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이틀 전 4월 29일 문화재청은 “그동안 국보로서 위상과 값어치 재검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국보 제168호 ‘백자 동화매국문 병’에 대해서 지정 해제를 예고하였다.”라고 밝혔습니다. 원래 국보나 보물로서 지정하려면 “문화재보호법” 제4장 국가지정문화재 제1절 지정 제23조(보물 및 국보의 지정)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 기준을 보면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진사(辰砂; 酸化銅)를 쓴 조선 전기의 드문 작품으로 화려한 문양과 안정된 기형(器形)이 돋보인다.’라는 사유로 1974년 7월 4일 국보 제168호로 지정되었으나, 실제 조선 전기 백자에 이처럼 동화(銅畵)를 물감으로 쓴 사례가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중론이라고 합니다. 또 지정 당시에는 기형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 15세기 빚은 것으로 보았으나, 기형과 크기, 기법, 무늬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에서 ‘유리홍(釉裏紅)’이라는 원나라 도자기 이름으로 여럿 현존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이 작품도 조선 시대가 아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足凍姑撤尿(족동고철뇨) 언 발에 오줌 누어 무엇하랴? 須臾必倍寒(수유필배한) 금방 반드시 배나 추워질 것인데 今年糴不了(금년적불료) 올해에 환곡을 갚지 못했으니 明年知大難(명년지대난) 내년은 더욱 곤란할 것을 알겠네 이는 18세기 후반기 대표적인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가 쓴 ‘수주객사(愁洲客詞)’라는 한시(漢詩) 일부로 함경도 종성 지역의 문물과 풍속을 다룬 연작시(連作詩)의 한 부분입니다. 언 발에 오줌을 누면 발이 잠시 따뜻해질 뿐 금방 발이 얼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올해 농사지은 것으로 환곡(還穀)을 갚지 못했으니, 내년에는 얼마나 시련이 닥칠지 보지 않아도 알겠다고 말합니다. 박제가가 살던 당시 관리들이 백성에게 얼마나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심지어는 우물까지 독점한 탓에 물도 세금 내고 먹어야 했습니다. 또 백성은 베를 열심히 짜서 세금으로 바치면, 관에서는 그걸 헐값으로 쳐주곤 했으니, 백성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가엾은 백성은 관리를 보면 먼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박제가가 보았던 변방 함경도 종성지역은 특히 더 심했을 것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등 모든 궁궐의 정전에는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병(日月五峯圖屛)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의 어진 뒤에도 오봉도가 설치되어 있지요. 이처럼 이 병풍은 아무 곳에서나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앉는 자리 뒤에 놓였던 특수한 그림입니다. 이 병풍의 그림 <일월오봉도>는 하늘에는 흰 달과 붉은 해가 좌우로 나뉘어 둥그렇게 떠 있고, 그 아래로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일월오봉도입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크게 출렁이는 파도가 나타나고, 그림의 좌우 양쪽 끝으로는 붉은 몸통을 드러낸 소나무가 있습니다. 또 그림에서 다섯 봉우리 중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면서 화면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 양 옆에 솟은 두 봉우리 사이에 달과 해를 두고, 그 아래 골짜기에서 폭포가 떨어지며, 산 아래의 물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림의 옆에 대칭적으로 솟은 자그마한 둔덕 위에는 역시 두 그루의 소나무가 대칭을 이루며 솟아있습니다. 곧 이 그림은 완벽한 대칭과 균형을 강조하는 구성을 보여주는데, 현재 남아있는 오봉도병과 오봉도병을 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영친왕비가 1922년 순종을 알현할 때 입었던 ‘대례복영친왕비 적의(翟衣)’가 있습니다. ‘적의’란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왕비나 왕세자빈이 혼례인 가례(嘉禮) 때 입었던 옷입니다. 적의(翟衣)의 뜻은 적문(翟紋) 곧 꿩무늬를 일정한 간격 그리고 규칙적으로 넣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제 이 적의에는 138쌍의 꿩과 오얏꽃 형태의 소륜화(小輪花) 168개의 무늬가 9줄로 짜여 있습니다. 깃(저고리나 두루마기의 목에 둘러대어 앞에서 여밀 수 있게 된 부분) · 도련(두루마기나 저고리 자락의 맨 밑 가장자리) · 섶(저고리나 두루마기 따위의 깃 아래쪽에 달린 길쭉한 헝겊)과 소맷부리(옷소매에서 손이 나올 수 있게 뚫려 있는 부분)에는 붉은색 바탕에 노랑색의 구름과 봉황무늬로 선을 둘렀습니다. 적의의 앞뒤, 그리고 어깨에는 다섯 가지 색깔과 금실로 수를 놓은 너비 17.5cm의 오조룡보 곧 발톱이 5개인 흉배를 붙였지요. 또 너비 8.3cm 겉고름은 긴 쪽은 93cm, 짧은 쪽은 83cm이고 안고름은 각각 93cm, 86cm입니다. 여기서 영친왕비는 대한제국기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은 모든 국가적 행사를 기록으로 남겼기에 기록의 나라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기록에는 물론 궁궐을 지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궁궐 영건(營建) 곧, 나라가 궁궐 등을 짓는 것은 국가의 운영을 계획하여 짓는 일로 궁궐, 종묘, 사직단, 성곽 등에 유교 통치 이념을 담아 건축하였습니다. 궁궐 영건에는 처음 짓는 것은 물론 보수하거나 고쳐 짓는 중건(重建)과 수리(修理), 그리고 옮겨 짓는 이건(移建) 등 크고 작은 공사가 포함되며 별도의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완수하였지요. 지난 2016년 12월 6일부터 2017년 2월 19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영건(營建), 조선 궁궐을 짓다」 특별전이 열렸는데 이 특별전에 전시된 유물 가운데는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보물 제1901-2호 《조선왕조의궤》의 1책)를 비롯한 《영건의궤》, 경희궁을 그린 ‘서궐도안(西闕圖案)’(보물 제1534호), 고종년간 경복궁 중건에 관해 기록한 《영건일감(營建日鑒)》, 덕수궁 중건공사에 대한 문서 묶음인 ‘장역기철(匠役記綴)’ 등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은 1865년(고종 2) 2월부터 1867년(고종 4) 1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등푸른 햇살이 튀는 전나무 숲길 지나 내소사 안뜰에 닿는다 세 살배기가 되었을 법한 사내아이가 대웅보전 디딤돌에 팔을 괴고 절을 하고 있다. 일배 이배 삼배 한 번 더 사진기를 들고 있는 아빠의 요구에 사내아이는 몇 번이고 절을 올린다 저 어린것이 무엇을 안다고 대웅보전의 꽃창살무늬 문(門)이 환히 웃는다. 박성우 시인의 ‘내소사 꽃창살’ 시입니다. 부안군 내소사 대웅보전의 문은 꽃살문으로 깨우침의 단계를 표현하기 위해 꽃봉오리와 활짝 핀 꽃을 함께 새긴 걸작으로 손꼽히지요.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록 단청은 빛이 바랬지만, 꽃살 무늬가 가진 조화와 화려함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여기 내소사 말고도 논산 쌍계사 대웅전, 영광 불갑사 대웅전, 대구 팔공산 대웅전과 강화 정수사 대웅보전에 가도 꽃살문은 대웅전을 한층 품격있게 만들어 줍니다. 궁궐이나 민가의 아(亞) 자 무늬, 띠살무늬 등이 단아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이 대웅전의 꽃살무늬는 꽃을 새긴 덕에 화려하고 정교하지요. 문살에 새겨진 꽃의 종류는 윤회와 정화를 뜻하는 연꽃을 비롯하여 모란, 국화, 해바라기 등이 있으며 또한, 무슨 꽃인지 잘 알 수 없는 관념적인 모양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조는 평생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피부병을 낫기 위하여 전국의 이름난 약수터와 온천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서도 목욕하게 되었지요. 그때 세조는 지나가는 동자승을 불러 자신의 등을 밀어달라고 했습니다. 동자승이 세조의 등을 밀어주자 세조의 몸에 있던 종기가 말끔히 나았습니다. 그래서 동자승에게 고맙다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 임금의 몸에 손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에 동자승은 "대왕께서도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수동자상을 새겨 상원사에 모셨고, 현재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전설이 전해올 정도로 조선시대 여러 임금은 종기로 고생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세조 외에도 문종, 성종, 중종, 효종, 현종, 숙종, 정조 등이 종기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종기 치료를 전담하는 ‘치종청治腫廳)’이라는 관청을 두었을 정도지요. 전통적으로 종기를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한약재를 다려 만든 고약을 환부에 붙이는 방법이 고작이었는데 근세에 와서 이 ‘고약(膏藥)’이 치료제로 주목을 받았고, 1906년 이명래(1890~195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의령에 사는 죽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병사를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중간 줄임)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붉은 비단 철릭을 입고, 장사들을 거느려 의령현의 경내와 낙동강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합니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8일 기록입니다. 곽재우는 홀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고 또 왜적을 유인해서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곽재우의 의병은 수십 명으로 출발하여 2,000명에 이르는 큰 병력을 거느렸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1592년 5월 하순 무렵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 대대적으로 벚나무를 심었어요. 자그마치 1,800그루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일제는 그 벚꽃을 이용해서 정례적인 축제를 열어볼까 기획을 하고는, 1924년 봄에 연습 삼아서 조심스럽게 밤 벚꽃놀이 행사를 열었지요.” 이 말은 예전 창경원 수의사였던 김정만 씨가 들려주는 “창경원 벚꽃놀이”가 시작된 연유입니다. 일제는 우리의 궁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동물원을 만들었으며 벚나무를 심어 아예 조선의 궁궐이 아닌 일본 혼으로 즐기는 난장판을 만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제는 조선의 절 경내에도 벚나무를 심으라고 강요했는데 1937년 조선일보에는 경기도 시흥군 내 20여 개 절 경내에 벚나무를 중심으로 나무심기를 하라고 강요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즐기는 ‘벚꽃놀이’는 원래 우리의 풍습이 아니지요. 일본인들은 4월이 되면 하나미(花見、はなみ)라고 해서 전 국민이 벚꽃 아래에 모여 도시락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놀고 즐기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은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배자, 창의, 저고리 등을 놓고 정상들이 입을 겉옷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가운데 APEC 준비기획단은 한복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 정상들도 쉽게 입을 수 있고, 한국의 멋이 물씬 풍긴다는 점 때문에 두루마기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두루마기는 ‘두루 막혔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한자어로는 ‘주의(周衣)’라고 하지요. 조선시대에 양반 남자들이 겉에 입는 옷으로는 도포(道袍)ㆍ창의(氅衣)ㆍ심의(深衣)ㆍ철릭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고종 갑신년에 의복 제도 개혁이 일어나 겉옷으로는 홀가분하고 간편하게 입을 수 있는 두루마기로 통일되었습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두루마기는 남녀노소 구별 없는 가장 대표적인 한복의 겉옷, 그리고 예복으로 자리 잡았지요.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말기 왕비 평상복에 관하여 적어놓은 글에도 ‘주의(周衣)’란 말이 나오고, 양반 부인이나 기생의 사진 등에도 이를 입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의 복식에도 두루마기가 우리나라 전통 겉옷으로 완성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