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여름은 차츰 녹음이 우거지고 철 맞춰 내린 비로 보리와 밀 등 밭곡식은 기름지게 자라나고 못자리도 날마다 푸르러지고 있으나 남의 쌀을 꿔다 먹고사는 우리 고향에 풍년이나 들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농촌에서는 명년 식량을 장만하고자 논갈이에 사람과 소가 더 한층 분주하고 더위도 이제부터 한고비로 치달을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5월 22일 기사에 보이는 이즈음 풍경입니다. 오늘은 ‘소만(小滿)’ 24절기 가운데 여덟째 절기로 '소만'에는 만물이 점차 자라 가득 찬다는 뜻이 있습니다. 소만 때는 모든 들과 뫼가 푸르른데 대나무는 푸른빛을 잃고 누렇게 변합니다. 이는 새롭게 태어나는 죽순에 영양분을 모두 주었기 때문이지요. 마치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어린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어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래서 봄철의 누런 대나무를 가리켜 죽추(竹秋) 곧 ‘대나무가을’이라고 합니다. 또 이 무렵을 '보릿고개'라고 하는데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목숨을 지탱하던 때입니다. 입하와 소만 무렵에 있었던 풍속으로는 봉숭아 물들이기가 있는데 《동국세시기》에 보면 "계집애들과 어린애들이 봉숭아를 따다가 백반에 섞어 짓찧어서 손톱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가운데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정신을 노래한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의 시 ‘논개’입니다. 권웅 시인은 “논개가 간 지 3백여 년이 지난 뒤에 한 시인이 문득 남강의 푸른 물결 위에 떠서 흐르는 그녀의 빨간 마음을 본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생의 시풍은 민족애와 서정성이 짙고, 섬세한 시어를 구사했으며, 상징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많은 평론가가 앞다투어 얘기했지요. 선생은 어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를 만들어 이름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매번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원이 직접 주척(周尺)으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때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기록해 둘 것이며,” 이는 《세종실록》 세종 24년(1442년) 5월 8일 자 기록입니다. 578년 전인 1442년(세종 24년) 조선에서 강수량 측정을 위해 세계 처음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1662년 처음 서양식 우량계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나라보다 220년이 늦은 시기입니다. 지난 2월 20일 문화재청은 근대 이전의 강수량 측정 기구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금영 측우기‘를 국보 제329호로,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를 국보 제330호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를 국보 제331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영조 6년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5월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23돌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문화재청은 15일 낮 11시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영릉(英陵)에서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기리는 숭모제전(崇慕祭典)을 봉행합니다. 이 숭모제전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고 그분의 유덕과 백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제향으로 거행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기념하는 숭모제전은 다시 말하면 생일잔치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생일잔치는 해마다 생가가 아닌 무덤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생일잔치 이후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낼 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어떤 집안이 조상의 생일잔치를 무덤에서 합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도록 크게 이바지한 세종대왕의 생가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서 생일잔치가 무덤에서 치러지는 것을 개탄하고 지적하고 해왔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예술인들의 생가를 복원해놓은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럴진대 누구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꼽는 세종대왕의 생가복원이 아직껏 삽도 뜨지 않았으니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관에서는 세종대왕의 사저 위치를 콕 집어 확인할 수 없고 당시의 사저 모습을 짐작도 할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의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1397~1450) 곧 ‘이도(李祹)’가 태어나신 날입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 보면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종을 위대한 성군으로 부르는 까닭은 훈민정음 창제부터 모든 정사를 ‘백성사랑’으로 했기 때문이지요. 세종은 들판을 지나가다가 농부를 보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일산(햇빛가리개)까지 치우도록 했으며, 벼가 잘되지 않은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세종실록》 59권, 1433년 1월 1일의 기록에는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운 것은 물론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기에,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새해 첫날 회례음악을 연주했는데 세종이 동양음악 십이율(十二律) 가운데 아홉째 음인 이칙(夷則) 하나가 다른 소리가 난다고 지적하여 음악 전문가인 박연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11호 <김덕령장군 의복(金德齡將軍 衣服)>이 있습니다. 이는 1965년 광산김씨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에서 김덕령 장군의 무덤을 이장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옷들이지요.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 때 담양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 비록 체구는 작지만 민첩하고 능력이 탁월해 왜병장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무서워 도망갔다고 합니다. 출토된 옷에는 조선시대 문무관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임금을 호위할 때, 또는 국난을 당했을 때 입었던 철릭 여름용과 겨울용 2점, 두루마기와 같은 모습이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직령포 봄가을용과 겨울용 4점, 그리고 저고리 1점과 바지 1점입니다. 철릭은 임진왜란 당시 장군이 입었던 것으로 위급할 때에 양팔을 모두 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여름옷은 흰모시로 만들었고 겨울용은 두터운 솜을 넣고 누빈 것으로 길이도 여름용보다 더 길게 하여 방한용으로 입었지요. 직령포는 흰 무명을 곱게 누빈 봄가을용과 솜을 두텁게 두고 누빈 겨울용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명주직령포는 삭아서 솜만 남았으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코로나19와 관련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 지난 연휴 동안 많은 사람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객들은 대부분 제주도 흑돼지 고기를 먹고 왔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제주 재래 흑돼지는 옛날 만주지역에서 살던 돼지가 우리 겨레와 함께 한반도로 들어와 기르게 된 것으로 짐작되며 제주에서 발견된 소와 돼지 등의 뼈로 미루어보아 제주에서 흑돼지가 살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석기시대 말이나 청동기 시대 정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제주흑돼지는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285년)》, 《탐라지(眈羅志, 1651~1653년)》, 《성호사설(星湖僿說, (1681~1763년)》 등의 고문헌을 통해 흑돼지를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제주흑돼지가 유서 깊은 제주 전통 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 흑돼지는 근대화를 거치며 외국에서 들어온 개량종 돼지와의 교잡으로 순수 재래 흑돼지의 개체수가 점점 사라져 갔지요. 그러다 가까스로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이 1986년 우도 등 제주 재래종 돼지 5마리를 확보하여 복원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제주흑돼지는 2015년 3월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되어 현재 206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는 일본 센다이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교정에 세운 김기림 시인의 기념비에 새겨진 ‘바다와 나비’입니다. 시에서 ‘나비’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존재 곧 당시의 지식인이며, 이 시는 거친 바다의 험난함과 흰나비의 가녀림을 압축적으로 대비한 작품이라고 하지요. 오늘은 김기림 시인이 태어난 날입니다. 일본에는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 모임이 여럿 있지만, 김기림의 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몰랐습니다. 도호쿠대학에 시비를 세운 지 1돌을 맞아 지난해 2019년 11월 30일에는 “김기림에게 배운다. 지금이야말로 센다이에서 일한시민교류를!”이란 행사가 열렸음을 김기림기념회(金起林紀念會) 공동대표인 아오야기 준이치 (靑柳純一) 씨는 전해주었습니다. 김기림(1908~?)은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던 ‘구인회’ 대표로 ‘모더니즘의 기수’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시내 죽첨정 삼정목(竹添町 三丁目) 일백팔번지에 사는 리윤의(李允義)라는 아해는 열두 살 때에 자기 부친을 여의고 모친 홍성녀(洪姓女)와 함께 근근히 괴로운 생활을 하여 오든바 얼마 전에는 자기 모친이 중병에 걸리어 지나간 이일 저녁에 생명이 위급케 되었슴으로 그는 원래 효성이 지극한 아해라 엇지할 바를 아지 못하다가 그만 왼편 손가락을 칼로 찍어 그 흐르는 피를 모친의 입에 흘녀 너헛는데 그의 모친도 그 효성에 감동하엿든지 소생하야 생명에는 관계가 업다더라.” 이는 동아일보 1924년 1월 5일자 “편모(片母)를 위하야 단지(斷指), 열두살 먹은 어린아해가”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는 1921년부터 1940년까지 ‘단지(斷指)’라는 말로 검색해보니 동아일보에만 무려 98건이나 보입니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견주면 정말 살기 좋아진 지금 언론에는 나이 드신 부모님을 버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는 일도 종종 보입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숙종임금의 장인인 김주신(1661~1721)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김주신은 아버지 산소를 갈 때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개야 개야 검둥개야 밤사람보고 짖지 마라 개야 개야 검둥개야 밤사람보고 짖지 마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슬금 살짝 오신 임을 느닷없이 내달아서 컹컹 짖어 쫓게 되면 야반삼경 깊은 밤에 고대하던 우리 임이 하릴없이 돌아서면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위는 서도민요 “사설난봉가” 가운데 일부입니다. 가사를 보면 “개야 개야 검둥개야 밤사람보고 짖지 마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슬금 살짝 오신 임을 느닷없이 내달아서 컹컹 짖어 쫓게 되면 (가운데 줄임) 하릴없이 돌아서면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라고 하여 참 재미나게 부릅니다. 또 ‘사설난봉가’의 다른 부분을 보면 “앞집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 총각은 목매러 간다. 사람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새끼 서발이 또 난봉나누나.”처럼 ‘사설난봉가’는 가사가 모두 해학으로 넘칩니다. ‘사설난봉가’는 ‘개타령’ 또는 ‘잦은개타령’이라고도 하지요. 원래 ‘난봉가’는 서도소리 가운데 가장 흥겨운 소리인데 ‘사설난봉가’ 말고도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타령난봉가’(‘병신난봉가’ 또은 ‘별조난봉가’라고도 함), ‘숙천난봉가’, ‘사리원난봉가’, ‘개성난봉가’, 연평도난봉가(‘니나니타령‘) 등 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