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그저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강산, 조상들이 지켜 온 강토를 원수 일본인들에게 내맡길 수가 있겠는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평안도 정주에서 오산 학교가 문을 열던 날, 이승훈 선생이 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 학교가 "만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라며 연설을 마쳤다고 하지요. 오늘은 독립운동가며, 교육사업에 몸 바친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 선생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선생은 또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선생은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제가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600여 명의 민족운동가를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에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상상 속의 동물을 형상화한 국보 제61호 ‘청자 비룡모양 주전자’가 있습니다. 머리는 용, 몸통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이러한 동물을 어룡(魚龍)이라 하는데, 이 주전자는 지느러미가 날개처럼 확대되고 꼬리 부분이 치켜세워져 마치 물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모습이 용이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룡’이라고 합니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무렵에 빚은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배지름 13.5㎝, 밑지름 10.3cm입니다. 주둥이는 용의 머리로 이빨과 갈기 등의 가장자리에 백토(白土)를 발랐고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 등이 매우 가늘고 세세한 오목새김(음각) 선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주전자의 몸체에는 비늘이 돋을새김(양각) 되었으며 가운데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 모양의 옆 지느러미가 표현되었지요. 연잎ㆍ지느러미ㆍ아가미 등의 가장자리에는 백토를 발랐고 눈동자는 검게 표시하였습니다. 주둥이 바로 아래에는 뒷지느러미가 위쪽을 향하여 벌어져 있고 용머리와 몸통의 윗부분을 이어서 겹으로 꼬아 손잡이를 만들어 붙였지요. 수구(水口, 물을 담는 구멍) 위에는 물고기의 꼬리 부분을 본뜬 뚜껑이 얹혀 있어서 몸체, 주둥이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큰 어려움에 부닥쳐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아직 이에 대한 백신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백신이 없었던 조선시대 후기만 해도 두창(천연두는 일본에서 유래한 이름)은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여러 가지 돌림병(전염병) 가운데서도 감염률과 치사율이 매우 높았고, 낫더라도 흉한 곰보 자국을 남길 정도였고 그래서 마마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습니다. 1876년 수신사를 수행해 일본에 다녀온 박영선은 일본에서 서양의학의 종두법을 소개한 《종두귀감(種痘龜鑑)》이라는 책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자신의 조카를 비롯한 수많은 어린이가 죽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지석영은 이 《종두귀감》을 읽고 두창 예방을 위한 서양의학의 방법을 배우기 위해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에 찾아갑니다. 가난했던 지석영은 타고 갈 말 한 필을 구할 수 없어서 서울부터 부산까지 20일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곤 해군 군의관에게서 두 달 동안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 접종을 위한 우두의 원료를 구해 가지고 와 종두법을 시행했지요. 그 뒤 지석영은 1880년 제2차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위생국에서 본격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넷째 춘분(春分)입니다. 이날은 해의 중심이 춘분점 위에 왔을 때인데 흔히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춘분 무렵이 되면 봄이 왔다고 하지만, 이때는 음력 2월이라 꽃샘추위가 남아 있는 때로 "2월 바람에 김치독 깨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에서 보듯이 이때 한차례 남은 추위는 동짓달처럼 매섭고 찹니다. 선조들은 춘분을 '나이떡 먹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나이떡은 송편과 비슷한 떡인데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아이들은 크게 빚어서, 어른들은 작게 빚어서 나이 수만큼 먹었지요. 또 머슴들에게 한해 농사를 잘 지어달라고 나이떡을 빚어 먹게 했는데 그래서 '머슴떡'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춘분 무렵엔 '볶음콩'을 먹기도 했는데 볶은 콩을 먹으면 새와 쥐가 사라져 곡식을 축내지 않는다고 믿었지요. 天時忽忽到春分 세월은 문득 흘러 춘분 절기 왔어도 東北都無吉語聞 동북엔 좋은 소식 들려옴이 전혀 없네 山雨溪風渾漫興 산속 비 계곡 바람 부질없는 흥취이니 不如終日醉醺醺 온종일 술에 취해 지냄이 더 낫구나 조선 중기 문신 이정암(李廷馣)의 한시 ‘춘분’입니다. 봄이 왔어도 환한 소식은 없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보면 <초랭이>가 등장합니다. 초랭이는 여기서 양반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인데 초랑이ㆍ초란이ㆍ초라니라고도 합니다. 이 초랭이는 무색 바지저고리에 쾌자((快子, 옛 군복의 일종으로 등 가운데 부분을 길게 째고 소매는 없는 옷)를 입고 머리에는 벙거지를 씁니다. ‘방정맞다 초랭이 걸음’이라는 말처럼 점잖지 못하게 까불거리며 촐랑거리는 역을 하지요. 춤을 출 때도 활달하고 생동감 있게 움직입니다. 초랭이탈은 하회탈 가운데 가장 작은 20×14cm에 불과한데 광대뼈는 입매를 감싸면서 왼편은 위쪽이 툭 불거져 있고 오른편은 아래쪽이 곡선의 볼주름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왼쪽 입매는 화난 듯 보이지만 오른쪽은 웃는 모습이 되어 기가 막힌 불균형입니다. 또 앞으로 툭 불거져 나온 이마, 올챙이 눈에 동그랗게 파여 있는 동공(瞳孔-눈동자), 끝이 뭉툭하게 잘린 주먹코, 일그러진 언챙이 입을 비롯하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온갖 못생긴 것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얼굴이지요. 초랭이는 놀이에서 여인과 놀아나는 중을 비난하고, 양반과 선비를 우스갯거리로 만듭니다. 특히 양반과 선비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무궁화를 조선의 명화라 하지만은 사실로는 진달네(杜鵑花)가 조선의 대표명화와 가튼 감이 잇다. 진달네는 색깔이 아름답고 향취가 조흘뿐 안이라 전조선 어느 곳이던지 업는 곳이 업서서 여러 사람이 가장 넓히 알고 가장 애착심을 가지게 되는 까닭에 조선에 잇서서 꼿이라 하면 누구나 먼저 진달네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의 봄에 만일 진달네가 업다면 달업는 어두운 밤이나 태양 없는 극지(極地)보다도 더 쓸쓸하고 적막하야 그야말로 ‘춘래불이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구나)’을 늣기게 될 것이다." 위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잡지 <별건곤> 제20호(1929년 4월 1일)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머지않아 산에는 진달래로 뒤덮일 것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이 진달래 꽃잎이 휘날리면 보는 이의 맘을 싱숭생숭하게 만듭니다. 이 우리 겨레의 꽃 진달래는 다른 이름으로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도 하는데 이 꽃잎을 청주(淸酒)에 넣어 빚은 술을 두견주라고 부르지요. 진달래술, 곧 두견주는 꽃의 향기뿐만 아니라, 혈액순환개선과 혈압강하, 피로회복, 천식, 여성의 허리냉증 등에 약효가 인정되어 신분의 구별 없이 가장 널리 빚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915년 3월 4일 매일신보는 “난 경성 서대문이올시다.”라는 제목의 조선총독부 기관지답지 않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서대문이라고도 불렸던 돈의문의 철거를 의인화해서 ‘영원히 사라질 서대문’을 안타까워했지요. 기사는 “나는 1421년(세종 3년) 팔도장정 30만 명의 손으로 탄생한 성문 8곳, 곧 8형제 중 둘째 되는 돈의문이다”로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이름 덕분에 몇백 년 먹어도 갓난아이처럼 ‘새문 새문’ 소리를 듣더니…여러분과 인연이 끝나 경매되어 팔린답니다.(가운데 줄임) 조국에 변란이 일어나면 무능한 나도 국가의 간성(干城, 방패와 성)노릇을 해서 성밑에 몰려드는 적군의 탄환과 화살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지엄하게 한성의 서편을 지켰는데 다만 경매 몇푼에….(가운데 줄임) 도끼와 연장이 내 몸을 파괴한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죽죽 돋아난다.”라고 이어집니다. 이로부터 3달여가 지난 6월 10일 마침내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요. 당시 조선총독부는 경성(서울)을 정비한다는 명목 아래 ‘시구개정’이라는 이름으로 도성 안 각종 도로 정비를 추진 중이었는데, 이 사업의 하나로 돈의문이 철거되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판소리 유파에는 크게 서편제, 동편제와 중고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서편제는 영화 ‘서편제’로 많이 알려진 것으로 소리가 애절하고 기교적이고 붙임새도 다양하고 소리의 꼬리도 길어져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편제 소리는 대마디 대장단을 선호하며 잔 기교보다는 소리 자체를 통성으로 꿋꿋하고 튼실하게 내 쇠망치로 내리치듯이 마친다고도 하지요. 그런데 중고제는 그 맥이 별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한겨레음악대사전》에서 중고제(中高制)의 설명을 찾아보면 “동편제(東便制)나 서편제(西便制)가 아닌 그 중간에 해당되는 유파라는 뜻의 중고제는 경기도 남쪽 지방 및 충청도 지방에서 성행(盛行)한 유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고제는 서산지역의 심정순, 심화영 등 심씨 일가에서 전승해왔으며, 후기 5명창 가운데 고종의 총애를 받은 이동백과 김창룡 등이 중고제 명창으로 유명했지요. 판소리의 음악적 구조나 선율상의 특징을 분석하고 연구한 전문가들은 중고제 소리의 특징을 무엇보다도 평탄하게 선율이 진행된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음악적 특징이 독서체여서 억양이 분명하고 노래 곡조가 간결하다는 점, 장단이 변화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 2·8 독립의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 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지 불붙이며 / 잠자는 조선여자 흔들어 깨워 스스로 불태우는 장작이 되게 하신 이여!“ 위는 이윤옥 시인의 <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 한 ‘김마리아’> 시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김마리아(1892.6.18-1944.3.13) 선생이 고문후유증으로 눈을 감은 날입니다. 지난해 6월 18일 서울 정신여고를 방문한 일본 고려박물관 이사 도다 미츠코(戶田光子) 씨는 “김마리아 열사가 생전에 입었던 흰 치마저고리를 직접 보고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특히 저고리 앞섶 길이가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 들었을 때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이 얼마나 심했나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정신여고 김마리아회관 안의 전시실에 전시된 선생의 저고리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까닭은 일제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기에 정상인들이 입는 저고리를 입을 수 없어 특별히 지은 옷이기 때문입니다.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동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돌림병 곧 전염병은 염병이라고 했던 장티푸스와 천연두, 홍역, 호열자(콜레라를 음차하여 부르던 이름) 등이 주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천연두, 곧 두창은 ‘마마’라고 하는 극존칭을 썼을 정도로 무서워하던 병이었고, 감히 두신(痘神)을 모욕할 수 없다고 해서 약을 쓰지 않기도 했습니다. 재미난 것은 호열자가 돌 때는 집 대문에 고양이 그림만 달랑 붙여 놓았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쥐가 물어서 호열자가 생기기 때문에 쥐가 무서워하는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으면 호열자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요즘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은 14일 동안 격리한다고 하는데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활인서에서 취할 수 있는 전염병 대책으로 사람들을 병막이나 피막이라 불리는 임시 건물에 격리 수용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2월 10일 기록에 보면 “양쪽 활인서에서 출막(돌림병에 걸린 사람을 따로 막을 치고 격리시킴)시킨 환자는 모두 696명인데, 죽은 사람이 8명이고, 완전히 나은 사람이 271명이며, 지금 병막에 남아 있는 사람이 413명이라고 합니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중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