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박은, 설순, 신석조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은 많겠지만 그간 다루어 온 주요 인물 이외 몇몇 신료들을 요약ㆍ정리해 본다. 박은(朴訔 공민왕 19년 1370~ 세종 4년 1422)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난 지 여섯 살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랐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 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각하가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지 아니하니, 내 어이 보통 사람과 같이 보답하리오. 이미 각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각하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나라와 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을 각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요, 노둔한 자질을 밝을 때 다 바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4/5/9) · 용서하는 넒은 마음의 소유자 태조 6년(1397)에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만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연구 작업 도와 성삼문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크게 도왔다. 창제 시에도 도왔지만 세종 25년 청제 이후 언어학적인 구성체계를 확인하기 중국의 학자와 만나 음운 법칙을 검증하게 했다. 세종 27년(1445) :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등에게 요동에 가서 운서를 질문해 오게 하다)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와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成三問)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 (세종실록 27/ 1/ 7) 이런 작업은 그 활용에서도 오류가 없게 하려고 세종 28년 반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세종 32년, 1450년 성삼문ㆍ신숙주ㆍ손수산 등에게 명하여 운서를 사신에게 묻게 하다) 직 집현전 성삼문(成三問)ㆍ응교 신숙주ㆍ봉례랑 손수산(孫壽山)에게 명하여 운서(韻書)를 사신에게 묻게 하였는데, 삼문 등이 관반(館伴)을 따라 뵈니, 정인지가 말하기를, "소방(小邦)이 멀리 나라 밖에 있어서 바른 음(音)을 바로 잡으려 해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의 음(音)은 처음에 쌍기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그 역시 중국 복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성삼문을 살펴보자. 성삼문(成三問, 1418 ~ 1456) :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충신 - ①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되어 있다. 유교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 6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조 1년(1455)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묘역에 있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
김점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은 많겠지만 지금까지 다루어 온 사람 이외 몇몇 인물들을 요약해 정리해 보자. 많은 경우 그 사람의 공덕은 졸기(卒記)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당대의 평가라 숨은 공적과 평가는 시대가 달라지면 달라지는 경우도 생기게 될 수 있다. 김점(金漸, 공민왕 18년 1369~ 세조 3년 1457) 조선 세종 때의 중신(重臣)으로 태종의 후궁 숙공궁주 김씨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공민왕 때의 문신 김린(金潾)이다. 김점은 이성계가 고려 구벌 인재를 가려 뽑을 때 장군으로 천거되어 중용된 뒤 4대에 걸쳐 관로(官路)에 진출했다. 태종 말년 명나라에 성절사(청나라의 황제ㆍ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로 북경에 다녀왔다. 그는 명나라가 남경(南京)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 첫 사신이다. 귀국 뒤 주로 명나라 사신을 모시는 외교 관련 업무를 자주 맡아 처리했다. 그는 좌참찬(左參贊)으로 있으면서 세종에게 모든 정사를 친히 처리할 것을 조언하기도 하였으나 허조(許調)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세종 즉위 초에 호조판서, 형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은 많겠지만 지금까지 다루어 온 사람 이외 몇몇 인물들을 요약해 정리해 보자. 곽존중(郭存中, ? ~ 세종 10년 1428) 조선 전기 태종, 세종 때의 문신. 세종 대마도 정벌 때 유정현의 종사관으로 참가하였다. 하등극사(조선 시대, 새로운 임금의 등극을 중국에 알리러 가던 사신)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판, 중군동지총제, 경창부윤,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396년(태조 5) 식년(式年, 과거를 보이는 시기를 지정한 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05년(태종 5) 경기도 수령관(首領官)으로 적성(積城: 지금의 파주)지방을 살폈다. 그 뒤 장령이 되고, 1416년 처음 설치된 단자직조색(段子織造色, 중국에서 나는 견직물(絹織物)을 짜기 위하여 설치한 특수 관아)의 별감(別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사인(舍人, 문하부에 속한 벼슬)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 대마도 정벌 때 영의정으로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된 유정현(柳廷顯)의 종사관이 되어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병조(兵曹)의 벼슬아치가 되었다. 1421년 동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대왕 아래에는 유독 고집 센 신하가 있었다. 고약해(高若海, 1377년~1443년)는 세종 때 형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지닌 문관이다. 고약해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 문신이었다. 문제는 그 고집을 내세운 주장이 그 시대를 개혁해 가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인데 그 판단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쉽게 내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변혁이라도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백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워 정책으로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연재에 이어 고약해의 주장 보자. 라) 양녕 벌주기 (고약해 등이 양녕의 죄를 청하다) 병조 참의 고약해가 성난 목소리로 저지하고 나아가서 아뢰기를, "근일에 정부ㆍ육조ㆍ대간(臺諫)이 연달아 장소(章疏)를 올려 양녕의 죄를 청하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힘써 따르시어 임금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부도(不道)한 일을 마음대로 행한 죄를 징계하소서." 하였다. 사간 김효정(金孝貞)ㆍ집의 김종서(金宗瑞) 등이 또 계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종께서 말씀한바 나라에 맡긴다고 한 것은 특별히 큰일에 대한 것이지 이와 같은 작은 일을 이른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에 범한 죄만은 논할 것이지 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고약해(高若海, 1377년, 우왕3 ~1443년, 세종 25)는 세종 때 형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지닌 문관이다. 세종대왕 아래에는 유독 고집 센 신하가 있었다. 바로 고약해로 한자는 ‘같을 약(若)‘, ‘바다 해(海)’ 자로 ‘바다 같은 인물’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는 형조참판으로서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모두 4명의 임금을 섬겼다. 도 관찰사, 사헌부, 인수부 등 중직 등을 두루 거친 명재상이다. 그는 세종에게 사사건건 직언하는 신하였다. 오죽하면 그의 이름을 빗대 “이런 고약해 같으니”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고약해 같다’라는 말은 비위나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고약하다’라는 말로 발전했다고 한다. 흔히들 세상에서 ‘고약하다’라는 말을 쓰는데 국어사전의 뜻은 가) 괴악(怪惡)하다의 의미고 나) 정태륜의 ‘한국인의 상말 전서’(고요아침 2016)에 나오는 《세종실록》에 고약해라는 인물에서 비롯했다는 설인데 국립국어원에서도 이 질문에 확인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설이라 하겠다. 세종은 고약해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다른 신하들이 직언하지 못할까 봐 고약해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우여곡절의 일생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펴보고 있다. 마음 착한 한 선비의 인간성이 일생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세종의 스승 이수(李隨, 1374년 공민왕 23~ 1430 세종 12)를 통해서이다. 한 선비 삶의 우여곡절이 녹아 있어서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세종의 스승이다 보니 자연스레 부왕인 태종대부터 시작된다. 인품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대사성 유백순이 시독관으로 생원 이수를 천거하다.) 성균관 대사성 유백순(柳伯淳)을 불러 시학(侍學, 임금이나 왕세자에게 가르치고 문답하는 일) 할 만한 사람을 물었다. 임금이, "경이 오래 성균(成均)에 있었으니, 선비들의 우열을 알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유백순이 생원 이수(李隨)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답고 학문이 정숙(精熟)하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내가 시험하여 보겠다." 하였다. (《태종실록》 7/7/28) 그의 본성은 스승으로 모범이 될 만했다. 이에 임금 태종은 생원(生員) 이수(李隨)에게 옷 1벌[襲]을 내려 주었다. (《태종실록》 12/8/12) 관리로서 일하는 도중 실수도 저질러 “겸 상서소윤(尙瑞小尹) 변처후(邊處厚)와 주부(注簿)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심은(深隱) 이수(李隨, 1374년-공민왕 23~1430년-세종 12)는 세종이 어릴 적부터 곁에서 학문을 가르친 문신이다. 태종대에 공조정랑, 예조정랑을 거쳐 세종 때에 이르러 예문관제학을 거쳐 참찬의정부사,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생애 : 활동사항 · 태조 5년(1396) : 생원시에 1위로 합격하였으며, · 태조 10년 : 임금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른 사람을 구할 때, 대사성 유백순(柳伯淳)의 천거로 뽑혔으나 사퇴하였다. · 태종 11년: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임금의 명을 전하자 상경하여 여러 왕자의 교육을 맡아보았다. · 태종 12년 : 종묘서(宗廟署) 주부(主簿)를 지내고, · 태종 14년: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하여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 시험을 칠 때, 4위로 급제, 전사주부(典祀 主簿)ㆍ공조정랑ㆍ·예조정랑을 지내고, · 태종 17년: 전사소윤(典祀少尹, 제사를 담당하던 전사시의 종4품 벼슬)을 지냈다.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사재감정(司宰監 正, 사재감에 두었던 정삼품 관직)ㆍ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삼군도총제부 벼슬)을 지냈다. · 세종 4년(1422) :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고부부사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 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한글날이 들어있는 10월에 훈민정음 창제의 반대를 외친 최만리를 이어 조명해 본다. 결코 인간 최만리가 아닌 역사 속 최만리의 의식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을 창제했음을 알린다. 창제 몇 달 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6가지 항의 상소를 한다.(지난 3항에 이어 나머지 항을 보자.) 1. (넷째) 만일에 말하기를, ‘사형 집행 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文理)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가령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직접 구두 진술을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복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이것과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가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