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령에 사는 죽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병사를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중간 줄임)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붉은 비단 철릭을 입고, 장사들을 거느려 의령현의 경내와 낙동강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합니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8일 기록입니다. 곽재우는 홀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고 또 왜적을 유인해서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곽재우의 의병은 수십 명으로 출발하여 2,000명에 이르는 큰 병력을 거느렸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1592년 5월 하순 무렵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 대대적으로 벚나무를 심었어요. 자그마치 1,800그루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일제는 그 벚꽃을 이용해서 정례적인 축제를 열어볼까 기획을 하고는, 1924년 봄에 연습 삼아서 조심스럽게 밤 벚꽃놀이 행사를 열었지요.” 이 말은 예전 창경원 수의사였던 김정만 씨가 들려주는 “창경원 벚꽃놀이”가 시작된 연유입니다. 일제는 우리의 궁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동물원을 만들었으며 벚나무를 심어 아예 조선의 궁궐이 아닌 일본 혼으로 즐기는 난장판을 만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제는 조선의 절 경내에도 벚나무를 심으라고 강요했는데 1937년 조선일보에는 경기도 시흥군 내 20여 개 절 경내에 벚나무를 중심으로 나무심기를 하라고 강요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즐기는 ‘벚꽃놀이’는 원래 우리의 풍습이 아니지요. 일본인들은 4월이 되면 하나미(花見、はなみ)라고 해서 전 국민이 벚꽃 아래에 모여 도시락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놀고 즐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배자, 창의, 저고리 등을 놓고 정상들이 입을 겉옷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가운데 APEC 준비기획단은 한복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 정상들도 쉽게 입을 수 있고, 한국의 멋이 물씬 풍긴다는 점 때문에 두루마기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두루마기는 ‘두루 막혔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한자어로는 ‘주의(周衣)’라고 하지요. 조선시대에 양반 남자들이 겉에 입는 옷으로는 도포(道袍)ㆍ창의(氅衣)ㆍ심의(深衣)ㆍ철릭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고종 갑신년에 의복 제도 개혁이 일어나 겉옷으로는 홀가분하고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두루마기로 통일되었습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두루마기는 남녀노소 구별 없는 가장 대표적인 한복의 겉옷, 그리고 예복으로 자리 잡았지요.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말기 왕비 평상복에 관하여 적어놓은 글에도 ‘주의(周衣)’란 말이 나오고, 양반 부인이나 기생의 사진 등에도 이를 입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의 복식에도 두루마기가 우리나라 전통 겉옷으로 완성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금 백성들의 일은 말하자면 참으로 참담합니다. 우선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근과 돌림병이 함께 일어나 주검이 서로 겹쳐 쌓였으며 찌는 듯한 나쁜 기운이 안팎으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백성들을 구하던 관원들까지 잇달아 전염되었습니다. 성안의 모든 집들이 귀천을 가릴 것 없이 제대로 남아난 집이 없으며 황급하고 경황없는 것이 전쟁으로 말미암은 재앙보다도 심합니다.” 이는 《현종개수실록》 현종 12년(1671년) 4월 19일 기록으로 온 나라가 기근과 돌림병으로 백성들이 죽어 나가 그 주검이 겹쳐 쌓였다고 하여 처참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숙종실록》 숙종 25년(1699년) 12월 30일에는 “이 해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서울에 얼어죽은 주검 3천 9백여 구이고, 각도(各道)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25만 7백여 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 우리나라는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세계는 거의 조선 현종 때나 숙종 때의 지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의술이 발전하지 못한 조선시대에는 돌림병 환자가 생기면 병막이나 피막이라 불리는 임시 건물에 격리 수용하고, 여귀(厲鬼) 곧 돌림병으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가운데 줄임 ...)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는 시인 이상의 시 <오감도>입니다. 이 시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작품이지요. 원래는 30회를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으나 "미친놈의 잠꼬대냐?", "그게 무슨 시란 말인가", "당장 집어치워라", "그 이상이란 자를 죽여야 해!" 등 독자들의 비난 투서가 빗발쳐 연재를 중단했습니다. 13인의 아이들이 달립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있습니다. 누가 무섭게 아이들을 몰아세웠을까요. 그리고 뭐가 무서워서 그런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한 아이가 겁에 질려 뛰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아이들도 무작정 그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13인의 아이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13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군 중위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 마을에 들어와 유시와 훈계를 한다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교회에 집합시켰다. 교인 32명이 교회당에 모였으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때 중위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이 예배당을 포위하고 창문과 출입문을 닫고는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예배당에 있던 한 부인은 갓난아이를 창밖으로 밀어내고 병사들에게 ‘나는 죽여도 좋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했으나 병사들은 내민 어린아이의 머리를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이는 민간인 학살현장인 화성 제암리교회의 참사 현장을 목격한 전동례 할머니의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은 학살 만행 현장을 은폐하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두 번 죽인 셈이지요. 이때 갓난아이를 업은 김씨 부인 (1899 ~ 1919. 4.15)도 현장에서 참혹하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김씨 부인은 남편 강태성과 함께 화성 출신으로 제암리교회 참사가 일어나기 전인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2017년 7월 27일 뉴스에는 '이중섭ㆍ박수근 위작사건' 작품들에 대법원 "가짜 맞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위작 논란이 송사에 휘말려 대법원까지 가서 위작이란 결론이 났다는 얘기인데 그만큼 우리나라의 현대회화에서 이중섭ㆍ박수근 작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2018년 3월 7일 뉴스에는 “이중섭 '소' 47억 원 낙찰…8년 만에 작가 최고가 경신”이란 뉴스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으뜸 작가로 꼽히는 이중섭은 1916년 오늘(4월 10일) 태어났습니다. 미술관이라고는 가본 적이 없는 사람도 유명화가 이중섭과 그의 대표작 ‘흰 소’에 대해 들어봤을 정도입니다. 그가 주로 그렸던 작품의 소재는 소ㆍ닭ㆍ어린이[童子]ㆍ가족 등이지요. 그의 그림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면서 동화적이고 또한 자전적(自傳的)인 요소가 많다는 평입니다. 이중섭은 평탄치 않았던 삶을 살았기에 ‘비운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탓인지 그는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았기에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현한 듯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서귀포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27년 전 오늘(4월 13일)은 사상의학을 완성한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 1837~1900)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저술을 끝마친 날입니다. 《동의수세보원》은 이제마가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주창한 책입니다. 책 이름에서 ‘동의(東醫)’는 중국의 의가(醫家)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며, ‘수세(壽世)’는 온 세상 사람의 수명을 연장시킴을 뜻하는 것이지요. 사상의학은 저자 자신이 오랫동안 임상 치료한 경험과 체질에 관한 문헌적 연구에 바탕하여 주창한 학설로서 사람들의 체격, 얼굴 생김새, 성격, 약물에 대한 반응성 등을 종합적으로 보아서 비장이 크고 신장이 작은 소양인(少陽人), 간이 크고 폐가 작은 태음인(太陰人), 신장이 크고 비장이 작은 소음인(少陰人), 폐가 크고 간이 작은 태양인(太陽人) 등 4가지 형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사상인(四象人)에 따라 병이 생기는 원인이 다를 뿐 아니라 병증에서도 각각의 특성이 있고, 약물의 반응도 다르므로 그것에 맞게 치료를 해야 병이 낫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마는 20세기로 접어들던 무렵 ‘사상의학’을 창시해 한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그의 학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의 사상계(界)는 3·1운동을 기회 삼아 일대(一大) 전환을 하였다.(가운데 줄임) 당국이 매양 숫자를 거(擧)하여 조선의 발전을 과장하나, 그것이 전혀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상의 발전이요 이익이다. 조선사람의 생계는 반비례로 궁경(窮境)으로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숫자의 보고는 대부분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경제적 발전을 지칭함이요, 조선인의 생산범위는 도리어 점차 수축됨을 따라서 생활정도가 극도로 저락(低落)하여 전(全) 조선은 정(正)히 아귀굴(餓鬼窟)로 화하였다.” 이는 1924년 펴낸 《개벽(開闢)》 3월호의 이민(李民)이 쓴 “사상(思想)의 추세(趨勢)와 운동(運動)의 방향(方向)”이란 논문 일부입니다. 논문은 조선 사상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당시의 심각한 경제사정과 일제의 식민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개벽》은 1920년 6월 25일자(7월호)로 창간된,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종합잡지였지요. 이 논문에서 보다시피 《개벽》은 우리 겨레의 뜻을 가장 충실히 대변했고, 언제나 일제와 맞서 겨레의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따라서 《개벽》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가운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상하 신하와 백성의 집에 정한 제도가 없어, 서민 집이 분수에 넘치게 관료 집을 따라가고 관료 저택은 감히 궁궐과도 비슷하다. 사치와 아름다움을 다투어 숭상하여 상하에 순서가 없게 되었으니, 실로 옳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칸으로 하고, 대군은 여기에 10칸을 더하고,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으로 하며, 백성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하라. 주춧돌 외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말고, 화공(花拱, 기둥머리의 꽃모양 장식)과 진한 채색과 단청을 쓰지 말고 검약에 힘을 쏟도록 하라.” 이는 《세종실록》 13년(1431) 1월 12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얼마나 집을 호화스럽게 지었는지 세종은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한다는 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종실록》을 보면 “무령군 유자광의 집에 분수에 넘치게 연석(鍊石)을 사용했으니 대신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청컨대 유자광을 죄주고 연석을 철거하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나와 성종 때에 와서도 여전히 사치스러운 집을 짓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번 행차에 수원부를 두루 살펴보니, 새 고을의 관청은 틀이 잡혔으나 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