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서울 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정원에는 국보 제100호 “개성 남계원(南溪院)터 칠층석탑”이있습니다. 이 탑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으로 바로 잡았지요.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뺀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는데 이후 원래의 자리를 조사한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웠습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본보기를 따르고 있는 듯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좀 다릅니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견주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졌습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지요.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과 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민사령 개정에 의한 조선 사람의 씨 제도는 드디어 명 11일 빛나는 황기 2,600년의 기원가절을 기약하고 시행을 보게 되었다. 조선 민중의 열렬한 요망에 맞추어 원대한 이상으로써 제정된 이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서 총독부에서는 법무국을 중심으로 하여 각지 약 60개 소에서 협의회를 열고 호적 사무에 관한 부군읍면의 끝까지 취지가 철저하게 인식되었으므로 일반 민중의 씨 창설 계출에 대한 준비는 조금도 유감스러운 점이 없이 준비되어 있다.” 이는 조선일보 1940년 2월 11일 치 기사로 이날부터 “창씨개명”을 시작한다는 얘기입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 들어 강력한 민족말살정책과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 핵심 정책 가운데 하나가 1939년 12월 공포된 ‘창씨개명령’입니다. 조선의 성 대신 일본식 씨를 만들고 이름을 다시 짓도록 강요하는 법령이었지요.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이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 곧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 하여 각종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자녀 학교 입학 불허, 관리 채용 차별은 물론 식량 배급에서 제외하는가 하면 심지어 우편물도 배달하지 않았지요. 이 때문에 주어진 기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예전 한자로 쓴 현판들을 보면 모두 글씨가 오른쪽부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한자의 경우오른쪽부터 쓰기 때문이지요. 그런 예로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 현판도 역시 오른쪽부터 썼습니다. 그런데 한양 성곽 4대문의 하나인 숙정문과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은 왼쪽부터 썼습니다. 한양 성곽나들이를 하면서 꼼꼼히 살펴본 이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1396년 완공된 숙정문이나 혜화문의 현판은 당연히 오른쪽부터 썼을 겁니다. 원래 문화재 복원은 원형대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숙정문은 1976년, 혜화문은 1992년 복원하면서 현판도 새로 만들어 달았는데 그때 복원의 주체들과 현판을 만들었던 장인들이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춰 왼쪽부터 쓰기로 했다고 전합니다. 한편, 광화문 현판은 상징성을 고려해서 한글로 달자며 한글단체가 강력히 주장했는데도, 문화재청은 굳이 원형대로를 고집하며 한자로 써 달았습니다. 지난 1월 13일부터 14일까지 한글문화연대의 의뢰를 받아 리얼미터가 전국 19살 이상 1,0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0.6%가 ‘한국을 대표하는 곳이니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라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우리 겨레 또 하나의 명절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대보름엔 초저녁 뒷동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하는데, 떠오르는 달의 모양, 크기,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한해 농사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또 대보름날 밤 달집태우기도 하는데,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 위에 쌓아 놓은 다음 소원을 쓴 종이를 매달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릅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맞이를 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하지요.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 가운데 ‘월견상극(月犬相剋)’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달과 개는 상극이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정월 대보름날에 개에게 온종일 밥을 주지 않거나 혹은 저녁밥 한 끼만 주지 않습니다. 개에게 밥을 먹이면 달의 정기를 먹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여자의 본질인 음력의 에너지원은 달이어서 개에게 밥을 주는 여자는 개에게 자기의 음력을 도둑질시키는 것으로 본 때문입니다. 월식도 옛사람들은 개가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또 다른 대보름 풍속으로 “개보름쇠기”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1749~1807]이 펴낸 《경도잡지(京都雜志)》에, “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정월대보름 풍속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가 있는데, 지신밟기는 설날부터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이 돌며 흥겹게 놀아주고, 복을 빌어 줍니다. 곳에 따라서 마당밟기,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밟는 매귀(埋鬼), 동네에서 쓸 공동경비를 여러 사람이 다니면서 풍물을 치고 재주를 부리며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걸립(乞粒)이라고도 합니다. 또 정월대보름 풍속으로 ‘볏가릿대 세우기’, ‘복토 훔치기’, ‘용알 뜨기’ 따위도 있습니다. 먼저 볏가릿대 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 기장, 피, 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입니다. 또 복토 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 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하는 것이고, 용알 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과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지요. 그밖에 대보름날은 점치는 풍속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고,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담아 지붕 위에 올려놓은 다음, 이튿날 아침 씨앗들이 남아 있으면 풍년이 되고, 날아갔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는 8일 토요일은 우리 겨레의 명절 정월대보름입니다. 이날 하늘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지요. 조선 후기 문신 홍석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풍속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 곧 달마중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에게 행운이 온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뒷동산에 올라 떠오르는 보름달을 맞이하는 것이 정월대보름에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럼 깬다' 하여 밤, 호두, 땅콩, 잣, 은행 등 견과류를 깨물며 한해 열두 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빕니다. 또 부럼을 깨물 때 나는 소리에 잡귀가 달아나고 이빨에 자극을 주어 건강해진다고 생각했지요.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는데 이때 상대방이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하는데, 이름을 불린 사람이 그걸 알면 “먼저 더위!”를 외칩니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재미난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성이 다른 사람 집의 밥을 먹어야 그해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겨울 속에서 봄을 보려면 신도 경건하게 무릎 꿇어야 하리라 내 사는 은현리서 제일 먼저 피는 꽃 대한과 입춘 사이 봄까치꽃 피어 가난한 시인은 무릎 꿇고 꽃을 영접한다 오늘은 24절기가 시작되고 봄을 맞이하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 무렵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으로는 봄이 온 것을 기리어 축원하는 입춘축(立春祝)을 집 대문이나 대들보ㆍ천장 따위에 붙이는 것입니다. 입춘축을 다른 말로는 춘축(春祝), 입춘첩(立春帖), 입춘방(立春榜), 춘련(春聯), 문대(門對), 춘첩자(春帖子), 춘방(春榜), 대련(對聯), 춘첩(春帖)이라고도 하지요. 입춘축 가운데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으로 “입춘이 되니 크게 길 할 것이요, 만 가지 일들이 형통하라.”라는 뜻이 담겨 있지요. 그밖에 쓰는 말로는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로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부자가 되어라.“, ”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 곧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온다.”라는 것도 있는데 온갖 좋은 말은 다 가져다 붙여놓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천문ㆍ지리ㆍ날씨를 맡아 보던 관청인 관상감(觀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내일은 24절기를 시작하는 입춘(立春)으로 동양철학인 명리학으로는 새해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지가 되면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에 홍매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9송이씩 9줄 모두 81송이를 다 그리고 나면 입춘이 오고 봄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아홉 번째 아홉 날이 지나면 농사짓는 소가 밭을 갈기 시작한다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세상이 꽁꽁 얼었어도 홍매화를 그리며, 희망을 품고 살다 보면 드디어 훈훈한 봄바람이 세상을 감싸는 봄이 오는 것이지요.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 하였는가” 상여 나갈 때 상여머리에서 부르던 상엿소리입니다. 우리 겨레는 봄이 시작되는 입춘날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을 했는지에 대해 죽은 뒤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한 해 동안 액(厄)을 면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거나, 거친 길을 곱게 다듬거나, 다리 밑 거지 움막 앞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85년 전 오늘(1월 3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선생이 심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선생은 젊었을 때 아버지의 주선으로 함남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통인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지요. 사건 직후 선생은 서울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는데, 선생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뒤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후 선생은 지도자로서 여러 구국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구속되거나 유배되기도 했는데 유배에서 해제된 직후 북간도로 탈출합니다. 이후 북간도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던 선생은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모으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는데 그 때문에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고인께서는 고지도 원본 위의 한자를 일필(一筆)로 똑같이 써 내려가기 위해 글씨 연습에 날마다 아침 2시간씩 3년을 투자하셨습니다. 고인께서 영인본으로 접한 고지도의 양은 1,000점을 넘었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생을 마감한 2007년 7월 31일까지 필사한 고지도는 100점이 되지 못합니다.” 이는 생의 마지막까지 고지도 필사를 하던 최현길(1952~2007) 선생의 배우자인 전소연 여사의 말입니다. 전소연 여사는 2018년 4월 남편인 고 최현길 선생이 필사한 고지도 35종 65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맡긴 바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전도인 『동여도』는 그 길이가 남북 7m에 이르는 초대형 (23첩) 작품입니다. 최현길 선생은 40대 중반까지 광고계에 몸을 담고 있다가 지병으로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2000년대 초 규장각에서 영인해서 펴낸 고지도의 아름다움에 큰 감명을 받고 본격적인 필사에 전념했습니다. 특히, 선생은 ‘전라도흥양현발포진지도’와 같이 국토를 아름답게 그려낸 회화의 관점에서 고지도를 골라 필사 작업에 매달렸지요. 최현길 선생이 기증한 고지도 필사본은 ‘아름다운 필사, 최현길 고지도 기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