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88년 정월 대보름에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소리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무사에게 뒤쫓게 하였다. 무사가 까마귀를 쫓아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자 까마귀는 사라지고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올렸다. 그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임금을 뜻한다고 하며 임금에게 봉투를 열어볼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거문고갑[琴匣]을 쏘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주(宮主)와 승려가 정을 통하다 나왔다.” 이는 《삼국유사》의 ‘사금갑(射琴匣)’ 설화로 이처럼 옛사람들은 쥐가 예지력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올해는 경자년(庚子年), 쥐의 해입니다. 쥐는 십이지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동물로 방위의 신이자 시간의 신이지요. 쥐는 예로부터 풍요ㆍ다산ㆍ근면ㆍ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쥐띠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물복과 영특함, 부지런함을 타고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의인화해 관직을 붙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오늘이 바로 섣달 그믐날 저녁이니, 자연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는 바야흐로 추위를 참느라 신음을 토하면서 혼자 앉아 매우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는데, 홀연히 인편을 통해 형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되니, 두 눈이 갑자기 확 뜨이면서 너무나 반가웠습니다.(가운데 줄임) 보내 주신 시고(詩稿)를 읽으면서 품평을 하려면 인편이 돌아가는 것이 다소 지체될 듯하기에, 우선 이를 보류해 두었습니다. 저의 기량을 다하여 악필(惡筆)로 끼적거린 뒤에, 송구영신하는 정초(正初)가 되었을 때, 신년에 만나 악수하는 기쁨과 맞먹는 즐거움을 드리고자 하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매천집(梅泉集)》 에 나오는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의 글입니다. 매천이 말한 섣달그믐은 음력이었을 테지만 양력 섣달그믐날인 오늘에도 매천의 이 글이 더욱 뜻깊게 생각됩니다. 《매천집》은 《매천야록(梅泉野錄)》과 함께 황현이 남긴 글로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서라면 《매천집》은 시문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천의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도 여기에 실려있지요.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유배형(流配刑)의 하나로 보통 왕족이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에게만 적용하였다. 집 둘레에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것인데, 죄가 무거운 자에게 적용하였다. 탱자나무는 전라도에 많으므로 위리안치를 선고받은 사람은 주로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보냈다.” 이는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6월 1일치에 나오는 탱자나무 관련 기사입니다. 탱자나무는 5월에 하얀 꽃이 피고, 9~10월에 노랗게 열매가 열리는데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예부터 성벽주위나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던 나무입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팎으로는 쥐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가시가 날카로워 도둑 또한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던 나무지요. 탱자나무는 울타리뿐 아니라 껍질과 열매를 약재로 쓰는 등 예부터 우리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무입니다. 탱자나무 가운데 오래된 나무가 있는데 바로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가 그 나무입니다. 문화재청에서는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558호로 승격했습니다.(2019.12.2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에 단군은 자기네 대화족(大和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 소잔명존)의 아우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두 인물의 생존연대만 보더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니 최수봉이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이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 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했고, 그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는 최수봉 지사와 함께 밀양공보를 같이 다녔던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선생이 뒷날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 책에서 증언한 말입니다. 지사는 99년 전인 1920년 오늘(12월 27일) 아침 경남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날은 월요일이어서 경찰서장 와다나베가 훈시하고 있었는데 두 번의 투탄에도 폭탄의 불발과 폭발의 위력이 약하여 타박상을 입은 순사부장 외에는 다치거나 죽은 자도 없었습니다. 이후 지사는 실패한 것을 알고 식도로 자기 목을 찔러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못한 채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해인 1921년 7월 8일 사형당해 순국했습니다. 하지만 최수봉 지사의 의거는 박재혁 의거가 세상을 놀라게 한 지 석 달 만에 식민통치의 맨 앞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표준국어대사전》은 ‘겨레’를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민족”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국어사전이 ‘겨레’를 한자말 ‘민족’으로 바꾸어놓으니까 사람들이 우리말 ‘겨레’는 버리고 남의 말 ‘민족’만 쓰면서, 남녘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 하고 북녘 조선에서는 ‘조선민족’이라 합니다. 같은 겨레이면서 저마다 다른 반쪽을 도려내 버리고 남은 반쪽인 저만을 끌어안는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남이나 북이나 틈만 있으면 “통일, 통일” 하는 소리를 반세기 넘도록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배달겨레’라는 말이 요즘은 거의 꼬리를 감춘 듯하지만, 일제 침략 시절까지만 해도 자주 쓰던 낱말이다. 그러나 광복 뒤로 남북이 갈라진 다음, 친일 세력이 남쪽 한국을 다스리면서 제 나라만 챙기고[국수주의] 제 겨레만 내세우는 [민족주의] 낱말이라고 몰아붙여서 너도나도 쓰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온 세상 모든 사람과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왔으니 이런 낱말 곧 ‘겨레’도 새삼 쓸모가 생겨난 듯하다. 온 세상 사람들과 손잡고 더불어 살아가자면 먼저 갈라진 제 겨레부터 하나로 싸안는 것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48년 전인 1971년 오늘(12월 25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던 대연각호텔에서 큰불이 일어났습니다. 화재진압을 위해 거의 모든 소방차가 출동했고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되었는가 하면 주한미군의 소방차와 헬리콥터까지 투입되었지만, 불로 죽은 사람만 163명이었고 다친 사람은 63명이나 되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사건이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 화재로 기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4년 11월 3일에도 서울 청량리 대왕코너에서 불이 나 88명이 숨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때도 한성에 큰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31권, 8년(1426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한성부에 큰불이 나 행랑 1백 6간과 중부 인가 1천 6백 30호와 남부 3백 50호와 동부 1백 90호가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 죽었는데,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당시에는 한성의 집들이 목조건물이거나 초가였고, 심지어 집집이 처마가 붙어 있을 정도여서 그 피해가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세종은 소방서격인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선종(善宗)이 미륵불(彌勒佛)을 자칭하며 머리에 금색 모자를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막내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했다. 바깥나들이 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타고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를 장식하고, 동남동녀(童男童女)로 일산과 향화(香花)를 받들게 해 앞에서 인도했으며, 승려 200여 명으로 범패(梵唄)를 부르면서 뒤를 따르게 했다." 이는 《삼국사기》 권 50, 궁예 편에 나오는 기록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후고구려(뒤에 태봉)를 세운 궁예는 늘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했다고 하지요.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시기를 간절히 비는 뜻을 담았습니다. 이 미륵신앙은 시골길을 걷다가 문득 풀숲 사이로 나타나는 미륵상이나 절에 모셔진 미륵보살상으로 나타나는데 근세 우리나라에서 생긴 증산교, 용화교 등도 미륵신앙이지요. 어느 시대건 지배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억압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구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억압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후기 실학자며, 과학자였던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어린 시절 묻습니다. "성리학에 나와는 있지만 농사짓는 법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어른은 대답합니다. "그런 것은 잡학으로, 농부들이나 경험하여 아는 것이다." 그러자 홍대용은 다시 묻습니다. "잡학은 버려야 하나요? 잡학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이렇게 홍대용은 어려서부터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 가운데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중국과 조선 또는 서양까지를 상대화하여 어느 한쪽이 세계 문명의 중심(화-華 )이고, 어느 쪽이 오랑캐(이-夷)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중국 중심적인 ‘화이론(華夷論)’을 부정해 자주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도 더 우월할 수가 없다는 주장을 펼쳐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똑같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고, 교육의 기회는 균등히 하여야 함은 물론, 재능과 학식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해 당시 지식인 가운데서 가장 진보적인 주장을 한 사람입니다. 홍대용은 서양 과학이 정밀한 수학과 정교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가면 사적 제317호 “충주 미륵대원(彌勒大院)터”가 있습니다. 해발 378m의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미륵대원터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지요. 석굴 가운데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옆과 뒤 석벽의 가운데는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며, 석굴 윗부분은 목조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인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요.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