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텔레비전 사극에 보면 정갈한 사랑방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글을 읽는 선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선비가 책을 올려놓고 보는 앉은뱅이 작은 책상을 서안(書案)이라 하고 그 옆에 벼루와 먹 그리고 붓을 넣어두는 상자가 있는데 이를 ‘연상(硯床)’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서안과 연상은 옛 선비들 사랑방에 꼭 놓여있었던 가구였습니다. 높이 16∼30㎝의 작달막한 연상은 윗부분에 뚜껑을 덮고 그 안에 벼루를 넣어 둡니다. 어떤 연상은 뚜껑이 없이 벼루를 바로 쓸 수 있게 해놓은 것도 있는데 이 이름은 따로 ‘연대(硯臺)’라 합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서랍을 두어 붓이나 먹, 연적을 넣어두기도 합니다. 또 문갑이나 서안과 겸한 것들도 눈에 띕니다. 그밖에 벼루와 먹을 보관하는 작은 함이 있는데 이는 벼룻집[연갑(硯匣)]이라고 하지요. 연상을 만드는 재료로는 은행나무ㆍ소나무ㆍ먹감나무가 가장 많이 쓰였으며, 모과나무로 만든 투각장식의 연상과 나전칠기 연상은 매우 화려한 고급품입니다. 또한, 대쪽 같은 선비의 품격을 나타내는 대나무 연상도 많습니다. 벼루 10개와 붓 천 자루를 갈아치웠다는 추사 김정희와 명필 왕희지(王羲之)ㆍ안진경(顔眞卿)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의 위대한 반찬 김치는 그 종류가 자그마치 500여 가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 겨레는 김치와 함께 살아온 거죠. 그런데 김치는 세계 5대 건강식으로 뽑히고, 미국과 유럽 일대, 중국, 일본에서도 김치의 인기가 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김치는 형태별로 통김치, 숙김치(삶은 무와 절인 배추에 굴, 배, 고춧가루, 새우젓, 대파 등을 넣어 담그는 김치), 깍두기, 소박이, 물김치, 보김치(한 보시기 분의 김치를 덩어리지게 담아 백항아리에 익히는 것) 따위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무로 만드는 깍두기의 유래는 무엇일까요? 1940년 홍선표가 펴낸 《조선요리학》을 보면 200년 전 정조임금 사위인 홍현주(洪顯周)의 부인(숙선공주)이 임금에게 처음으로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렀으며, 그 뒤 여염집에도 퍼졌는데 고춧가루 대신 붉은 날고추를 갈아서 쓰면 빛깔이 곱고 맛도 더욱 좋다고 하지요. 깍두기에는 감동젓무, 걸무깍두기, 명태서더리깍두기, 무송송이, 숙깍두기, 비늘깍두기 따위가 있는데 이 가운데 ‘감동젓무’는 무와 배추에 잔 새우로 담근 감동젓(곤쟁이젓), 생굴, 낙지, 북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이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한 격문입니다.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일제 경찰에 들켜 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확산해온 학생운동 조직은 준비과정에서 일경에 들키지 않았지요, 먼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중심의 사직동계가 주도했는데 화요회계와 통동계가 연합하여 태극기 300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만들었으며, 명함인쇄기 한 대를 구해 초안한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했습니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은 창덕궁에서 발인을 마친 뒤 종로ㆍ동대문을 거쳐 금곡 유릉(裕陵)으로 가는 장례 행렬의 연도에는 30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지요. 이때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장과 태극기 30여 장을 뿌렸습니다. 일제는 군대 1만 명을 서울에 긴급 투입했으며, 인도에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과 기마 경찰, 헌병을 집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 지난 2월 16일부터 검거 취조에 착수한 백백교(百百敎) 사건은 이름만으로 종교단체 같으나 취조에 따라 전개되는 그 내용을 보면 사기, 부녀자 능욕, 강도뿐만이 아니라 우매한 지방 농민들을 허무맹랑한 조건으로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한 후에 그 비밀을 막기위하야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닥치는대로 살육해버린 살육교이다.“ 이 내용은 동아일보 1937년 6월 9일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전용해가 교주인 백백교는 1940년 전용해 등이 모두 체포되어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신도들의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여신도들을 속여 성폭행을 저질렀지요. 전용해는 변태성욕자로서 심지어는 많은 여신도가 보는 가운데서 정사를 벌이고,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또 그 같은 범죄행위를 숨기기 위하여 비밀을 누설할 만한 사람들을 깊은 산속으로 끌고 가서 죽였는데, 밝혀진 바에 따르면 314명이나 되었습니다.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라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 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조상의 무덤을 명당에다 쓰면, 조상이 왕성한 지기를 받고, 그 영향으로 자손들이 복록을 받는다는 음택풍수(陰宅風水)를 굳게 믿어왔습니다. 그러기에 대대로 으뜸 통치자였던 임금의 무덤은 통치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아 조선 땅 으뜸 명당에 모시려 했지요. 그런 뜻으로 특히 임금의 무덤 자리는 물이 나는 곳에는 자리 잡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는데 바다에 무덤이 있는 임금이 있습니다. 바로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무덤이 그러한데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 자리 잡고 있지요. 이는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으로 바닷가에서 200m 떨어진 수중릉입니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21년(681)조에 보면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이 있는데 그의 유언은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문무대왕릉”은 ‘대왕암’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를 마련한 것처럼 돼 있습니다. 안쪽의 공간에는 남북으로 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아홉째 망종입니다. 망종(芒種)이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씨앗을 뿌려야 할 적당한 때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라는 속담이 있는 망종 무렵은 보리를 베고 논에 모를 심느라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발등에 오줌 싼다.”,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할 만큼 한해 가운데 가장 바쁜 철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망종날 풋보리 이삭을 뜯어서 손으로 비벼 보리알을 모은 뒤 솥에 볶아서 맷돌에 갈아 체로 쳐 그 보릿가루로 죽을 끓여 먹으면 여름에 보리밥을 먹고 배탈이 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또 전남 지역에서는 이날 ‘보리그스름(보리그을음)’이라 하여 풋보리를 베어다 그을음을 해서 먹으면 이듬해 보리농사가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또한, 이날 보리를 밤이슬에 맞혔다가 그다음 날 먹는 곳도 있는데 허리 아픈 데가 좋아지며, 그해에 병이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믿었지요. 특히 이때쯤에는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또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햇보리를 수확하면 보리를 맷돌에 갈아 보릿가루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3월 9일 SBS <동상이몽>이란 프로그램에서는 “가수 강남과 전 스피드스케이팅선수 이상화가 혼인신고를 못 한 이유”란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얼마 전 결혼식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결혼식장을 보통 ‘웨딩 홀(wedding hall)’이라는 영어로 씁니다. 이렇게 똑같은 행위를 두고 ‘결혼(結婚)’과 ‘혼인(婚姻)’, ‘wedding’이란 다른 말을 쓰는 까닭이 무엇이며, 어떻게 써야 할까요?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남녀 사이에 백년가약을 맺는 것을 혼인(婚姻)이라고 했습니다. 그 혼인이란 것은 장가든다는 뜻의 혼(婚)에 시집간다는 뜻의 인(姻)이 붙은 말로 혼(婚)은 혼인할 "혼"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친정"을 말하고 있으며, 인(姻)은 "사위의 집"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혼인이란 말은 아내와 사위 곧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結婚)은 일본식 한자어이며, ‘결혼(結婚)’이란 말은 인(姻)이 없음으로 남자가 장가간다는 뜻만 있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없습니다. 따라서 “혼인”에 견주면 “결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즈음은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도를 배워서 성인(聖人)의 정밀하고도 미묘한 경지를 엿보고,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변하여 천고(千古)를 통해 판가름 나지 않은 안건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호방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빼어난 글을 구사하여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 간의 세 가지 유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어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시문을 짓는 학문을 가지고 견주어 논의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이는 1814년(순조 14)에 펴낸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들어 있는 《일득록(日得錄)》의 일부입니다. 여기서 정조는 “요즈음은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라고 지적합니다. 이는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도 지적하는 말로 들립니다. 사실 전철을 타고보면 승객들은 슬기전화(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지 책을 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안평ㆍ영창(迎昌)의 집 일을 가지고 본다면 서울 안에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오부로 하여금 구료에 힘쓰게 하라. 또 성중(城中)의 영선(營繕,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함)하는 공사가 한둘이 아니어서 경기의 선군들도 또한 와서 역사에 나가고 있으니, 이 무리들이 아마 집을 떠난 채 돌림병에 걸린다면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가운데 내달의 역사에 나가기 위하여 올라오는 도중에 있는 선군은 통첩을 내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이는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년) 4월 22일 기록으로 돌림병이 크게 유행하기 때문에 서울 안의 긴급하지 않은 영선공사의 정지를 세종이 명하는 내용입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때는 돌림병이 창궐해도 거의 속수무책이었지만, 지금에도 유효한 정책인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건축공사를 중지한다거나 피막에 수용, 격리하는 등의 노력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활인서(活人署), 혜민국(惠民局) 등 의료기관을 만들기도 했으며, 돌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들을 모은 의서를 펴내기도 했지요. 특히 보물 제1249호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이라고 알려진 대왕암(大王巖)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경주 방향으로 0.5㎞쯤 가면 양북면 용당리에 훤칠한 미남에 견줄 만하며,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는 신라시대 가장 큰 석탑인 13.4m의 국보 제112호 감은사터 동ㆍ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폐사된 감은사(感恩寺) 절터입니다. 당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여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았으며,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용당산 자락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절을 다 짓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후 왕위를 물려받은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682년 절을 완성한 뒤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감은사 금당 밑에 일정한 높이로 공간을 형성해 비워놓았으며, 이는 용이 된 제31대 문무왕이 바닷물을 타고 감은사 금당까지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들어맞지요. 이렇게 금당을 지은 까닭은 신문왕이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가 바닷물을 따라 금당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