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 5월 15일은 세종대왕 탄신 623돌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을 맞아 문화재청은 15일 낮 11시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 영릉(英陵)에서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기리는 숭모제전(崇慕祭典)을 봉행합니다. 이 숭모제전은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고 그분의 유덕과 백성사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국가제향으로 거행하고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세종대왕 탄신 623돌을 기념하는 숭모제전은 다시 말하면 생일잔치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생일잔치는 해마다 생가가 아닌 무덤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생일잔치 이후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낼 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어떤 집안이 조상의 생일잔치를 무덤에서 합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도록 크게 이바지한 세종대왕의 생가 복원이 이뤄지지 않아서 생일잔치가 무덤에서 치러지는 것을 개탄하고 지적하고 해왔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예술인들의 생가를 복원해놓은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럴진대 누구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꼽는 세종대왕의 생가복원이 아직껏 삽도 뜨지 않았으니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관에서는 세종대왕의 사저 위치를 콕 집어 확인할 수 없고 당시의 사저 모습을 짐작도 할 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의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1397~1450) 곧 ‘이도(李祹)’가 태어나신 날입니다. 《세종실록》 1권, 총서에 보면 “태조(太祖)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종을 위대한 성군으로 부르는 까닭은 훈민정음 창제부터 모든 정사를 ‘백성사랑’으로 했기 때문이지요. 세종은 들판을 지나가다가 농부를 보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음은 물론 일산(햇빛가리개)까지 치우도록 했으며, 벼가 잘되지 않은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어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세종실록》 59권, 1433년 1월 1일의 기록에는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운 것은 물론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기에,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새해 첫날 회례음악을 연주했는데 세종이 동양음악 십이율(十二律) 가운데 아홉째 음인 이칙(夷則) 하나가 다른 소리가 난다고 지적하여 음악 전문가인 박연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렇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제111호 <김덕령장군 의복(金德齡將軍 衣服)>이 있습니다. 이는 1965년 광산김씨의 무덤들이 모여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에서 김덕령 장군의 무덤을 이장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옷들이지요. 김덕령(1567∼1596)은 임진왜란 때 담양에서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 비록 체구는 작지만 민첩하고 능력이 탁월해 왜병장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무서워 도망갔다고 합니다. 출토된 옷에는 조선시대 문무관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임금을 호위할 때, 또는 국난을 당했을 때 입었던 철릭 여름용과 겨울용 2점, 두루마기와 같은 모습이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직령포 봄가을용과 겨울용 4점, 그리고 저고리 1점과 바지 1점입니다. 철릭은 임진왜란 당시 장군이 입었던 것으로 위급할 때에 양팔을 모두 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여름옷은 흰모시로 만들었고 겨울용은 두터운 솜을 넣고 누빈 것으로 길이도 여름용보다 더 길게 하여 방한용으로 입었지요. 직령포는 흰 무명을 곱게 누빈 봄가을용과 솜을 두텁게 두고 누빈 겨울용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명주직령포는 삭아서 솜만 남았으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코로나19와 관련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 지난 연휴 동안 많은 사람이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객들은 대부분 제주도 흑돼지 고기를 먹고 왔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제주 재래 흑돼지는 옛날 만주지역에서 살던 돼지가 우리 겨레와 함께 한반도로 들어와 기르게 된 것으로 짐작되며 제주에서 발견된 소와 돼지 등의 뼈로 미루어보아 제주에서 흑돼지가 살기 시작한 때는 아마도 석기시대 말이나 청동기 시대 정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제주흑돼지는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 285년)》, 《탐라지(眈羅志, 1651~1653년)》, 《성호사설(星湖僿說, (1681~1763년)》 등의 고문헌을 통해 흑돼지를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제주흑돼지가 유서 깊은 제주 전통 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주 흑돼지는 근대화를 거치며 외국에서 들어온 개량종 돼지와의 교잡으로 순수 재래 흑돼지의 개체수가 점점 사라져 갔지요. 그러다 가까스로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이 1986년 우도 등 제주 재래종 돼지 5마리를 확보하여 복원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제주흑돼지는 2015년 3월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되어 현재 206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이는 일본 센다이의 도호쿠대학(東北大學) 교정에 세운 김기림 시인의 기념비에 새겨진 ‘바다와 나비’입니다. 시에서 ‘나비’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존재 곧 당시의 지식인이며, 이 시는 거친 바다의 험난함과 흰나비의 가녀림을 압축적으로 대비한 작품이라고 하지요. 오늘은 김기림 시인이 태어난 날입니다. 일본에는 윤동주를 사랑하는 일본인 모임이 여럿 있지만, 김기림의 시를 좋아하는 일본인들도 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몰랐습니다. 도호쿠대학에 시비를 세운 지 1돌을 맞아 지난해 2019년 11월 30일에는 “김기림에게 배운다. 지금이야말로 센다이에서 일한시민교류를!”이란 행사가 열렸음을 김기림기념회(金起林紀念會) 공동대표인 아오야기 준이치 (靑柳純一) 씨는 전해주었습니다. 김기림(1908~?)은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던 ‘구인회’ 대표로 ‘모더니즘의 기수’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시내 죽첨정 삼정목(竹添町 三丁目) 일백팔번지에 사는 리윤의(李允義)라는 아해는 열두 살 때에 자기 부친을 여의고 모친 홍성녀(洪姓女)와 함께 근근히 괴로운 생활을 하여 오든바 얼마 전에는 자기 모친이 중병에 걸리어 지나간 이일 저녁에 생명이 위급케 되었슴으로 그는 원래 효성이 지극한 아해라 엇지할 바를 아지 못하다가 그만 왼편 손가락을 칼로 찍어 그 흐르는 피를 모친의 입에 흘녀 너헛는데 그의 모친도 그 효성에 감동하엿든지 소생하야 생명에는 관계가 업다더라.” 이는 동아일보 1924년 1월 5일자 “편모(片母)를 위하야 단지(斷指), 열두살 먹은 어린아해가”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는 1921년부터 1940년까지 ‘단지(斷指)’라는 말로 검색해보니 동아일보에만 무려 98건이나 보입니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견주면 정말 살기 좋아진 지금 언론에는 나이 드신 부모님을 버리는가 하면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는 일도 종종 보입니다.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는 숙종임금의 장인인 김주신(1661~1721)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김주신은 아버지 산소를 갈 때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개야 개야 검둥개야 밤사람보고 짖지 마라 개야 개야 검둥개야 밤사람보고 짖지 마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슬금 살짝 오신 임을 느닷없이 내달아서 컹컹 짖어 쫓게 되면 야반삼경 깊은 밤에 고대하던 우리 임이 하릴없이 돌아서면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위는 서도민요 “사설난봉가” 가운데 일부입니다. 가사를 보면 “개야 개야 검둥개야 밤사람보고 짖지 마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슬금 살짝 오신 임을 느닷없이 내달아서 컹컹 짖어 쫓게 되면 (가운데 줄임) 하릴없이 돌아서면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라고 하여 참 재미나게 부릅니다. 또 ‘사설난봉가’의 다른 부분을 보면 “앞집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뒷집 총각은 목매러 간다. 사람 죽는 건 아깝지 않으나 새끼 서발이 또 난봉나누나.”처럼 ‘사설난봉가’는 가사가 모두 해학으로 넘칩니다. ‘사설난봉가’는 ‘개타령’ 또는 ‘잦은개타령’이라고도 하지요. 원래 ‘난봉가’는 서도소리 가운데 가장 흥겨운 소리인데 ‘사설난봉가’ 말고도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타령난봉가’(‘병신난봉가’ 또은 ‘별조난봉가’라고도 함), ‘숙천난봉가’, ‘사리원난봉가’, ‘개성난봉가’, 연평도난봉가(‘니나니타령‘) 등 많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얼은 암흑 속에 사라지는가. 이제 어디에서 우리의 얼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하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속에서 한 말입니다. 선생은 중국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부인 성씨(成氏)가 1913년 9월에 첫딸을 출산한 뒤 엿새 만에 산고로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녔지요. 이것은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과 함께 나라 잃은 슬픔을 상복으로 나타내어 독립에 대한 염원이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127년 전인 1893년 오늘(5월 6일)은 정인보 선생이 태어난 날입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 중국 땅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귀국 뒤에는 글을 써서 일제와 싸웠는데 특히 일제가 날조한 역사 대신 우리의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얼’을 강조하는 ‘얼사상’을 주창했습니다.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역사 연구에 몰두하며, “말 한마디, 일 하나, 행동 하나, 움직임 하나까지 깡그리 고갱이가 ‘얼’이어야 한다.”라고 강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반팔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여름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제법 덥게도 느껴집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기자는 사람들의 나들이 모습을 그렇게 보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팔’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보고 언론이 우리말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팔’은 사람의 팔을 반만 덮은 웃옷이라 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겐 ‘소매’라는 말이 있기에 ‘반소매’라고 해야만 합니다. 지난 2008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인수위원장 이경숙 씨가 '오렌지'라고 하면 안 되고 '어륀지'라고 해야만 한다며, 영어몰입교육과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많은 이의 질타를 받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영어를 조금만 잘못 쓰면 안 되는 것처럼 난리를 치지만 정작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사회의 풍조가 참 안타깝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여 한글 전용, 가로쓰기, 통일된 표기법을 주장했던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주시경 선생은 “나라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나라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고 했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최현배 선생은 《금서집(방명록)》에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요즈음은 평소에 책을 읽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도를 배워서 성인(聖人)의 정밀하고도 미묘한 경지를 엿보고, 널리 인용하고 밝게 구별하여 알아 천고(千古)를 통해 판가름 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호방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빼어난 글을 구사하여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 간의 세 가지 유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1814년(순조 14)에 펴낸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들어 있는 <일득록(日得錄)>의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 따르면 정조는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합니다. 또 ”책을 읽는 것은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작가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책을 읽는 사람이 참 드물다며 안타까워하지요.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