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박자헤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고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린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약 10여년 궁중생활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궁녀 신분을 벗어난 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다녔다. 졸업 후 경제적인 독립을 위해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의 간호부로 취업하였다. 1919년, 간호부 근무 당시 31만세운동으로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민족의 울분을 느끼고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자혜 선생 선생은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져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하고 선생도 직접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동 병원의 의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였고,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풀려났으며, 이후 북경으로 건너갔다. 북경에서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한 선생은 북경생활 1년여를 지낸 1920년 봄, 평생의 반려자 신채호 선생을 만나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윤병구 [1880~1949] 선생은 1903년 10월 5일,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정착하여 목회자로서 그리고 미주사회의 중심인물로서 한인사회의 화합과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이전,한성사범학교에서 헐버트의 영향으로 기독교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선생은 하와이 이민 후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하와이에서 조직된신민회를 통해 국권회복 활동과에와친목회를 결성하여 일본 상품 배척 및 동포들의 친목과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다. ▲ 윤병구 선생 1905년 7월 12일, 선생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러일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이승만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묵인한 후였다. 1907년 8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특사로 활동한 이상설과 이위종이 이준 열사의 자결 후 뉴욕에 도착했을 때, 박용만의 주선으로 선생도 이들의 외교활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국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유럽순방외교를 떠난 후 약 6개월 후인 1908년 3월
[한국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양근환 [1894-1950] 선생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에서 태어나 18세에 사립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1914년에 서울에 올라와 공업전습소를 다녔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한때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여 일본인과의 다툼으로 체포되어 50일간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즉시 고향에 내려가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도항 후 일제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 니혼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으나 가난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자 친일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 중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내세우며 총독부를 적극 지지하였고 친일파 규합운동에 앞장섰다. 회장인 민원식은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참정권 운동을 주도했고, 1921년 2월 이를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하게 되었다. 선생은 민원식의 방문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921년 음력 2월 16일 도쿄역 호텔 제14호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홍병기 [1869~1949] 선생은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홍익룡과 한익화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닦아 19세 때인 1887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24세 때인 1892년에 동학에 입교한 선생은 손병희의 휘하에서 무장, 영동, 보은, 음성, 공주 우금치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1905년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후 천도교의 중앙총부에서 천도교의 정책과 노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교직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선생은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을 알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10일 무렵 권동진을 만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참석하여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식을 참석하였고 독립선언식 거행 직후 곧 일본관헌에 체포되었다. 홍병기 독립투사 선생은 심문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고 묻자, 그렇다. 기회만 있으면 운동을 할 것이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김도연 [1894~1967] 선생은 경기도 김포(현 강서구 염창동)에서 아버지 김종원과 어머니 초계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나 7세 때부터 한학을 익히고, 우국인사들이 세운 태극학교(太極學校)에 입학해 근대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이후 1913년 일본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 3학년에 입학한 선생은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졸업 이후 게이오대학(慶應大學) 이재과(理財科)에 들어가 일본 유학생의 중추 조직이었던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서 학우회의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ymca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동경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출옥한 뒤찍은 사진(김철수,윤창석,김도연,최팔용,백관수,송제백,서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동경유학생들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동경시내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여, 약 2개월에 걸쳐 준비한 끝에 1919년 2월 8일 조선ymca회관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모임의 명칭을 동경유학생 임시총회로 하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사랑하는 나의, 우리의 그리고 대한의 벗 그대여! 그대가 걸어온 길, 그 마음 언저리라도 가보고저 그대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소. 참으로 멀고도 먼 곳, 어인 마음으로 그리도 멀리 가셨소. 홀어머니, 아내와 피붙이 즈려밟고 조국 향한 그 마음 하나에, 그리도 멀리 가셨소. 이름 없이 떠나간 수많은 청춘들의 조국 향한 뜨거운 피 자식 기다리는 홀어머니 초롱불처럼, 가는 길 환히 밝혀주는구려. 1909년 10월 26일 09시 30분. 멈춰진 하얼빈역 시계처럼 그대와 우리
[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우재룡 [1884~1955]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단양우씨 채희와 진주강씨의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문인적 소양보다는 무인적 성향이 강했는데 이는 부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2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는 1907년까지 5년간 근무 하던 중 정용기 산남의진 의병장을 만나 큰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훈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일본군과의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체포되어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 우재룡 선생 1915년 7월 15일(음),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ㆍ폭동ㆍ암살ㆍ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군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백일규 [1880-1962]선생은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과 모친 송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어려서 한학을 배운 선생은 동학에 깊이 공감하고 접주로 활동하였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미주 유학을 결심 1905년 6월 9일 진남포를 출발하여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에와사탕수수 농장의 고딘 노동 중에도 선생은 에와친목회에 가입하여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고 이후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문양목의 후임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겸 대동공보의 주필에 선임되어 일본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백일규 선생 1908년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여론은 같은 해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극대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대한제국 외교고문에 대한 응징이자 일제에 대한 경고였다.의거 직후 선생은 7인 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양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함은 물론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고 무단통치가 자
[그린경제/ 얼레빗 = 이나미 기자] 나라 위해 목숨 던지니, 동포들이여 꺾이지 말라이중언(1850-1910) 선생은 1850년 안동 예안의 하계마을에서 퇴계 12대 손으로 태어났다. 1879년 5월 대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가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의 이권 침탈을 목도하고 낙향했다. 일제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가 이에 항거하여 안동 예안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은거 중이던 선생은 선성의진의 이중린 대장 휘하 전방장으로 의병의 선봉에 섰다. 선성의진은 영주, 순흥의진과 연합하여 7천명 규모로 상주 태봉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였다. 선생은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으나 일본군에게 밀려 끝내 해산되었다. 의진 해산 후 신암폭포 아래 은거하던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 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완용 등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이때 만60세를 맞은 선생은 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
[그린경제/ 얼레빗 = 이윤옥 기자] 김익상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목재 장사를 하던 부친이 일본인에게 속아서 재산을 잃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재학 중이던 삼호보성소학교를 그만두고 철공소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1919년 광성연초회사로 직장을 옮긴 후 1921년에 중국 봉천 지점의 기계 감독으로 발령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비행사의 꿈을 품고 있던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간 이후 비행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고 광동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 광동의 호법 정부는 북벌에 치중하느라 비행학교를 운영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꿈을 접게 된 선생은 북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북경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선생이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생명을 받쳐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원이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및 친일파 거두와 밀정 등을 7가살(七可殺)로 규정하고 일제식민통치기관을 파괴대상으로 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의열단 가입 후 선생은 김원봉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