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이 말은 말이 겨레의 정체성이요, 독립 번영의 연장이라는 뜻으로 110년 전인 1914년 오늘(7월 27일) 세상을 뜨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1876~1914)이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배달말(우리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르치신 주시경 선생은 우리 말글을 갈고 닦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암울한 시대에 국권을 회복하고 겨레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큰 힘이라고 믿었던 분입니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당시 유일하게 한글을 가르친 교육자로 “주보따리”란 별명처럼 커다란 책보를 끼고 동분서주했지요. 선생은 언제나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한복 속에 우리 겨레의 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가갸글, 조선글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더욱 절실해진 한글보급 전번 이야기에서 지석영, 헐버트, 주시경이 지하에 묻혀있던 훈민정음을 살려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당시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1894년 1월 동학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할 능력이 없던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6월에는 청군이, 7월에는 일본군이 우리나라로 진군하여 결국 우리 국토를 놓고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드리려 하다가 일본 무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동학 농민의 세력은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진압되었습니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조선은 500년 동안 섬겨오던 청나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가 유력해졌습니다. 이에 고종은 1896년 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여 일본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1898년 당시 23살이었던 한힌샘 주시경은 망국의 위험을 실감하고 서둘러 국문법을 정리하여 닥치는 대로 보급을 서둘렀던 것입니다. 한글맞춤법의 출현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까지 물리친 일본은 을사늑약을 맺어 조선의 외교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