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그 카페는 평범한 술집이었다. 물수건이 나오고, 맥주가 나오고, 안주가 나오고, 웨이터 총각이 아가씨를 둘 데리고 들어오고. 이 자리를 빌려 토로하건대, 나는 술 따르는 아가씨들에게 불만이 많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나름대로 뚜렷한 직업의식을 가졌으며 엄격한 교육 과정을 거쳐 배출되는 떳떳한 직업인이었다. 기생은 대개 천민 출신이었는데, 정2품 이상의 관리에게 사랑을 받으면 신분이 상승하기도 했다. 기생의 딸은 자동적으로 기생이 되는 식으로 세습되었는데, 유명한 황진이는 그 어머니가 기생이었기 때문에 기생이 되고 만 것이다. 특히 관기(官妓)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생으로서 말하자면 공무원 신분이었는데, 관기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3년마다 전국의 관기 가운데에서 150명을 뽑아 시(詩), 화(畵),가(歌), 무(舞), 악(樂)의 다섯 가지 기예를 매우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기생은 재생(才生)’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온갖 재주는 오늘날의 전통예술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에까지 대거 참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기생들이 꼭 갖추어야 할 마지막 덕목은 지조였다. 이 덕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 일행은 이제 4명이 되었다. 우리는 정 교수의 모교이자 광주의 명문고이며 광주 학생 운동의 본거지인 광주일고를 잠깐 구경했다. 광주 학생 운동 기념탑이 한쪽에 있었다. 광주일고는 원래 변두리에 있었는데, 이제는 시내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근처의 한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호남 지방을 여행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한정식을 주문하면 정갈하고 맛있는 반찬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따라 나온다는 사실을. 왜 이렇게 반찬이 많이 나오는가를 연구한 사람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이 지방에는 첫째, 손님을 환대하는 전통이 강하였고, 둘째, 은연중에 음식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악덕으로 여기는 상도덕이 자리 잡고 있었고, 셋째 물림상 습속이 발달하여 어른이 먹고 나면 사내 식구가 그 밥상을 물려 먹고, 다시 아녀자에게, 다시 종에게 상을 물려 먹다 보니 반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풍습이 쓰레기 종량제 이후 비판을 받아 요식업자들은 음식 쓰레기를 줄이자는 차원에서 반찬 줄이기 운동을 벌였단다. 그래서 나온 안이 24가지 반찬은 너무 많으니 18가지로 줄이자는 운동이라고 하니 그저 기가 막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우리는 좌석을 찾아 앉았다. 자동차가 급속히 늘어나 고속도로가 막혀서 저속도로로 변한 뒤로는 기차 여행이 빠르고 편하다. 광주까지 가려면 승용차로 한 다섯 시간 걸릴 텐데, 무궁화호로는 3시간 45분이 걸리니 훨씬 빠르다. 또한 운전을 안 하니 피로하지도 않다. 단지 불편한 점은 기차표를 미리 예매해야 한다는 거고, 또 기차역까지 오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전체 시간은 오히려 더 들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매우 기분이 좋았으며, 특히 이번 여행에서 불교에 관해서 궁금했던 의문점들을 많이 알아보리라고 마음먹었다. 나와 동행하는 연담 거사는 내가 만난 불교인 가운데서 가장 불교 이론에 밝았으며 또한 불교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연담이라는 법명은 광덕 큰스님이 주신 이름이며, 거사(居士)라는 칭호는 재가불자로서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거사와 비슷한 말에 처사(處士)라는 말이 있는데, 처사는 약간 낮추어 부르는 호칭이다. 거사들 가운데도 수행을 많이 한 법사(法師)가 있는데, 법사는 법당에서 신도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기차는 녹음이 우거진 산야를…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기차표를 예매한 우리는 작은 손가방 하나씩을 들고 즐거운 기분으로 열차에 탔다. 사실 이렇게 두 남자가 금산정사 방문 여행을 실현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두 남자야 의기가 투합했지만, 문제는 사모님의 내부 결재. 연담 거사는 불교 신자로서 법사 자격증까지 있으니 별문제가 없었다. 나는 당시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십일조까지 내는 기독교 신자였다. 나는 화성군 봉담면에 살지만, 일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교회에 나간다. 그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3일이나 집을 떠나 전라남도 섬에 있는 스님을 만나러 간다? 아무래도 명분이 없었다. 마침 대학교는 방학 중이었기 때문에 지방 학회에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명분을 찾았으나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궁리 끝에 결국은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우선 며칠 동안 유별나게 아내를 기쁘게 해주었다. 독자 중에는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 꼭 밤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안 하던 방청소도 깨끗이 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놈 숙제하는 것도 보아주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집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젊은 시절에 나는 방황하는 구도자였다. 기독교의 ‘예수원 방문기’에 이어서 또 다른 구도 여행인 불교의 ‘금산정사 방문기’를 연재한다. 광복절 전날인 1997년 8월 14일 낮 1시 30분, 나는 불교계 친구인 연담 거사와 함께 수원역에서 광주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두 남자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2박 3일 동안 전남 고흥군 건너 남해에 있는 섬, 거금도로 현정(玄靜)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랫동안 그려 오던 여행이었다. 내가 현정 스님을 최근에 만난 것이 1989년이었으니까 무려 8년이나 기다렸던 여행이었다. 8년 만의 외출. 무슨 소설 제목 같기도 하고, 나는 괜히 가슴이 설레었다. 내가 현정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순전히 인연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인 1987년 어느 날, 나는 이전 직장인 국토개발연구원에서 광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끄럽고 닭장 같은 아파트가 가득한 대도시가 싫었다. 모처럼 서울을 떠나 출장을 가는 김에 하룻밤을 광주 근처의 산사에서 보내고 싶었다. 나는 직장의 불교 모임인 국불회(國佛會)의 회장 연담 거사에게…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아침식사 때에 보니 인원이 많이 줄었다. 주말에는 방문객을 받지 않고 이미 들어와 있는 방문객도 특별히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낮 12시까지는 떠나야 한다. 아침 식사 뒤에 나는 오거스틴에게 물어서 공동체 식구 중에서 학부형을 소개받았다. 내가 만난 사람은 이솔로몬이라는 사람으로서 매우 착해 보였으며 얼굴에서 평화로움이 배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생과 초등학생, 이렇게 두 아들이 있었다. 중학생 아들은 지금 황지중학교를 다니는데, 고등학교는 간디고등학교로 보낼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큰아들은 예수원 입구의 큰길 가에 있는 하사미 분교를 졸업하였고 작은아들은 아직 다니고 있다고 한다. 대천덕 신부님의 두 딸도 하사미 분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두 딸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는데, 한국말과 영어를 완벽하게 한다고 전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아들 진학 때문에 고민이라고 말하니, 그분은 대뜸 “기도해 보시오. 어떤 필요가 생기거든 1차적으로 기도해 보시오.”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해 준다. 기도해 보면 길이 보인다는 이야기인데,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인지 그 말을 듣고도 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단순 소박한 삶. 이러한 삶이 내가 환경을 공부하면서 결론 내린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하나뿐인 지구에서 70억 인류가 다 같이 행복하기 위해서 따라야 할 삶의 모습이다. 종교적으로도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한경직 목사님과 법정 스님이 보여 주었듯이 단순 소박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의 간디 역시 단순 소박한 삶을 보여 주었다. 근래에 한비야라는 야무진 한국 여성이 세계의 두메를 여행하면서 쓴 4권의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 한비야가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에 내린 결론도 ‘단순한 생활이 행복하다’라는 것이어서 내심으로 흐뭇한 적이 있다. 정오가 되어 종이 울려서 삼종(三鐘)시간을 알렸다. 삼종이란 천주교 용어인데, 하루 세 번 종을 치면 종소리를 듣고서 교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기도문을 외우며 기도를 한다. 그런데 예수원에서는 기도문을 외는 대신 침묵으로 삼종 기도를 한다. 이것은 매우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아마도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자리를 깔고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제도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의 이러한 전통은…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밤 9시 30분이 넘자 기도와 간증 순서가 되었다. 제일 먼저 공동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태백산 정상에 있는 단군성전을 방문한 이야기를 하였다. 발표자는 여성이었는데 단군 성전을 무슨 사교(邪敎)의 거점처럼 여기는 것 같아서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다음은 예수원에서 한 달 장기 체류를 허가받은 한 신학생이 자기의 신학적인 고민을 이야기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겪었던 고민을 회상시키는 간증이었다. 다음은 몽골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잠시 귀국한 젊은 선교사가 간증을 하였다. 낯선 선교지에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재미있게 소개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돈 1만 원이면 몽골에서는 한 달 생활비가 된다고 한다. 결론으로 그는 불쌍하고 가난한 몽골인을 돕고, 선교를 열심히 하자고 호소하였다. 몽골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으나, 그러니까 불쌍하고 불행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가난은 경제적인 척도이지만 행복이란 물질적인 척도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만족도라고 볼 수 있다. 1인당 국민 소득이라는 척도로 재는 가난을 국가 사이에 견줄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중국인 한 달 봉급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대천덕 신부님의 부인(제인 그레이 토리, 한국이름: 현재인)은 그림을 공부했는데 학창 시절 대학의 메이퀸이었다고 한다. 제인은 1940년 여름 미국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청소년 모임에서 아쳐를 처음 만났는데, 제인의 기억에 아쳐는 매우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쳐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그가 종종 보내온 편지에는 ‘제인과 함께 티베트로 건너가 천막촌 생활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 있었다. 제인은 “아쳐가 나의 반려자일까 고민했었는데, 하나님이 어느 날 정말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화가로서의 꿈도 있었지만 아쳐와 함께 하는 삶이 더 소중하고 아름다울 것 같아서 아쳐와 결혼했다”라고 말했다. 그들 부부는 혼인하고 한 번도 싸우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하는데, 예수원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면서도 서로 바빠서 오후 4시 반 차담 시간에나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고 한다. 숙소인 석송관에 도착하여 이층 침실로 올라가 보니 군대 내무반식으로 마루를 깔았고, 한쪽에 베개와 이불이 쌓여 있다. 베갯잇과 이불보에 베개와 이불을 넣어서 이틀 동안 사용할 침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기차를 타기 전 대합실에 있는 책방에서 산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를 읽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칼슨이라는 심리 치료사인데 이 책은 1997년 저작으로 미국에서 55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일상에서 부딪히는 사소한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내용의 짧은 글들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당시에는 엄청나게 중요하고 그 일의 결과에 따라서 세상이 크게 변할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모두 사소한 일이고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며칠 전 아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내는 여섯 자매 가운데 둘째니까, 언니 하나에 여동생이 넷이나 된다. 자매가 많다 보니 여러 가지로 좋은 일 나쁜 일이 일어난다. 최근에는 둘째 여동생과 무슨 일로 서운했다고 이야기했었다. 자기가 동생을 생각하는 만큼 동생은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나는 3남 4녀의 장남인데, 역시 형제자매 간에 희로애락이 많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세상살이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