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탑승구를 나와 저물어가는 빗속의 <도야마(富山) 공항>이라고 적힌 글씨를 본 순간 뭉클했다. 수많은 옛 조상이 ‘나를 잊지 않고 와주었구나!’ 하고 눈물로 맞아주는 것 같았다. 간단한 절차를 마치고 출구를 나서자 ㅎ 선생님이 우산 두 개를 들고 맞아주셨다. 첫 만남이지만 그간 많은 메일을 주고받았기 때문인지 특별히 긴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ㅎ 선생님은 도야마 구로3댐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 주목해서 처음으로 집요하게 연구하신 분이다. 그분이 앉은 자리에는 ‘4.3 기억하다’라고 적힌 붉은 친환경가방이 놓여 있었다. 수년 전 조선인 옛 노동자 김태경 씨의 후손을 만나러 제주도에 갔다고 했는데 그때 산 가방인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마중 나온 ㅎ 선생님의 차로 1시간 정도 다테야마(立山)–구로베(黒部) 알펜루트를 향했다. 눈 덮인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곳을 향해 가는 길은 자연이 아름다워서 현실 같지 않았다. 다테야마를 오르는 케이블카 표는 이미 매진이라서 바로 옆에 있는 다테야마 칼데라 사방박물관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다테야마는 4월1일 발매 순간에 여행사들이 선점해 버리는 초인기 여행지로 한국에서도 유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불발탄이 폭발하여 눈앞에서 죽은 사람만도 10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은 손발이 갈가리 찢겨 나갔고, 바윗돌이 가슴을 덮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래서 사체의 행방은 잘 모른다. 강제징용자들은 질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부상으로 죽었다. 터널 공사 중 나온 돌덩어리를 나르는 짐차에서 떨어지거나 터널 받침목을 제대로 설치 안 해서 죽어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공사장에서 죽은 사람을 끌고 나가는 것을 수백 번 이상 목격했다. - 나가노 히라오카댐(長野平岡) 강제연행노동자 김창희 증언, 경북 월성 출신, 160쪽 - “내가 일본에 연행된 것은 1944년 2월의 일로, 당시 누나는 시집을 갔고, 큰형은 사망했고, 셋째 형은 만주로 갔다. 고향에는 어머니와 둘째 형과 내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내 나이 23살 때다. 어느 날 잔디를 깎고 돌아왔는데 구장이 찾아와 하는 말이 ‘이 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두 명 있으니까 한 명은 2년 동안 일본에 가서 일하고 와야 한다.’라며 통달(通達, 소집통지서)을 들이댔다. 당시 이러한 통지서를 거부할 수는 없었으며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이번 글은 미츠다 이쿠오(満田郁夫)교수가 I 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I 씨는 미츠다 교수가 오랜 연구생활을 해오면서 깊은 교분을 맺어온 K출판사 사람이다. I 씨는 어린 시절 죠반(常磐)탄광 해저 갱도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상황을 목격한 상황을 미츠다 교수에게 들려주었고 미츠다 교수는 한국에 그 내용을 공개하였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K출판사의 I 씨는 우리가 계속 펴내 온 동인잡지를 언제나 응원해 주던 사람으로 잡지 간행을 하는 동안 아주 친해졌다. 1980년대 어느 날 I 씨는 죠반(常磐)선 열차를 타고 논밭이 펼쳐진 시골마을 고향집으로 나를 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