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은 암흑 속에 사라지는가. 이제 어디에서 우리의 얼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하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속에서 한 말입니다. 선생은 중국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부인 성씨(成氏)가 1913년 9월에 첫딸을 출산한 뒤 엿새 만에 산고로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녔지요. 이것은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과 함께 나라 잃은 슬픔을 상복으로 나타내어 독립에 대한 염원이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127년 전인 1893년 오늘(5월 6일)은 정인보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 중국 땅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귀국 뒤에는 글을 써서 일제와 싸웠는데 특히 일제가 날조한 역사 대신 우리의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얼’을 강조하는 ‘얼사상’을 주창했습니다.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몰두하며, “말 한마디, 일 하나, 행동 하나, 움직임 하나까지 깡그리 고갱이가 ‘얼’이어야 한다.”라고 강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반팔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제법 덥게도 느껴집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기자는 사람들의 나들이 모습을 그렇게 보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팔’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보고 언론이 우리말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팔’은 사람의 팔을 반만 덮은 웃옷이라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겐 ‘소매’라는 말이 있기에 ‘반소매’라고 해야만 합니다. 지난 2008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원장 이경숙 씨가 '오렌지'라고 하면 안 되고 '어륀지'라고 해야만 한다며, 영어몰입교육과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많은 이의 질타를 받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영어를 조금만 잘못 쓰면 안 되는 것처럼 난리를 치지만 정작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사회의 풍조가 참 안타깝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한글 전용, 가로쓰기, 통일된 표기법을 주장했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주시경 선생은 “나라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나라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고 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최현배 선생은 《금서집(방명록)》에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즈음은 평소에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도를 배워서 성인(聖人)의 정밀하고도 미묘한 경지를 엿보고, 널리 인용하고 밝게 구별하여 알아 천고(千古)를 통해 판가름 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호방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빼어난 글을 구사하여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 간의 세 가지 유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1814년(순조 14)에 펴낸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들어 있는 <일득록(日得錄)>의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 따르면 정조는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또 ”책을 읽는 것은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작가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책을 읽는 사람이 참 드물다며 안타까워하지요.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틀 전 4월 29일 문화재청은 “그동안 국보로서 위상과 값어치 재검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국보 제168호 ‘백자 동화매국문 병’에 대해서 지정 해제를 예고하였다.”라고 밝혔습니다. 원래 국보나 보물로서 지정하려면 “문화재보호법” 제4장 국가지정문화재 제1절 지정 제23조(보물 및 국보의 지정)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 기준을 보면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진사(辰砂; 酸化銅)를 쓴 조선 전기의 드문 작품으로 화려한 문양과 안정된 기형(器形)이 돋보인다.’라는 사유로 1974년 7월 4일 국보 제168호로 지정되었으나, 실제 조선 전기 백자에 이처럼 동화(銅畵)를 물감으로 쓴 사례가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중론이라고 합니다. 또 지정 당시에는 기형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 15세기 빚은 것으로 보았으나, 기형과 크기, 기법, 무늬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에서 ‘유리홍(釉裏紅)’이라는 원나라 도자기 이름으로 여럿 현존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이 작품도 조선 시대가 아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足凍姑撤尿(족동고철뇨) 언 발에 오줌 누어 무엇하랴? 須臾必倍寒(수유필배한) 금방 반드시 배나 추워질 것인데 今年糴不了(금년적불료) 올해에 환곡을 갚지 못했으니 明年知大難(명년지대난) 내년은 더욱 곤란할 것을 알겠네 이는 18세기 후반기 대표적인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가 쓴 ‘수주객사(愁洲客詞)’라는 한시(漢詩) 일부로 함경도 종성 지역의 문물과 풍속을 다룬 연작시(連作詩)의 한 부분입니다. 언 발에 오줌을 누면 발이 잠시 따뜻해질 뿐 금방 발이 얼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올해 농사지은 것으로 환곡(還穀)을 갚지 못했으니, 내년에는 얼마나 시련이 닥칠지 보지 않아도 알겠다고 말합니다. 박제가가 살던 당시 관리들이 백성에게 얼마나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심지어는 우물까지 독점한 탓에 물도 세금 내고 먹어야 했습니다. 또 백성은 베를 열심히 짜서 세금으로 바치면, 관에서는 그걸 헐값으로 쳐주곤 했으니, 백성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가엾은 백성은 관리를 보면 먼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박제가가 보았던 변방 함경도 종성지역은 특히 더 심했을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등 모든 궁궐의 정전에는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병(日月五峯圖屛)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의 어진 뒤에도 오봉도가 설치되어 있지요. 이처럼 이 병풍은 아무 곳에서나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놓였던 특수한 그림입니다. 이 병풍의 그림 <일월오봉도>는 하늘에는 흰 달과 붉은 해가 좌우로 나뉘어 둥그렇게 떠 있고, 그 아래로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일월오봉도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크게 출렁이는 파도가 나타나고, 그림의 좌우 양쪽 끝으로는 붉은 몸통을 드러낸 소나무가 있습니다. 또 그림에서 다섯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면서 화면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 양 옆에 솟은 두 봉우리 사이에 달과 해를 두고, 그 아래 골짜기에서 폭포가 떨어지며, 산 아래의 물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림의 옆에 대칭적으로 솟은 자그마한 둔덕 위에는 역시 두 그루의 소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솟아있습니다. 곧 이 그림은 완벽한 대칭과 균형을 강조하는 구성을 보여주는데, 현재 남아있는 오봉도병과 오봉도병을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영친왕비가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입었던 ‘대례복영친왕비 적의(翟衣)’가 있습니다. ‘적의’란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왕비나 왕세자빈이 혼례인 가례(嘉禮) 때 입었던 옷입니다. 적의(翟衣)의 뜻은 적문(翟紋) 곧 꿩무늬를 일정한 간격 그리고 규칙적으로 넣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 이 적의에는 138쌍의 꿩과 오얏꽃 형태의 소륜화(小輪花) 168개의 무늬가 9줄로 짜여 있습니다. 깃(저고리나 두루마기의 목에 둘러대어 앞에서 여밀 수 있게 된 부분) · 도련(두루마기나 저고리 자락의 맨 밑 가장자리) · 섶(저고리나 두루마기 따위의 깃 아래쪽에 달린 길쭉한 헝겊)과 소맷부리(옷소매에서 손이 나올 수 있게 뚫려 있는 부분)에는 붉은색 바탕에 노랑색의 구름과 봉황무늬로 선을 둘렀습니다. 적의의 앞뒤, 그리고 어깨에는 다섯 가지 색깔과 금실로 수를 놓은 너비 17.5cm의 오조룡보 곧 발톱이 5개인 흉배를 붙였지요. 또 너비 8.3cm 겉고름은 긴 쪽은 93cm, 짧은 쪽은 83cm이고 안고름은 각각 93cm, 86cm입니다. 여기서 영친왕비는 대한제국기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은 모든 국가적 행사를 기록으로 남겼기에 기록의 나라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기록에는 물론 궁궐을 지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궁궐 영건(營建) 곧, 나라가 궁궐 등을 짓는 것은 국가의 운영을 계획하여 짓는 일로 궁궐, 종묘, 사직단, 성곽 등에 유교 통치 이념을 담아 건축하였습니다. 궁궐 영건에는 처음 짓는 것은 물론 보수하거나 고쳐 짓는 중건(重建)과 수리(修理), 그리고 옮겨 짓는 이건(移建) 등 크고 작은 공사가 포함되며 별도의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완수하였지요. 지난 2016년 12월 6일부터 2017년 2월 19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영건(營建), 조선 궁궐을 짓다」 특별전이 열렸는데 이 특별전에 전시된 유물 가운데는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보물 제1901-2호 《조선왕조의궤》의 1책)를 비롯한 《영건의궤》,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보물 제1534호), 고종년간 경복궁 중건에 관해 기록한 《영건일감(營建日鑒)》, 덕수궁 중건공사에 대한 문서 묶음인 ‘장역기철(匠役記綴)’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1865년(고종 2) 2월부터 1867년(고종 4) 1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등푸른 햇살이 튀는 전나무 숲길 지나 내소사 안뜰에 닿는다 세 살배기가 되었을 법한 사내아이가 대웅보전 디딤돌에 팔을 괴고 절을 하고 있다. 일배 이배 삼배 한 번 더 사진기를 들고 있는 아빠의 요구에 사내아이는 몇 번이고 절을 올린다 저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대웅보전의 꽃창살무늬 문(門)이 환히 웃는다. 박성우 시인의 ‘내소사 꽃창살’ 시입니다. 부안군 내소사 대웅보전의 문은 꽃살문으로 깨우침의 단계를 표현하기 위해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을 함께 새긴 걸작으로 손꼽히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록 단청은 빛이 바랬지만, 꽃살 무늬가 가진 조화와 화려함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여기 내소사 말고도 논산 쌍계사 대웅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 대구 팔공산 대웅전과 강화 정수사 대웅보전에 가도 꽃살문은 대웅전을 한층 품격있게 만들어 줍니다. 궁궐이나 민가의 아(亞) 자 무늬, 띠살무늬 등이 단아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이 대웅전의 꽃살무늬는 꽃을 새긴 덕에 화려하고 정교하지요. 문살에 새겨진 꽃의 종류는 윤회와 정화를 뜻하는 연꽃을 비롯하여 모란, 국화, 해바라기 등이 있으며 또한, 무슨 꽃인지 잘 알 수 없는 관념적인 모양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조는 평생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피부병을 낫기 위하여 전국의 이름난 약수터와 온천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서도 목욕하게 되었지요. 그때 세조는 지나가는 동자승을 불러 자신의 등을 밀어달라고 했습니다. 동자승이 세조의 등을 밀어주자 세조의 몸에 있던 종기가 말끔히 나았습니다. 그래서 동자승에게 고맙다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 임금의 몸에 손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에 동자승은 "대왕께서도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수동자상을 새겨 상원사에 모셨고, 현재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전설이 전해올 정도로 조선시대 여러 임금은 종기로 고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조 외에도 문종, 성종, 중종, 효종, 현종, 숙종, 정조 등이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종기 치료를 전담하는 ‘치종청治腫廳)’이라는 관청을 두었을 정도지요. 전통적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한약재를 다려 만든 고약을 환부에 붙이는 방법이 고작이었는데 근세에 와서 이 ‘고약(膏藥)’이 치료제로 주목을 받았고, 1906년 이명래(1890~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