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지난 3월 24일 서울옥션에서는 제155회 미술품 경매가 열렸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정약용이 쓴 《행초 다산사경첩(行草 茶山四景帖)》이었습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유배 시절부터 적어온 시와 글들의 모음입니다. 전남 강진에 머물던 1809년에 쓴 〈다산사경(茶山四景)〉과 1818년에 쓴 〈순암호설(淳菴號說)〉, 유배가 끝난 후인 1823년에 쓴 〈여다산제생문답(與茶山諸生問答)〉, 그리고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없으나 유배 초로 추정되는 오언시 등을 담고 있습니다. 행서가 주를 이루며, 일부 다산의 초서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지요. 작품은 보물 제1683-1호로 지정되어, 정약용의 가족사랑을 노을빛 치마에 새긴 보물번호 1683-2호 《하피첩(霞帔帖)》과 함께 다산의 유배시절을 대표하는 서첩으로 손꼽힙니다. 유배의 설움을 딛고 주변의 일상과 자연풍경에 주목하며, 그 세심한 관찰력을 발휘한 작품이지요. 많은 이들에겐 자칫 악몽과도 같을 유배지의 생활이 다산에게는 또 다른 무언가를 연구할 기회였으며, 유배가 풀린 뒤에도 초당 주변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미물에 대한 관심과 물음을 아끼지 않은 다산의 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방가사(內房歌辭)> 곧 <규방가사(閨房歌辭)>는 조선 중기 이후 주로 영남지방의 양반집 여성들에 의해 창작되고 향유된,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여성들의 집단문학입니다. 초기에는 여성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다양한 소재와 정제된 운율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민족적 가치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과 같은 내용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특히 내방가사는 유교문화가 가장 잘 발달된 강력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에 의해 우리 겨레의 언어인 ‘한글’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삶과 애환을 드러낸 독특한 문학형식을 만들어 냈지요. 대구가톨릭대학교 권영철 명예교수는 무려 6천여 편의 내방가사를 수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동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내방가사가 가진 값어치를 여성의 주체적 자기 고백의 역사에서 찾으면서도 이것이 특히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된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억압받는 삶은 전 세계적인 역사였지만, 그것을 문학의 형태로 발전시킨 것은 세계적으로도 내방가사만이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최근 뉴스에서는 “구글이 매년 4월 1일 만우절이면 해왔던 '만우절 장난'(April Fools)을 올해는 건너뛰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심각한 위협에 대응하는 게 우선이란 판단에서다.”라는 내용이 보입니다. 만우절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음 얘기가 그럴듯합니다. “16세기 프랑스에서는 새해를 3월 25일에 시작했는데 해마다 3월 25일이 되면 축제를 열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1564년 샤를 9세가 새해를 4월 1일로 바꿔 버렸다. 하지만 백성들은 오래전부터 해 오던 대로 3월 25일에 설을 쇠고, 대신 4월 1일에는 설을 쇠는 흉내를 냈다. 장난스럽게 새해 잔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발전되어 4월 1일에 만우절 풍습이 생긴 것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일 기사에는 “만우절에 일어난 넌센스 한 토막. 만우절인 1일 아침 7시 45분 대구방송국에서는 ‘희망의 속삭임’ 시간을 통하여 앞으로 3일간에 걸쳐 선착순으로 ‘트란지스타라디오’ 한 대씩 시민에게 선사한다고 거짓말 방송을 했는데 이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동 방송이 끝난 3분 후부터 경북고교생을 비롯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毋將一紅字(무장일홍자) ‘홍(紅)’자 한 글자만을 가지고 泛稱滿眼華(범칭만안화) 널리 눈에 가득 찬 꽃을 판단치 말라 華鬚有多少(화수유다소) 꽃 수염도 많고 적음이 있으니 細心一看過(세심일간과) 세심하게 하나하나 살펴보게나 이는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사람들을 위해 고갯마루의 꽃을 보고 쓴 한시 ‘위인부령화(爲人賦嶺花)’입니다. 박제가는 꽃이라고 하면 ‘붉다’는 생각만 가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꽃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곧 꽃에는 다양한 빛깔의 꽃이 있고, 또한 꽃에서 잘 보지 않는 부분인 꽃 수염은 많은 것도 있고 적은 것도 있다면서 꽃 수염들부터 세심하게 살펴보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물론 세상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곧 사람들의 잘못된 고정 관념을 비판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로 재단하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세태를 박제가는 꼬집고 있습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에 펴낸 조리서에는 《수문사설(䛵聞事說)》, 《시의전서(時議全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중 정조지(鼎俎志), 《군학회등(群學會騰)》, 《음식디미방》, 《음식방문(飮食方文)니라》, 《반찬등속》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540년 무렵에 김유(金綏)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이란 조리서도 있습니다. 책 이름은 중국의 고전 《역경(易經)》에서 따온 말로 ‘구름이 하늘로 올라가니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군자는 먹고 마시고 잔치하고 즐거워한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수운’은 격조 있는 음식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 수운에 걸맞은 갖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의미로 ‘잡방’을 붙인 것입니다. 이 책은 우법(又法) 곧 또 다른 방법이라 하여 하나의 음식이라도 만드는 방법을 두세 가지로 설명하였는데, 이 우법을 포함하면 상하편 전체 121가지 조리법이 등장합니다. 술이 61가지, 식초류 6가지, 푸성귀 절임과 침채류가 15가지, 장류 11가지, 과즐 곧 한과류 5가지, 찬물류 6가지, 탕류 6가지, 두부와 타락(우유) 1가지씩, 주식에 해당하는 면류 2가지, 푸성귀와 과일의 씨뿌리기와 저장법 7종 등이지요. 특히 육수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중간 줄임)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戰)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고서, 배를 돌렸다. 1리를 가기도 전에 왜적들이 과연 배를 타고서 추격해 왔다. 아군은 거북선으로 돌진하여 먼저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쏘아대어 왜적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리니, 나머지 왜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1일 기록으로 임진왜란 중 거북선이 처음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조선기술자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만들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2년 오늘(3월 27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2년 6월 14일에 올린 장계를 보면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고 특별히 거북선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이는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1910년 오늘(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브러우닝 권총으로 처단했습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합니다. 의사는 거사 직전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 하며 남몰래 기뻐하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받았지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어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그저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강산, 조상들이 지켜 온 강토를 원수 일본인들에게 내맡길 수가 있겠는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평안도 정주에서 오산 학교가 문을 열던 날, 이승훈 선생이 했던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 학교가 "만분의 일이라도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라며 연설을 마쳤다고 하지요. 오늘은 독립운동가며, 교육사업에 몸 바친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 선생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선생은 또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으니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선생은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제가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600여 명의 민족운동가를 대거 체포한 ‘105인 사건’에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상상 속의 동물을 형상화한 국보 제61호 ‘청자 비룡모양 주전자’가 있습니다. 머리는 용, 몸통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이러한 동물을 어룡(魚龍)이라 하는데, 이 주전자는 지느러미가 날개처럼 확대되고 꼬리 부분이 치켜세워져 마치 물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모습이 용이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비룡’이라고 합니다.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무렵에 빚은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배지름 13.5㎝, 밑지름 10.3cm입니다. 주둥이는 용의 머리로 이빨과 갈기 등의 가장자리에 백토(白土)를 발랐고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 등이 매우 가늘고 세세한 오목새김(음각) 선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주전자의 몸체에는 비늘이 돋을새김(양각) 되었으며 가운데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 모양의 옆 지느러미가 표현되었지요. 연잎ㆍ지느러미ㆍ아가미 등의 가장자리에는 백토를 발랐고 눈동자는 검게 표시하였습니다. 주둥이 바로 아래에는 뒷지느러미가 위쪽을 향하여 벌어져 있고 용머리와 몸통의 윗부분을 이어서 겹으로 꼬아 손잡이를 만들어 붙였지요. 수구(水口, 물을 담는 구멍) 위에는 물고기의 꼬리 부분을 본뜬 뚜껑이 얹혀 있어서 몸체, 주둥이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큰 어려움에 부닥쳐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아직 이에 대한 백신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백신이 없었던 조선시대 후기만 해도 두창(천연두는 일본에서 유래한 이름)은 조선시대에 만연했던 여러 가지 돌림병(전염병) 가운데서도 감염률과 치사율이 매우 높았고, 낫더라도 흉한 곰보 자국을 남길 정도였고 그래서 마마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습니다. 1876년 수신사를 수행해 일본에 다녀온 박영선은 일본에서 서양의학의 종두법을 소개한 《종두귀감(種痘龜鑑)》이라는 책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자신의 조카를 비롯한 수많은 어린이가 죽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지석영은 이 《종두귀감》을 읽고 두창 예방을 위한 서양의학의 방법을 배우기 위해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에 찾아갑니다. 가난했던 지석영은 타고 갈 말 한 필을 구할 수 없어서 서울부터 부산까지 20일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곤 해군 군의관에게서 두 달 동안 종두법을 배우고, 종두 접종을 위한 우두의 원료를 구해 가지고 와 종두법을 시행했지요. 그 뒤 지석영은 1880년 제2차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위생국에서 본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