집에나 있던 물건입니다. 쌀, 보리 같은 곡식을 씻거나 돌을 일 때 쓰는 물건이지요. '이남박'을 북한에서는 '쌀함박', 강원도는 '남박' 또는 '쌀름박', 경상북도는 '반팅이'라고 불렀습니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대체로 윗지름 30∼70㎝, 깊이 15㎝, 바닥지름 15∼20㎝가량이고, 안쪽에는 여러 줄의 골이 가늘게 패어 있어서 쌀을 씻을 때 골이 진 부분에서 가벼운 마찰이 생겨 돌 등을 걸러내고 곡식을 깨끗이 씻을 수 있지요. 지금은 ‘석발기’라는 돌 고르는 기계가 있어 쌀에 돌이 섞이는 일이 없지만, 예전엔 자그마한 돌이나 잔모래가 으레 섞이곤 해서 쌀을 잘 일어야 했기에 이남박은 꼭 있어야 하는 조리기구였습니다. 한 그릇의 밥이 밥상에 오르려면 우물가로 함지박에 쌀을 이고 나가 조리로 인 다음 이남박에 담아 졸졸졸 물을 여러 번 흘려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