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가운데 줄임)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이는 1960년대 대표적 민족시인의 한 사람인 신동엽 시인의 대표시 <껍데기는 가라>입니다. 1930년 오늘(8월 18일)은 신동엽 시인이 태어난 날입니다. 이 시에서 ‘껍데기’는 무엇일까요? 거짓된 모든 것, 부패한 것, 억압된 것, 외세와 반민족적인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시에서 시인은 ‘껍데기’를 여섯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모든 쇠붙이는 가라며,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염원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1967년 <신구문화사>가 펴낸 《현대문학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을 실음으로써 확고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펜클럽 작가기금”을 지원받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 신작 전집” 5권 《3인 시집》에 4천8백여 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하며, 그의 문단 내에서의 위치가 일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틀 전은 더위가 한고비로 치닫는다는 ‘말복’이었습니다. 장마가 지나고 이제 불볕더위가 한창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를 감상해보겠습니다. 그림 앞쪽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곳에는 조그마한 초가 하나가 있고 초가집 창문에는 맨 상투를 튼 한 선비가 외로이 앉아 있는 옆모습이 보입니다. 초가 뒤쪽으로는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겨울나무가 솟아 있고, 그 뒤로 그려진 산들은 눈이 쌓여 하얗게 등성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림 위쪽에는 “산과 시내가 조용하여 찾아오는 이 없으니, 임포의 집이 어디인지 물어나 볼까〔溪山寂寂無人到 試問林逋處士家〕”라는 화제가 있고, 다음에 ‘소치(小癡)’라는 호와 ‘허련지인(許鍊之印)’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 그림이나 글씨를 옴폭하게 파내서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도장)과 ‘소치(小癡)’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돋을새김으로 새겨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붉게 나오는 사각 모양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이로써 글씨와 그림 모두 허련의 작품임을 알게 합니다. 이 그림에 나타나는 산들은 하얗게 눈이 쌓인 설경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큰집을 지어 대사례 때 쓰는 활ㆍ화살과 여러 가지 기구를 간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각의 이름을 ‘육일각(六一閣)’이라 했으니, 대개 활쏘기는 육예(六禮)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영조실록》 영조 19년(1743년) 윤4월 7일의 기록으로 ‘활쏘기’는 유교경전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여섯 가지 기예(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붓글씨, 수학) 가운데 하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낸 뒤 명륜당(明倫堂,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에서 과거시험을 본 후 임금과 신하가 함께 활쏘기 곧 ‘대사례(大射禮)’를 행했지요. ‘활쏘기’는 우리 겨레가 고대로부터 주요한 무술의 하나로 생각해왔음은 물론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기품 있는 운동 또는 놀이로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었는데 문화재청은 이 ‘활쏘기’를 지난 7월 30일 새로운 국가무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영조임금은 평소 “공자가 이르길 활쏘기로 경쟁하는 것이 군자답다.”라고 하여 정신수양으로써 활쏘기를 강조할 정도였지요. ‘활쏘기’는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狩獵圖)>, 《삼국지(三國志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동아일보 1935년 8월 13일 치에는 “본보 창간 15주년 기념 5백 원 장편소설 심훈 씨 작 <상록수> 채택”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심훈 작가의 <상록수(常綠樹)>가 당선된 것입니다. 이후 <상록수>는 그해 9월 10일부터 이듬해인 1936년 2월 15일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상록수>는 경기도 안산 샘골에서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대에 처녀의 몸으로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애쓰다가 26살에 요절한 실존인물 최용신(崔容信) 애국지사를 그린 작품입니다. 심훈은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붓으로 밭을 일군다.”라는 뜻의 필경사(筆耕舍)란 집필실을 손수 설계하여 짓고 이곳에서 '상록수'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완성하고 난 이듬해 당시 유행하던 장티프스에 걸려 그만 안타깝게도 36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지요. 당진 부곡리 필경사에는 그의 무덤과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유작품 따위가 전시되어있습니다. 이 작품은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들의 모습과 당시 농촌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면식은 선배들과 마주앉은 뒤 선배 이름을 모를 경우 벌주로 종이컵에 소주를 한 잔씩 마시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과 유족에 따르면 술을 전혀 못 하는 A 씨는 이날 ‘선배 이름을 모른다’, ‘예의가 바르지 않다’라는 등의 이유로 모두 8잔의 벌주를 마셨다. 이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해 친구들의 부축을 받아 귀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튿날 오전 학교에 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긴 친구들이 A 씨의 자취방을 찾아갔고, 잠긴 문을 열쇠 업자를 불러 열어 보니 A 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이는 “또… 사람잡은 대학가 ‘술판 신고식’”이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2010년 5월 12일 치 기사입니다. 이렇게 새내기를 괴롭히는 ‘허참례(許參禮)’또는 ‘신참례(新參禮)’ 이름의 신고식이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신참에게 연못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게 하는데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게 해 의복이 모두 더러워지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부엌 벽을 문질러 두 손에 옻칠을 한 듯 검게 만드는 거미잡이 놀이를 한 뒤 손을 씻은 새카만 물을 마시게 했다는 등 새내기를 괴롭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대제학 정초ㆍ지중추원사 이천(李蕆)ㆍ제학 정인지ㆍ응교 김빈(金鑌) 등이 혼천의(渾天儀)를 올리매, 임금이 곧 세자에게 이천과 더불어 그 제도를 확인하고 들어와 아뢰라고 하니, 세자가 간의대(簡儀臺)에 가서 정초ㆍ이천ㆍ정인지ㆍ김빈 등에게 간의와 혼천의의 제도를 따져서 물었다. 또 김빈과 내시 최습(崔濕)에게 명하여 밤에 간의대에 숙직하면서 해와 달과 별들을 참고해 실험하여 그 잘되고 잘못된 점을 고찰하게 하고, 인하여 빈에게 옷을 하사하니 밤에 숙직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임금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함께 그 제도를 의논해 정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년) 오늘(8월 11일) 기록으로 정초 등이 ‘혼천의’를 만들어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혼천의(渾天儀)는 다른 말로는 혼의(渾儀)ㆍ혼의기(渾儀器)ㆍ선기옥형(璇璣玉衡)이라고도 부르는 천문관측기구입니다. 이후 1657년(효종 8)에는 최유지(崔攸之)가, 1669년(현종 10)에는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穎)이 각각 만들었는데 세종 때의 것과 최유지가 만든 것은 남아 있지 않고,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된 송이영의 혼천시계가 유일하게 전해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동아일보 1934년 8월 9일 치 기사 가운데는 “구조받어 연명중, 병마까지 엄습, 주먹밥도 끈허저 나물죽, 설상가상의 선산 재민”이라는 제목이 보입니다. 경북 선산에선 큰물(홍수) 탓에 이재민 3천여 명이 주먹밥으로 근근이 연명해오다가 그나마도 끊어지고, 보리죽과 나물죽으로 그날그날의 생명을 연명하는 가운데 돌림병까지 돌아 신음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물난리는 지금뿐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큰물이 나서 사람들이 죽고 많은 집이 무너지곤 했습니다. 특히 정조실록 13년(1789년) 7월 26일 기록에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물난리로 물에 떠내려가거나 깔려 죽은 사람이 5백 46명이고, 떠내려갔거나 무너진 집이 5백 70채였다고 합니다. 또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1854년 7월 전라도에서 큰물이 나서 집 2,300여 채가 무너지고, 900여 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나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곳곳에 큰비가 쏟아져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 것은 물론, 집이 무너지고 농작물과 차가 물에 휩쓸려가는 등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시간당 강우량이 20mm가 넘으면 ‘강한비’라고 하고, 30mm가 넘으면 ‘집중호우’라고 하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중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로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입추면 가을이 들어서는 때인데 이후 말복이 들어 있어 불볕더위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우리 조상은 왜 입추를 말복 전에 오게 했을까요?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조금씩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이지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 이 역할을 입추와 말복이 하는 것입니다. 또 여름에서 갑자기 가을로 넘어가면 사람이 감당할 수가 없기에 미리 예방주사를 놓아주는 것이겠지요. "근일 비가 계속 내려 거의 10일이 되어 간다. 지난밤부터 오늘까지 큰비가 그치지 않는다. 이 정도에서 그치면 모르겠지만 만약 연일 내린다면 벼가 상할까 두렵다. 입추(立秋) 전에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는 것은 비록 드문 일이나 무오년에도 기청제를 지낸 전례가 있으니 예조로 하여금 미리 형편을 보아서 행하게 하라." 이는 《명종실록》 명종 21년(1566년) 6월 28일 기록으로 큰비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의술)을 책으로 펴내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펴내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길이 잘 든 말) 1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책을 내의원이 국(局)을 설치해 속히 찍어내게 한 다음 나라 안팎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이는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1610년) 8월 6일 기록으로 허준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의 의서는 물론 중국의 의서까지 모두 활용해서 펴낸 것으로, 현대적 분류방법처럼 병증과 치료방법을 중심으로 나누었습니다. 내용은 내과의 질병을 다룬 내경편 6권, 외과의 질병을 다룬 외형편 4권, 내과와 외과를 뺀 여러 가지 병증을 다룬 잡병편 11권, 약물에 관한 지식을 다룬 탕액편 3권, 침을 통해서 병을 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세자를 가르친 것은 나중에 임금을 만들기 위한 영재교육이었기에 세자를 가르치기 위한 별도의 기관을 두었습니다. 태조 때에는 그저 ‘세자관속(世子官屬)’이라 하여 관리만 두었는데 세조 때 드디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립하였습니다. 시강원 설립 목적은 유학교육을 통해서 미래의 임금인 세자에게 임금으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적 지식과 도덕적 자질을 기르기 위함이었지요. 이때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관들은 모두 당대의 실력자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세자의 사부는 물론 가장 고위직인 영의정과 좌ㆍ우의정이 맡았지요. 하지만, 이들은 나랏일로 바빴기 때문에 실제로 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은 빈객(賓客) 등 전임관료들이었는데 주로 문과 출신의 30~40대의 참상관(參上官, 정3품에서 종6품 관료)으로 당상관 승진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강관 박세희(朴世熹)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대하는 데는 반드시 예모(禮貌)로써 하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불소지신(不召之臣)>이 있으니, 그에게 배운 다음에 그를 신하로 삼는다.’ 하였는데, 이와 같은 자는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중종실록》 13년 12월 26일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