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주시 남산에는 높이 약 9m, 둘레 약 26m의 큰 바위 4면에 수십 구의 불보살상과 기타 조각이 새겨져 있는 보물 제201호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 있습니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으로 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불상과 독립된 보살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불상ㆍ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각 다릅니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습니다. 이 불상들은 돌기둥 4면에 새겨져 있어 사방사불(四方四佛, 모든 곳에 부처가 있다는 뜻으로 사면에 새긴 불상)의 하나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에 의하여 이곳에는 신인사(神印寺)라는 절이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 때부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모란은 꽃 가운데 임금, 곧 화왕(花王)이라고도 불리는,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그런데 국립고궁박물관에는 모란꽃을 그린 여덟 폭의 병풍이 있습니다. 모란은 괴석 위에 곧게 그려졌는데 괴석은 오랫동안 변치 않는 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장수(長壽)를 뜻합니다. 이 모란을 그린 병풍은 궁중에서 장식하기 위하여 쓰였고, 또한 중요한 행사 곧 생일, 혼인, 책봉, 어진 제작 등을 기념한 여러 잔치 때 빠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기쁜 날뿐만이 아니라 장례식에도 쓰였다고 하지요. 특히 모란꽃은 장수뿐만이 아니라 부귀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때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쓴 ‘애련설(愛蓮說)’에서 거론된 덕이라고 합니다. 이 모란도는 몇 개의 가지가 괴석 위로 곧게 솟아 올라있고, 가지에는 흰색,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등 다양한 빛깔의 봉오리들이 빼곡하게 피어있습니다. 또 꽃들은 앞면, 옆면은 물론 다양한 꽃봉오리부터 활짝 피었을 때까지의 여러 모습을 표현하였지요. 그런데 이 모란꽃은 사실적인 것을 무시한 평면적인 그림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잔치 때 종이꽃 곧 지화(紙花)를 만들어 꾸몄는데, 이 지화가 단순히 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은 ‘국문가사예찬론’에서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는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 다른 나라의 말에 불과함)’으로 보았으며,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가사를, 굴원(屈原)의 서사시 <이소(離騷)>에 견주었지요. 더구나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소설을 상당수 창작했기에 정철, 허균(許筠)과 함께 우리말 문학가로서 분명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습니다. 김만중은 그를 소설문학의 선구자로 올려놓은 《구운몽(九雲夢)》을 비롯하여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을 썼지요. 이 가운데 《구운몽》은 이규경(李圭景)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에서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 씨 부인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 오라고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아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3월 24일 서울옥션에서는 제155회 미술품 경매가 열렸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정약용이 쓴 《행초 다산사경첩(行草 茶山四景帖)》이었습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유배 시절부터 적어온 시와 글들의 모음입니다. 전남 강진에 머물던 1809년에 쓴 〈다산사경(茶山四景)〉과 1818년에 쓴 〈순암호설(淳菴號說)〉, 유배가 끝난 후인 1823년에 쓴 〈여다산제생문답(與茶山諸生問答)〉, 그리고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으나 유배 초로 추정되는 오언시 등을 담고 있습니다. 행서가 주를 이루며, 일부 다산의 초서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지요. 작품은 보물 제1683-1호로 지정되어, 정약용의 가족사랑을 노을빛 치마에 새긴 보물번호 1683-2호 《하피첩(霞帔帖)》과 함께 다산의 유배시절을 대표하는 서첩으로 손꼽힙니다. 유배의 설움을 딛고 주변의 일상과 자연풍경에 주목하며, 그 세심한 관찰력을 발휘한 작품이지요. 많은 이들에겐 자칫 악몽과도 같을 유배지의 생활이 다산에게는 또 다른 무언가를 연구할 기회였으며, 유배가 풀린 뒤에도 초당 주변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미물에 대한 관심과 물음을 아끼지 않은 다산의 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방가사(內房歌辭)> 곧 <규방가사(閨房歌辭)>는 조선 중기 이후 주로 영남지방의 양반집 여성들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여성들의 집단문학입니다. 초기에는 여성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다양한 소재와 정제된 운율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민족적 가치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과 같은 내용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특히 내방가사는 유교문화가 가장 잘 발달된 강력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에 의해 우리 겨레의 언어인 ‘한글’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삶과 애환을 드러낸 독특한 문학형식을 만들어 냈지요. 대구가톨릭대학교 권영철 명예교수는 무려 6천여 편의 내방가사를 수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동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내방가사가 가진 값어치를 여성의 주체적 자기 고백의 역사에서 찾으면서도 이것이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억압받는 삶은 전 세계적인 역사였지만, 그것을 문학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은 세계적으로도 내방가사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뉴스에서는 “구글이 매년 4월 1일 만우절이면 해왔던 '만우절 장난'(April Fools)을 올해는 건너뛰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심각한 위협에 대응하는 게 우선이란 판단에서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만우절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음 얘기가 그럴듯합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새해를 3월 25일에 시작했는데 해마다 3월 25일이 되면 축제를 열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1564년 샤를 9세가 새해를 4월 1일로 바꿔 버렸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래전부터 해 오던 대로 3월 25일에 설을 쇠고, 대신 4월 1일에는 설을 쇠는 흉내를 냈다. 장난스럽게 새해 잔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4월 1일에 만우절 풍습이 생긴 것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일 기사에는 “만우절에 일어난 넌센스 한 토막. 만우절인 1일 아침 7시 45분 대구방송국에서는 ‘희망의 속삭임’ 시간을 통하여 앞으로 3일간에 걸쳐 선착순으로 ‘트란지스타라디오’ 한 대씩 시민에게 선사한다고 거짓말 방송을 했는데 이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동 방송이 끝난 3분 후부터 경북고교생을 비롯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毋將一紅字(무장일홍자) ‘홍(紅)’자 한 글자만을 가지고 泛稱滿眼華(범칭만안화) 널리 눈에 가득 찬 꽃을 판단치 말라 華鬚有多少(화수유다소) 꽃 수염도 많고 적음이 있으니 細心一看過(세심일간과) 세심하게 하나하나 살펴보게나 이는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사람들을 위해 고갯마루의 꽃을 보고 쓴 한시 ‘위인부령화(爲人賦嶺花)’입니다. 박제가는 꽃이라고 하면 ‘붉다’는 생각만 가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꽃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곧 꽃에는 다양한 빛깔의 꽃이 있고, 또한 꽃에서 잘 보지 않는 부분인 꽃 수염은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다면서 꽃 수염들부터 세심하게 살펴보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물론 세상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들의 잘못된 고정 관념을 비판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로 재단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세태를 박제가는 꼬집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펴낸 조리서에는 《수문사설(䛵聞事說)》, 《시의전서(時議全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중 정조지(鼎俎志), 《군학회등(群學會騰)》, 《음식디미방》,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반찬등속》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540년 무렵에 김유(金綏)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이란 조리서도 있습니다. 책 이름은 중국의 고전 《역경(易經)》에서 따온 말로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니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군자는 먹고 마시고 잔치하고 즐거워한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수운’은 격조 있는 음식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 수운에 걸맞은 갖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의미로 ‘잡방’을 붙인 것입니다. 이 책은 우법(又法) 곧 또 다른 방법이라 하여 하나의 음식이라도 만드는 방법을 두세 가지로 설명하였는데, 이 우법을 포함하면 상하편 전체 121가지 조리법이 등장합니다. 술이 61가지, 식초류 6가지, 푸성귀 절임과 침채류가 15가지, 장류 11가지, 과즐 곧 한과류 5가지, 찬물류 6가지, 탕류 6가지, 두부와 타락(우유) 1가지씩, 주식에 해당하는 면류 2가지, 푸성귀와 과일의 씨뿌리기와 저장법 7종 등이지요. 특히 육수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중간 줄임)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기록으로 임진왜란 중 거북선이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자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만들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오늘(3월 27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14일에 올린 장계를 보면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고 특별히 거북선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이는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1910년 오늘(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브러우닝 권총으로 처단했습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합니다. 의사는 거사 직전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남몰래 기뻐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받았지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