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기자] 이범진(李範晉, 18521911) 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 외교관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관으로 이름난 훈련대장 이경하(景夏)의 아들이었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뒤에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며 실패하여 일시 러시아에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여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 이범진 애국지사 1897년 선생은 자원하여 주미공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구국외교에 투신하였다. 이후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까지 4개국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공사로 있던 시절 선생은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대한제국 정부가 용암포 조차를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선생은 여기에 반발하여 이 공문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홍언(1880~1951)선생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의 민족운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생이 사망한 뒤, 미주사회에서는 선생을 고결한 참된 애국자이며, 평생을 언론기관을 위해 힘썼으며, 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한 작가ㆍ시인ㆍ평론가로 평가하고, 자신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한 인물로 기억하였다. 선생의 본명은 홍종표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고 일시 중국을 다녀온 뒤, 1904년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하와이에서 여러 언론매체의 주필로, 그리고 1911년 이후에는 미주 본토에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편집과 기고가로 수십 년 봉사하였다. 또한 선생은 『신한민보』에 동해수부 등의 필명으로 시ㆍ시조ㆍ소설ㆍ희곡ㆍ전기ㆍ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백 편을 발표하는 등 언론가이자 작가로서 활동하였다. 선생은 대한인국민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직임을 맡았으며, 흥사단의 창립단우로 흥사단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하여 한인단체를 주도하거나 재정지원을 한 인물들도 많지만,
[그린경제/ 얼레빗 = 이규봉 교수] 법 또는 권력의 힘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제도는 사람들이 국가를 만든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아주 오래된 제도이다. 거의 모든 종교가 살인을 저지르지 말라는 가르침을 가지고 있음에도 국가는 사형을 집행했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심지어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기독교 국가에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까지도 일삼았다. 그 현장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대중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렇지 않은 시민은 조용히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훔쳤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12년 7월에 생명권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며, 국제인권법의 핵심적인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인간이 인간에게 하기엔 너무나 절대적인 결코 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극형은 범죄를 막지 못한다 사형을 당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형을 당할만한 범죄자였을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사형을 당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죽은 자가 얼마나 될까?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에 의해서, 재판관의 어리석음과 탐욕에 의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또
[그린경제/ 얼레빗 = 윤지영 기자 ] 조병준 (1862-1931)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殖産)과 교육에 힘썼다. ▲ 조병준 선생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우리문화신문= 도쿄 전수희 기자] "처음으로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얼마나됩니까?", "한국에서는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까?" , " 이윤옥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시를 쓰고 그 일생을 알리고 계신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쵸후시 영상시어터 강연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 "항일여성독립운동가" 특강을 듣기 위해 도쿄 쵸후시 영상시어터 강연장을 가득 메운 일본시민들 17일 오후 6시 30분부터 9시까지 일본 도쿄 쵸후시(調布市) 문화회관 다즈쿠리 8층 영상시어터 강연장에서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의 <조선, 한국의 여성들 “식민지 시대의 독립운동과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특강이 열렸다. 100여 석의 강연장을 가득 메운 일본 시민들은 이윤옥 소장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 2시간 반 동안 휴식 없이 자리를 뜨지 않고 경청했다. 700엔(한국돈 7000원 정도)의 입장료에도 자리를 가득 메운 일본 시민들의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가 뜨겁게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 이번 강연을 주선한 35년 전통의 쵸후시 물레회의 반나이무네오 씨가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조병준 선생의 자는 유평(幼平), 호는 국동(菊東)이다. 평북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3세 때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운암 박문일의 문하생으로 수학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의거에 호응하여 평안북도 창성에서 거의했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던 중 광무황제의 특사로 출옥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재차 거의하여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으나 일제의 병력이 증강되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 조병준 선생 관전현과 환인현 등지에 근거를 마련하고 의병장 전덕원, 박장호, 이진용, 조맹선, 백삼규 등과 함께 농무계와 향약계 등을 조직하여 교민들의 식산(殖産)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림단과 포수단 등을 주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총참모에 선임되어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동 단체가 양분되자 민국독립단 도총재로 활동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의 비밀연락방 조직인 연통제 평북독판부 독판에 선임되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이종훈([1856~1931) 선생은 1856년 경기도 광주 실촌면 유사리에서 태어났다. 1883년 동학에 입도한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2차 봉기과정에서 부상하기 시작, 경기충청강원을 망라한 20여개가 넘는 포를 아우르는 북접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던 시기 박인호 등과 함께 교단 운영에 참여하였고 1905년 12월 천도교가 창건되는 과정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중앙교단의 고위 간부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계속되던 중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도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게 일었다. 1919년 2월 25일, 선생은 권동진,오세창을 만나 독립선언 참가 제의를 수락했다. 천도교 중앙교단의 최고직인 장로였던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고령자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3월1일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천도교단의 원로로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은 1922년 7월, 천도교 혁신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신현구 선생([1882-1930) 은 1882년 12월 8일 충남 논산 부적면 안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인 논산에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이던 선생은 1906년경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를 만나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활동했고, 민족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에 뜻을 두고 1915년 서울로 올라와 이화학당 부속여학교 교사로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년 5월 그 추진체로서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하였다.대한독립애국단은 단장인 선생과 함께 재무총장 김순호, 김상덕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 신현구 선생 국외에 설립된 임시정부는 국내의 재정적 후원 및 지지를 절실히 필요로 했으므로 동단은 결성 초기부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대한독립애국단 단장으로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 조달,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망인 연통제의 역할을 하였다.
[그린경제/얼레빗 = 중국 목단강 이윤옥 기자] "여권을 보여주십시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입구에는 젊은 관리원이 앉아 있었는데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9월 25일 오후 3시 일본인 작가 도다 이쿠코 씨와 기자는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아갔는데 입구에서 신분증 제시 요구를 받았다. 기자의 한국 여권을 꺼내 보인 뒤 장부에 여권번호를 적어 넣은 뒤에 기념관엘 들어 설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됩니다." 젊은 관리는 우리를 바라다보면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복도처럼 생긴 좁은 전시장 안을 들어서니 이미 들어 와 있는 관람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 1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실2 사실 여권은 한국인인 내 여권만 보여주었다. 관리의 눈에는 "아줌마 두 명이 국적이 같을 것"이라고 여겨졌는지 일본인 작가의 여권 제시는 요구하지 않았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서야 도다 이쿠코 씨는 "전에 기념관 개관식 때 일본인 기자가 취재하러 왔다가 입장을 거부당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어 일부러 자신의 여권을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현정건 (1887~1932)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상해 인성학교의 교사로서 청년들을 교육하고,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는 등 왕성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정건선생은 대구 출신으로서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1919년 9월 17일 보선되어 임시정부의 국사처리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6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될 때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원으로 윤해,신숙 등이 주동이 된 창조파에 속하여 활동하였으나, 조선공화국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이러한 일은 전민족의 의사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공산당 대표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 현정건 선생 1924년 6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오는 국내 학생들이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지 못하여 중국 사회에 적응치 못하고 상급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는 실정에 놓이게 됨을 타개하고자 김규식의 제안으로 인성학교내에 예비강습소를 개설하였을 때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영어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