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송곳으로 자기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원 최북의 그림 가운데는 ‘풍설야귀인(風雪夜歸無人)’이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겨울밤, 귀가하는 나그네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갑니다. 어쩌면 가슴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저 흉흉한 바람이 최북의 고달픈 인생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이 거칠게 보이는 것은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닌 손가락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인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두화는 손가락만 쓰는 것이 아니라 손톱, 손바닥, 손등을 써서 그리는데 털로 만든 붓인 전통적인 모필화(毛筆畵)와는 달리 파격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독창법인 화풍입니다. 지두화는 원래 8세기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18세기 초에 청나라의 화가 고기패(高其佩)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화가로는 강세황(姜世晃)ㆍ허필(許珌)ㆍ심사정(沈師正) 같은 이가 있습니다. 원래 조선시대 묵화를 그리는 도구로는 붓을 썼는데 흔히 쓰던 붓으로는 염소털로 만드는 양호필(羊毫筆)이 있었지요. 그밖에 아기가 태어난 6달쯤 뒤에 처음 자르는 배냇머리로 만드는 ‘태모필(胎母筆)’이 있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술을 즐기므로 원례(院隷, 조선시대, 승정원에 딸려 있던 하인)도 취하여 액속(掖屬, 궁중의 궂은일을 맡아하던 사람)에게 모욕을 주기까지 하는데, 나라의 기강과 관계가 되므로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더욱 행실이 나빠 뉘우침이 없는 사람은 볼기를 치고고 유배(流配)하였다. (가운데 줄임) 이후 형조(刑曹)로 하여금 술을 많이 빚은 자에게 볼기를 치고, 또 주등(酒燈, 술집임을 알리려고 문간에 다는 등) 키는 것을 금하였으나, 끝내 금할 수가 없었다.“ 위는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1770년) 1월 26일 자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을 내리고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왕명을 내리곤 하였지만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습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특히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가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외눈의 자화상을 그린 호생관 최북은 눈밭에서 술에 취해 얼어 죽었다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화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괴짜 화원은 아마 최북(崔北, 1720~죽은 해 모름)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 북(北) 자를 반으로 잘라서 ‘칠칠(七七)’을 자(字, 어른이 되어 붙이는 또 다른 이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여보게, 칠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스스로 자로 삼았다니 괴짜 화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최북한테는 ‘최메추라기', '최산수' 등의 별명이 있지요. '최메추라기'는 그의 메추라기를 그림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어서 붙은 별명이고, 역시 '최산수'라는 별명은 그가 산수화를 잘 그렸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인 〈메추라기> 그림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최북은 어떤 힘 있는 이가가 와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윽박지르자 차라리 나 자신을 자해할지언정 남에게 구속받아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자기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습니다. 또 그는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는 술에 취해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라고 외치며 물에 몸을 던지는 등 괴짜 삶을 살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여기 최북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