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청동기시대 토기’ 하면 민무늬토기를 떠올립니다. 무늬가 가득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 대비되는 말로 청동기시대 문화를 상징합니다.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시작됩니다. 금속이 새롭게 출현하는 시기라 ‘청동기’라는 시대 명칭이 붙었지만 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양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민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니까요. 이처럼 청동기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기본이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에 끊임없이 다루어져 왔고 많은 연구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청동기시대 토기는 정말 무늬나 색깔이 없을까? 민무늬토기는 넓은 의미에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모든 토기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대개 좁은 의미에서 거친 바탕흙의 토기, 곧 정선되지 않은 바탕흙으로 빚고 거칠게 다듬은 뒤 800도 이하의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는 토기를 말합니다. 민무늬토기는 무늬가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무늬를 내거나 색을 입힌 토기들이 발견됩니다. 점토를 붙이거나 도구를 사용해 새기거나 눌러 장식한 신석기시대 토기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의 국비 지원과 허가를 받아 부여군(군수 박정현)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총장 강경환)가 발굴조사 중인 사적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대지조성을 위해 성토한 흔적과 제의 통로로 추정되는 대형 나무기둥열(목주열 木柱列)이 발견되었다. * 목주열: 나무 기둥 구멍이 열을 지어 배치된 유구로, 지상식 가옥, 목책(木柵, 구덩이를 파고 나무기둥을 박아 만든 방어시설) 또는 의례시설 등 다양한 시설의 축조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음. 부여 송국리 유적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농경유적으로 그간 조사에서는 타원형의 구덩이와 기둥 구멍(주공)이 배치된 원형 집자리, 목이 외부로 벌어진 큰 항아리, 삼각형 돌칼과 유구석부 등이 발굴된 바 있다. * 유구석부(有溝石斧): 머리 부분에 홈이 팬 자귀(목재를 찍어서 깎고 가공하는 연장) 모양의 석기로, 홈자귀라고도 부름. 기존에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는 성토층이 매우 한정된 양상으로 파악되었으나,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이전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의 넓은 면적(대략 1,000㎡)에 걸쳐 인공적으로 대지를 조성한 평탄한 성토층과 유일하게 늘어서 있는 나무기둥
[우리문화신문=이한영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에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 생활과 생업 활동을 보여 주는 다양한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설명카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가운데 많은 유물이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1974년 주민의 제보로 발견되었고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발견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견해를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자료가 수습되었고 이후 발굴에서도 새로운 자료들이 연이어 확인되는 등 역사ㆍ학술적 값어치를 인정받아, 1976년 사적(면적 546,908㎡)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 발굴과 연구 성과로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1호 돌널무덤의 발견 1974년 4월 국립박물관은 부여 초촌면 현지 주민의 제보를 받고 유적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나갑니다. 조사팀은 판석 위에 큰 돌이 얹어져 있었다는 주민의 상세한 설명에 이미 도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표를 제거하고 덮개돌을 들어 올린 뒤 흙을 제거하다 보니, 예상과는 달리 동쪽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