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정석현 기자] 18세기 실학사상 가운데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농업과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이를 통해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들을 우리는 북학파(北學派) 또는 이용후생파라고 부른다. 경기도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는 18세기 도시의 문화 속에서 탄생한 북학파에 대한 특별전 "북학자의 꿈'이 오는 9월 30일까지 열리고 있다.
▲ 수선전도(首善全圖)를 이용하여 탑동, 육조거리, 북촌, 남촌 등을 표시한 대형 지도
18세기 후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을 중심으로 성립한 북학파는 한양에 살던 실학자 집단으로, 당대의 폐쇄적이고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정신문화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당시 지배계층의 기본이념이었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명을 멸망시킨 청은 오랑캐, 조선은 명을 대신한 소중화, 서양과 그 앞잡이 일본은 금수로 인식하는 주의)에서 벗어나 상업진흥과 기술개발, 중국과의 개국통상을 통해 조선의 무지와 빈곤을 극복코자 하였다.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금척의 산하 일만 리가 한양 서울 속에서 번성하네”라며 도시문화의 번영을 노래한 바 있다.
거리 좌우에 늘어서 있는 천간 집에
온갖 물화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 어렵네
비단 가게에 울긋불긋 벌여 있는 건
모두 능라와 금수요
어물 가게에 싱싱한 생선 도탑게 살쪘으니
갈치, 노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이네
이덕무의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 중에서
<성시전도시>에서 나타나듯 18세기 한양은 전국의 물산이 모이는 활력 넘치는 도시였다. 이러한 도시문화가 지식인들을 자극하여 “이용후생학”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용후생파’, ‘연암학파(燕岩學派)’, ‘북학파(北學派)’, ‘백탑시사(白塔詩社)’로도 불린 서울 출신의 실학지식인들의 생활과 의식은 널리 도시서민층에 연결되어 있으며, 유통 위주의 경제론은 당시 소상품 생산자들의 시장(市場) 확대욕구를 대변하고 있다.
▲ 20세기 후반에 나온 백탑이 있는 그림엽서
▲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론을 편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 북학파 박제가는 그가 쓴 <북학의(北學議)>에서 개혁을 주장한다.
18세기 조선이 내포한 모순은 다양했다. 빈번한 자연재해로 농촌이 황폐화되었고, 삼정(三政) 문란이 더해져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홍대용·박지원·박제가·유득공·이덕무 등으로 대표되는 북학파는 지배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용후생의 학문을 연구하면서 낙후된 조선사회를 개혁하려는 꿈을 실현하려 했다.
남양주 도농동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보러온 박정진(42, 교사) 씨는 "전시회를 보면서 북학파들의 이용후생 사상으로 나라를 개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탑시사'라고도 불리게 된 그 백탑은 어디로 갔을까? 새삼스럽게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이덕무의 선시전도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 홍대용이 한글로 쓴 연행록인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북학파들의 연행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 북학파 이덕무(李德懋)가 쓴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세상을 그저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개혁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북학파,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엿보러 남양주 실학박물관에 가보면 좋을 일이다.
형암(炯庵) 이덕무의 집이 백탑 북쪽에 있었고, 낙서 이서구(洛瑞 李書九)의 사랑이 백탑 서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을 가면 서상수(徐常修)의 서루(書樓)가 있었고, 다시 꺾어서 북동쪽으로 가면 유금(柳琴)과 유득공(柳得恭)이 살고 있었다. 나는 한 번 가면 돌아올 줄 모르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무르곤 했다. 시문이나 편지가 책을 이루고, 술과 음식을 쫓아다니는데 밤에서 낮까지 이어졌다.
박제가의 <백탑청연집서문(白塔淸緣集序)> 중에서