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즈음은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도를 배워서 성인(聖人)의 정밀하고도 미묘한 경지를 엿보고,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변하여 천고(千古)를 통해 판가름 나지 않은 안건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호방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빼어난 글을 구사하여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 간의 세 가지 유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어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시문을 짓는 학문을 가지고 견주어 논의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이는 1814년(순조 14)에 펴낸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들어 있는 《일득록(日得錄)》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정조는 “요즈음은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도 지적하는 말로 들립니다. 사실 전철을 타고보면 승객들은 슬기전화(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지 책을 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안평ㆍ영창(迎昌)의 집 일을 가지고 본다면 서울 안에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오부로 하여금 구료에 힘쓰게 하라. 또 성중(城中)의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하는 공사가 한둘이 아니어서 경기의 선군들도 또한 와서 역사에 나가고 있으니, 이 무리들이 아마 집을 떠난 채 돌림병에 걸린다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가운데 내달의 역사에 나가기 위하여 올라오는 도중에 있는 선군은 통첩을 내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이는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년) 4월 22일 기록으로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기 때문에 서울 안의 긴급하지 않은 영선공사의 정지를 세종이 명하는 내용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때는 돌림병이 창궐해도 거의 속수무책이었지만, 지금에도 유효한 정책인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건축공사를 중지한다거나 피막에 수용, 격리하는 등의 노력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활인서(活人署), 혜민국(惠民局) 등 의료기관을 만들기도 했으며, 돌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들을 모은 의서를 펴내기도 했지요. 특히 보물 제1249호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이라고 알려진 대왕암(大王巖)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경주 방향으로 0.5㎞쯤 가면 양북면 용당리에 훤칠한 미남에 견줄 만하며,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는 신라시대 가장 큰 석탑인 13.4m의 국보 제112호 감은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폐사된 감은사(感恩寺) 절터입니다. 당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여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았으며,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 자락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절을 다 짓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후 왕위를 물려받은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682년 절을 완성한 뒤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감은사 금당 밑에 일정한 높이로 공간을 형성해 비워놓았으며, 이는 용이 된 제31대 문무왕이 바닷물을 타고 감은사 금당까지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들어맞지요. 이렇게 금당을 지은 까닭은 신문왕이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가 바닷물을 따라 금당까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1168호 “청자 상감매죽학문 매병”이 있는데 높이 33.0㎝, 입지름 5.2㎝, 밑지름 11.0㎝의 크기입니다. 각이 져 세워진 아가리와 짧은 목,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풍만하게 벌어지다가 배의 아래쪽에서부터 서서히 좁아져 내려가 병의 아랫부분에서 다시 벌어진, 12세기 후반에 빚은 것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매병입니다. 매병 앞뒤에 대칭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가늘고 길게 세워진 매화와 대나무가, 그리고 그 사이에는 역시 대칭으로 위에서 내려오거나, 위로 올라가거나, 땅 위에 서 있는 3마리의 학들이 흑백상감으로 섬세하고 회화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잿물빛깔은 담청록색(淡靑綠色)으로 전면에 고르게 시유되었으며, 기면 일부에 미세하게 빙렬(氷裂, 도자기에 미세하게 난 금)이 나 있어 그 사이로 흙물이 스며있지요. 이와 비슷한 청자 매병이 현재 미국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에 소장되어 있는데, .보스턴미술관의 청자 매병은 아가리 부분이 파손되어 수리된 데 견주어 이곳 국립중앙박물관 것은 형태나 무늬가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가치가 큽니다. 그리고 이 매병은 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5월 14일 문화재청은 5월 16일부터 6월 30일까지 구리 동구릉 숲길을 포함한 조선왕릉 숲길 9선을 개방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에 개방하는 조선왕릉 숲길은 ▲ 구리 동구릉 ‘경릉~양묘장’ 숲길, ▲ 구리 동구릉 ‘휘릉~원릉’ 숲길, ▲ 남양주 광릉 ’금천교~정자각‘ 숲길, ▲ 남양주 사릉 ’홍살문~능침 뒤편’ 숲길, ▲ 서울 태릉과 강릉 ’태릉~강릉‘ 숲길, ▲ 서울 의릉 ’천장산‘ 숲길, ▲ 파주 장릉 ‘능침 둘레길’, ▲ 파주 삼릉 ‘공릉 뒤편’ 숲길, ▲ 화성 융릉과 건릉 ‘융릉∼건릉 숲길’ 등 모두 9곳이지요. 특히, 구리 동구릉 내 휘릉과 원릉 사이 때죽나무 숲길 1.4km 구간은 이번에 처음 개방하는 구간으로, 5~6월에 종모양의 흰 꽃이 아래로 흐드러지게 피는 때죽나무는 왕릉 소나무의 초록색 빛과 어우러져 숲길의 아름다움을 수놓습니다. 원래 하반기에 개방할 예정이었지만, 때죽나무 꽃 피는 때에 맞춰 시범 개방하는 것입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궁궐을 찾는 관람객은 전년 대비 감소했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조선왕릉을 찾는 관람객은 42.4% 늘어났습니다. 숲길 개방시간은 조선왕릉 관람 시간(아침 9시〜저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상남도 진주시에 가면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晋州劍舞)’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진주검무는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여성검무로서 검기무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안 잔치 때 추던 춤의 하나입니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뜻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 느린타령, 빠른타령에 맞추어 조선시대 무사복을 갖춘 8명의 무용수가 2줄로 마주 보고 서서 양손에 색동천을 끼고 칼을 휘저으며 춥니다. 춤사위의 종류로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사위 등으로 여러가지가 있으며, 참 독특합니다. 현재의 진주검무는 당시 진주감영에 속해 있던 교방청(敎坊廳:기생학교) 기녀들에 의해 전승되던 춤으로 궁중 기녀들이 낙향하여 관청 기녀들에게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 검무 가운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는 진주검무가 유일한데, 지방문화재로는 이북5도무형문화재 제1호인 평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종실록》 36년(1899년) 5월 27일의 기록을 보면 “방금 들으니, 전차(電車)를 운행할 때 백성들 가운데 죽고 다친 사람이 많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아래 줄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뒤에 별도의 설명을 달아두었는데 ”이달 17일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에서 전차 개통식을 하였는데, 26일 전차가 종로(鐘路) 거리를 질주할 때 다섯 살 난 아이를 치어 죽였다. 여러 사람이 격노하여 차체를 파괴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워 버렸다. 또 전차가 전복되어 죽거나 다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이런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라고 설명을 붙여두었습니다. 처음 전차를 운행할 때 그 속도가 겨우 시속 8km로 기어가는 정도에 불과하였는데도 아이가 치어 죽었다니 놀랍습니다. 파고다 공원 앞길에서 어린아이가 전차에 치여 죽자 시민들은 전차를 ‘악마의 차’라며 전차를 불태웠고, 결국 그날로 전차는 멈춰 섰지요. 그러나 석달 뒤, 고종의 특별담화가 있고 나서 다시 운행이 재개되었는데 전차만 타다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전차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때 전차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홍릉)의 9.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방된 조국에서 평등과 원칙이 바로 세워져 모두가 잘 살기를 바랄 뿐 피땀 흘려 이룬 광복이 어느 한 사람의 공적이던가 우리는 고생한 만큼 가질 권한이 있다. 이념과 실천이 다르고, 탄압과 폭정으로 얼룩진 무리라는 걸 눈 감은 뒤에야 알았지만, 조국의 품에 안겨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것, 내가 그게 바라는 소원이었다.” 이는 광복 뒤에 재빨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걸쳐 145개의 치안대 지부를 만들면서 혼란스럽던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몸부림쳤던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을 <이게 나라냐>라는 시에서 이오장 시인이 그린 것입니다. 134년 전 오늘은 그 여운형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이승만을 두둔하는 미군정의 피점령국 정책으로 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중도좌파를 대표해 김규식으로 대표되는 중도우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조국분단과 민족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정부 실현에 앞장섰지요. 하지만, 이도 미군정 당국의 교묘한 방해공작으로 좌절되었으며, 선생은 1947년 5월, 좌우합작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성사를 지원하던 중 극우청년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달 6일 국립공원공단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거문도ㆍ백도지구에서 야생생물 분포조사 중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 착생깃산호의 나라 안 가장 큰 보금자리를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국립공원공단은 2016년부터 해상ㆍ해안국립공원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분포조사를 하고 있는데 ‘해상ㆍ해안국립공원’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변산반도국립공원, 태안해안국립공원이 있지요. 멸종위기 야생생물 분포조사 중 지난해 8월 거문도ㆍ백도지구에서 착생깃산호의 일부 개체가 살고 있음을 확인한 데 이어 올해 3월 추가 조사를 통해 거문도ㆍ백도지구 해역 수심 50m에서 약 30군체의 착생깃산호가 사는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착생깃산호는 들러붙어 사는 해양동물인데 보통 부채 또는 새의 깃털처럼 보이며, 윗부분은 밝은 노란색, 아랫부분은 갈색이지요. 우리나라 멸종위기 야생동물 산호충류는 착생깃산호를 비롯하여 검붉은수지맨드라미, 유착나무돌산호, 금빛나팔돌산호, 해송 등 15종으로 모두 ∥급이며, 한려해상국립공원,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과 제주도에만 있고, 서해안에는 없습니다. 국립공원공단은 이번에 발견한 착생깃산호 보금자리 보전을 위해 서식환경과 생태특성을 파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보 240호, 윤두서 자화상은 수염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일일이 그린 필치가 인상적이며, 감상자를 강렬하게 바라보는 모습의 초상화로 조선의 초상화 가운데서 획기적인 명작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있어야 할 두 귀, 목과 윗몸이 없는 괴기한 모습이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냈습니다. 이 자화상을 보고 어떤 이는 처음부터 윤두서가 두 귀, 목과 윗몸이 없이 그렸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고 오주석 교수는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사료집진속》을 보고 "윤두서가 버드나무 숯인 유탄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미처 먹으로 윗몸의 선을 그리지 않아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전해오다 관리 소홀로 지워진 것이며,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지워 버리는 사고를 저질렀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결국, 오 교수는 윤두서의 자화상이 미완성이었다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보존과학실 연구팀은 지난 2006년 적외선 투시 분석 결과 윤두서의 자화상은 두 귀와 목과 상체의 윤곽이 뚜렷하게 남은, 윤곽선만 그린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